새벽 기도를 마치자마자 양지로 달렸다.
산 기슭에 피어나는 물안개는 언제 보아도 장관이다.

남편은 오랫만에 길을 달리려니
생각보다 너무 멀다고 고속도로를 잘못 들어온 것 같다고 한다.

"길 잘못 드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말아요.
제가  이 길을 3년동안  다녔잖아요."

이른 아침 중부 고속도로를 달리며
내가 이 길을 매일 어떻게 다녔을까?
까마득한 옛일처럼 잊고 있던
기억들이 형형색색을 하고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목회를 하면서 내 마음속에 떠나지 않는 바람이 있었다.
그것은 신학을 좀더 깊이 있게 공부 하고 싶은 것이었다.
대학원 진학을 하고 싶었지만
목회일정이 매일 바쁘고
아이들이 저마다 공부 하는 중이여서
나까지 진학 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실상은 전혀 가능하지 않지만 기도는 해야지!" 하고
이런 저런 기도를 다한 후에
맨 끝자락에 덧 붙혀서 신학을 더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해 왔다.
기도는 했지만 이루어지리라고는 전혀 기대도 안하니 마음도 편했다.

그러던 어느 겨울 날.
모교에서 교수님의 전화가 왔다.
장학에 뜻을 가진 분이 대학원 3년 등록금 전액을 내겠다며
자신의 뜻에 적합한 학생을 추천해 달라고 해서
나를 추천했다는 것이다.
이젠 아이들이 컸을테니
대학원 진학을 하고 싶으면 진학하여
신학을 더 집중적으로 공부하라는 것이었다.

무언가 감추고 있던 것을 끄집어 낸듯 가슴이 뛰었다.
주님에게 기도 한 것은 어떠한 것도
반드시 응답되는 것에 놀라고 또 놀랐다.

남편에게 은사님이 보낸 제의를 말했더니
이외로 단 번에 거절이다.
나는 얼마나 실망했는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학비도 장학금으로 다 마련되었는데 왜 안되요?."

"사람이란 모든 일에 때가 있는 법이야.
심을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어.
당신에게는 이젠 거둘 때지 심을 때가 아니라니까."

"학문에 무슨 때가 정해져 있나요?
배우는 일에는 때가 없다고 생각해요."

"당신은 이미 목회 현장에서 일하고 있잖아.
실전에서 일하고 있는데 뭐가 더 필요해.
목회 하는데는 신학 4년 배운 것으로 충분해."

다른 것은 다 남편에게 순종하고
순종이 안되면 복종하고
복종도 안되면 양보하고
양보가 안되면 포기하면서 살아 왔는데
이번만은 오랜동안의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주님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라는 확신때문에
좀처럼 포기가 되지 않았다.

"여보! 당신이 신학 하는 동안 제가 뒷바라지를 다했으니
이젠 당신이 나를 도와줘요."
지나간 나의 공적까지 공치사하며
부탁도 하고 애원해 봐도
남편은 추호의 흔들림 없이 완강히 반대이다.

남편은 절대로 반대이지만 하는데 까지는 해봐야지!
나는 식구들이 잠든 깊은 밤에
불기도 없는 추운 방에서 입시 공부를 시작했다.
성경, 영어, 철학, 논문이 입시 과목이다.
나에게는 영어가 제일 치명적이었다.
대학때 배운 영어 자료들을 다시 끄집어내어 공부하였다.

12월 6일이 입학 시험 날이다.
오전 8시에 첫 과목을 치룬다.
그 시간에 어떻게 용인 밑의 양지 까지 갈 것인가?
새벽에 떠나려면 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남편에게 뭐라고 말하고 시험을 보나?
나는 남편이 나를 입시 시험 장소에 데려다 주어서
입시 시험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기도하면 입시 준비를 하는 기간 안에
남편의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기도는 남편이 마음을 바꾸어
대학원 진학에 찬성하게 되는 것을 포함한다.
그러나 입시 시험날이 다 되었는데 남편은
조금의 변화가 없다.
나의 품에는 남편에게 말도 못하고 받아 놓은  
수험표가 간직되어 있었다.

그런데 입시 바로 전날
남편은 내일 양지에 있는
총신 대학 신학대학원 캠퍼스에 간다고 하지 않은가!
그러나 그것은 나를 위한 행보가 아니라
우리 교회에서 입시 시험을 보는 한 전도사님을 격려하고자 간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에게 "당신도 동행하지!" 라고 하였다.

수험표를 챙기고 펜도 준비하고...
"내일 입시 시험을 보게 된다면 그것도 기적이야!"
나는 주님이 허락하는 데 까지만 가기로 했다.

입시 시험날 새벽!
남편은 시험을 치루는 교회 전도사님을 차에 태우고
나도 앞자리에 타라고 했다.
그 전도사님도, 남편도 내가 아무도 모르게 입시 준비를 해왔고
오늘 시험을 보게 되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차가 한창 중부 고속도로 지날 때
남편은 그 전도사님에게 입시에 관한 주의 사항을 일러 주고 있었다.
나는 자는 척하며 그동안 공부 했던 것들을
머리속으로 차분히 정리하였다.

양지 캠퍼스에 도착한 시간은 7시 30분이었다.
그 전도사님은 서둘러 자기 수험 번호에 해당하는 강의실로 들어 갔다.
나도 들어 가야 할텐데...
마음 속에서 조바심이 났다.
남편의 눈치를 보는 시간이 25분이 흘러
시험 시작 5분전이 되었다.
너무 조급해져서 눈물이 나려고 했다.

"네 남편의 차로 입시 시험 보는데 데려다 달라고 했잖아!
그대로 해주었는데 왜 울려고 하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그렇게 울려왔다.

"지금 5분 전인데 저는 어떡해요."

골똘히 마음의 대화를 하고 있는데
남편이 나를 툭! 친다.

"여보! 저 전도사님은 점심시간까지 줄곧 시험을 볼텐데
우리는 목욕이나 갔다올까?."

"당신 혼자 다녀오세요.
나는 그냥 여기 있을래요."

"당신 혼자 지루 할텐데 목욕하는게 싫어?
할수 없지 뭐! 나혼자 갈 수 밖에!
그럼 점심 시간에 이 곳에서 만나!"

남편이 떠나자 나는 바람처럼 쌩쌩 달렸다.
시험장에 도착하니 시험지를 나누기 바로 전이었고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거룩하게 시험 보도록 묵상 기도 중이었다.

어찌 되었든
기도는 그대로 이루어졌다.
나는 남편의 차를 타고 시험장에 왔고
지금 입시 시험을 치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성경, 영어과목 시험을 치루고
내일은 철학과 논문을 본다.
오늘 시험에 합격해야 내일 시험을 치룰 자격이 주어진다.
주님은 여기까지 나를 도우셨고
여기까지 나에게 허락 하신 것이다.
오늘 걸으라는 곳 만큼만 걷는 것이다.
여기서 멈추라면 멈추는 것이다.

나는 시험을 무사히 다 치루고
남편이 목욕 간 곳에서 학교로 돌아 오기전에
만나기로 약속한 그 곳에 가 있을 수 있었다.

남편은 시험을 보느라고 발갛게 상기된
내 얼굴을 보더니
정작 오늘 시험을 보는 수험생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방청객인 당신이 왜 더 긴장했냐고 웃음을 터뜨린다.

집으로 돌아와서
병원에 입원한 성도님 심방을 가는 차 안에서
내 핸드폰이 울렸다.
수험번호 ******* 번 합격을 축하 합니다! 라는 메시지 였다.

나는 너무 기뻐서 나도 모르게 환호성을 터뜨렸다.
야호! 할렐루야!
남편이 깜짝 놀라 나를 쳐다본다.
아! 그래도 감출 수 없는 이 기쁨을 어이하리!

그러나 기쁨도 잠깐이었고
기쁨의 분량만큼 걱정이 밀려왔다.
오늘은 그 전도사님 때문에 시험장에 갈 수 있었지만
내일은 또 어쩌면 좋을꼬!

아무런 대책도 없는 그 밤에
기도 반, 입시 공부 반으로 밤을 새웠다.
입시 둘째날도 주님이 허락하시는 곳 까지만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