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회초리로 내 종아리를 때리던 어머니는
이젠 통곡을 하시는 것이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까지
어머니에게 이렇게 심하게 매를 맞은 적이 없다.
내가 무언가 잘못하면
어머니는 그 잘못을 깨닫도록 잔잔히 물어보셨고
그 대답에 반성한 것이 보이면
때리는 일 없이 용서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자초지종도 묻지 않고
무조건 회초리를 들어 종아리를
심하게 치시는 것이다.
그것도 하복을 입은 고등학교 2학년
딸아이의 종아리를...
나는 평소 아버지가 못마땅 했다.
우선 학교에서 내주는 신상명세서에
아버지의 학력을 쓸 때 부끄러웠다.
다른 친구들은 대졸, 대학원졸업...
그런데 나는 국졸 이라고 쓰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1.4후퇴 때 고향의 전답을 다 두고
황해도에서 피난 나오신 이후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고
근면 성실하게 일 하셨지만
노동일하는 나의 아버지는
내 이상적인 아버지가 아니었다.
아이들이 꿈꾸는 부자 아빠도 아니고
돈이 없다면
차라리 교장 선생님이나 목사님이면 좋으련만...
내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얼마나 안하는지
다른 친구들은 나의 아버지가 돌아 가셨는줄 알았다고 한다.
그 때 나와 친하게 지내던 한 친구의 아버지는
육사를 나온 군 장성이었고
인명이의 아버지는
딸들의 이름을 따서 지은 황인의원 병원장 이었고
다른 아버지는 태평양 화장품 사장이었고
다른 친구의 아버지는 고등학교 선생님 이었다.
그 친구들은
"너의 아버지는 국가 고위 공무원이거나
교장 선생님이거나 목사님이지?"
라면서 궁금해 했고
나는 웃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
무언의 거짓말을 해오고 있었다.
그 날
바로 그 친구들과 하교를 하는 학교 정문에서였다.
재갈거리며 전교생이 쏟아져 나오는데
어디선가 탁한 목소리가 소리 높여
"정옥아! 정옥아!"부르는 것이었다.
아버지였다!
하루 종일 일을 하여 지저분한 옷을 입고
아버지 옆에 더 남루한 옷을 입은 친구 분과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순간 숨이 멎을 것 같은 수치심이 들었다.
못 들은체 하고 얼른 아이들 속에 숨었다.
친구들이 "정옥아! 저 아저씨가 네 이름을 부른다.
"누군데?
너의 아버지이시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마구 뛰었다.
내 등 뒤에선 "제가 내 딸 이야!
내 딸이 정말 인일여고 다닌다니까!"
아버지는 친구 분에게
아버지를 보고 달아나는 딸의 뒷모습에 대고
그렇게 자랑하고 계셨다.
집에까지 단숨에 뛰어간 나는
울며불며 아버지가 학교 정문에 와서
나에게 망신을 주었다고 어머니에게 투정하며 울었다.
어머니는 그동안 우리들에게 으름장용으로만 매달고
한 번도 사용한 일이 없는
회초리를 갖고 와 매를 치시기 시작 한 것이다.
"네 아버지의 뭐가 그리 창피했느냐?"
"옷에 흙칠을 한 그대로 오셨잖아요.
게다가 아버지 친구 분은 술까지 취했었어요.”
“아버지의 옷에 흙이 묻은 것이 뭐가 창피해!
네 아버지가 도둑질을 했냐?
사기 쳐서 다른 사람을 해하였느냐?
뇌물을 받아 부정한 짓을 했느냐?
"내 친구의 아버지는 병원장 이란 말예요!
내 친구의 아버지는 군 장성이란 말예요!
"네 아버지는 남에게 피해 안주고
너희들 잘 기르려고 하루도 쉬지 않고
뼈가 부서지도록 일하시는 분이다.
병원장 아버지의 딸은 당연히 인일 여고에 다니겠지만
노동하는 네 아버지 딸이 인일 여고에 다니니
아버지에게는 가장 큰 자랑거리야.
친구에게 자랑하고 싶을 만큼...
아버지는 너를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자랑으로 여기는데
너는 그 아버지를 수치하게 생각하다니
이 몹쓸 것!
어머니의 모진 매를 맞으며
나는 그동안 아버지를 부끄러워했던
나의 잘못을 얼마나 회개했는지 모른다.
밤늦게
술에 만취되어 들어오신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회초리로 맞은
나의 다리를 얼음찜질 해주라고 하셨다.
여학생 다리를 시퍼렇게 멍들게 해놓았으니
학교도 못 다니겠다고
오히려 어머니를 나무라셨다.
나는 홑이불을 뒤집어쓰고
"아버지 잘못했어요
아버지 잘못했어요."
나의 아버지는 3대 독자셨다.
나의 친할아버지는
외할아버지와 같은 시대에 복음을 받고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셨다.
두 분은 막역한 친구 사이였고
두 분 다 자신의 고향에 사재를 털어 예배당을 지으셨다.
일본 식민지 시대에
교회의 종을 떼러 온
일본 순사에게 대항하다가
지하 감옥에서 모진 매를 맞으시기도 하셨다.
1.4 후퇴 때는
교회를 지키느라 피난하지 못하셨다.
아마 그 곳에서 두 분이 돌아 가셨을 것이라고
어머니는 때때로 북녘 하늘을 보며 눈물 지으셨다.
어머니는 아버지 집안의 신실한 신앙이 마음에 들어
위 어른들의 권면에 따라 결혼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듯이
할아버지의 하나님, 아버지의 하나님이
너의 하나님이 될 것 이다”
라고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머니는 항상 즐거워 하셨다.
조상 적부터 내려오는 순결한 신앙이
딸에게 유산되는 것을
삶의 가장 최고의 기쁨으로 여겼던 어머니는
그 날
깊은 상처와 실망과 비애를 맛보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한 평생
이 세상 사람들이 자랑하는
부와 명예와 권세...
아무 것도 갖지 못하셨지만
아들도 아닌 딸들을 지극히 사랑하셨고
신실한 믿음을 상속하셨다.
아버지의 임종은
찬송 속에서 이루어졌다.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은
언니에게 목걸이, 반지를 빼어
성경책 위에 놓게 하고
“금이나 은을 위하여 살지 말고
성경 말씀을 따라 살라”고 하셨다.
“천사들이 꽃마차를 가지고
나를 영접하러 왔구나.
찬송을 계속 부르고 싶다.”
찬송을 부를 수 없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우리들이 찬송을 부르고
아버지는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손가락으로 찬송에 박자를 맞추셨다.
나의 아버지의 유택은
시부모님이 사시는 청평집 울타리 안 언덕에 있다.
고향을 두고 피난하셨고
아들이 없는 친정아버지를
측은히 여기셨던 시아버님이
당신을 위해 준비하셨던 가묘를 선뜻 내주셨던 것이다.
시아버님은 김포 선산에 묻히시겠다고...
시부모님을 뵈러 가면
“어서 아버지에게 먼저 올라가서
인사 여쭙고 내려오너라.
너희를 얼마나 기다리겠니?
어제 내가 너의 아버지 머리카락 새치를 뽑아 드렸다.
네 아버지가 시원해 하셨을 거다. 허허허”
아버지의 산소에 가보면
잔디에 나있는 잡초를 다 솎아 놓으셨다.
“아가! 내가 오늘 네 아버지 이발을 말짱히 해 드렸다.
동갑나기인 이 친구가 먼저 가서 나를 이렇게 부려먹는다. 허허허”
아버지의 산소에 가 보면 풀을 말끔히 깎아 놓으셨다.
“아가! 네 아버지가 궁금하지 않도록
내가 매일 아침마다 올라가서
너희들 소식을 전해 드린단다.
이번에 큰 손자 장학금 받은 얘기도 해 드리고
작은 손자 학사 장교에 합격한 얘기도 해드렸다.
네 아버지가 심심해 하지 않을거야.
나도 너의 아버지와 같이 있어 든든하다."
아버님은 수시로 친구를 만나러 가듯
내 아버지의 산소를 돌보신다.
장남에게 시집 간 딸들 이여서
같이 동거하며 살지 못했는데
돌아가신 아버지는 우리 집 울타리 안에 같이 살고 계시다.
4대가 같이 살고 있는
우리 시아버님을 그토록 부러워 하셨던 아버지는
평생에 자식들과 얼마나 같이 살고 싶으셨을까?
매년 설날, 추석날 명절 아침을 두 분만이 지내고
이제나 오나 저제나 오나
시집 간 딸들을 기다리던 쓸쓸한 베란다에
이젠 허리 굽은 어머니 홀로 기다리고 계신다.
오늘이 식목일이라고
내일 시댁 선산에 가기 전에
먼저 친정아버지에게 다녀가라는
시아버님의 고마운 전화를 받았다.
나는 아버지를 찾아 뵈오면
빼놓지 않고 이렇게 고백한다.
“아버지!
나는 아버지가 자랑스러워요.
내 가슴에 순교자로 살아 계시는
할아버지도 자랑스러워요.
할아버지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고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었어요
또 나의 하나님이
내 아들의 하나님이 된 것을 믿어요!"
나의 아버지 묘비에는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나의 가슴에 아버지는
“내가 막내 딸 가슴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이젠 통곡을 하시는 것이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까지
어머니에게 이렇게 심하게 매를 맞은 적이 없다.
내가 무언가 잘못하면
어머니는 그 잘못을 깨닫도록 잔잔히 물어보셨고
그 대답에 반성한 것이 보이면
때리는 일 없이 용서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자초지종도 묻지 않고
무조건 회초리를 들어 종아리를
심하게 치시는 것이다.
그것도 하복을 입은 고등학교 2학년
딸아이의 종아리를...
나는 평소 아버지가 못마땅 했다.
우선 학교에서 내주는 신상명세서에
아버지의 학력을 쓸 때 부끄러웠다.
다른 친구들은 대졸, 대학원졸업...
그런데 나는 국졸 이라고 쓰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1.4후퇴 때 고향의 전답을 다 두고
황해도에서 피난 나오신 이후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고
근면 성실하게 일 하셨지만
노동일하는 나의 아버지는
내 이상적인 아버지가 아니었다.
아이들이 꿈꾸는 부자 아빠도 아니고
돈이 없다면
차라리 교장 선생님이나 목사님이면 좋으련만...
내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얼마나 안하는지
다른 친구들은 나의 아버지가 돌아 가셨는줄 알았다고 한다.
그 때 나와 친하게 지내던 한 친구의 아버지는
육사를 나온 군 장성이었고
인명이의 아버지는
딸들의 이름을 따서 지은 황인의원 병원장 이었고
다른 아버지는 태평양 화장품 사장이었고
다른 친구의 아버지는 고등학교 선생님 이었다.
그 친구들은
"너의 아버지는 국가 고위 공무원이거나
교장 선생님이거나 목사님이지?"
라면서 궁금해 했고
나는 웃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
무언의 거짓말을 해오고 있었다.
그 날
바로 그 친구들과 하교를 하는 학교 정문에서였다.
재갈거리며 전교생이 쏟아져 나오는데
어디선가 탁한 목소리가 소리 높여
"정옥아! 정옥아!"부르는 것이었다.
아버지였다!
하루 종일 일을 하여 지저분한 옷을 입고
아버지 옆에 더 남루한 옷을 입은 친구 분과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순간 숨이 멎을 것 같은 수치심이 들었다.
못 들은체 하고 얼른 아이들 속에 숨었다.
친구들이 "정옥아! 저 아저씨가 네 이름을 부른다.
"누군데?
너의 아버지이시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마구 뛰었다.
내 등 뒤에선 "제가 내 딸 이야!
내 딸이 정말 인일여고 다닌다니까!"
아버지는 친구 분에게
아버지를 보고 달아나는 딸의 뒷모습에 대고
그렇게 자랑하고 계셨다.
집에까지 단숨에 뛰어간 나는
울며불며 아버지가 학교 정문에 와서
나에게 망신을 주었다고 어머니에게 투정하며 울었다.
어머니는 그동안 우리들에게 으름장용으로만 매달고
한 번도 사용한 일이 없는
회초리를 갖고 와 매를 치시기 시작 한 것이다.
"네 아버지의 뭐가 그리 창피했느냐?"
"옷에 흙칠을 한 그대로 오셨잖아요.
게다가 아버지 친구 분은 술까지 취했었어요.”
“아버지의 옷에 흙이 묻은 것이 뭐가 창피해!
네 아버지가 도둑질을 했냐?
사기 쳐서 다른 사람을 해하였느냐?
뇌물을 받아 부정한 짓을 했느냐?
"내 친구의 아버지는 병원장 이란 말예요!
내 친구의 아버지는 군 장성이란 말예요!
"네 아버지는 남에게 피해 안주고
너희들 잘 기르려고 하루도 쉬지 않고
뼈가 부서지도록 일하시는 분이다.
병원장 아버지의 딸은 당연히 인일 여고에 다니겠지만
노동하는 네 아버지 딸이 인일 여고에 다니니
아버지에게는 가장 큰 자랑거리야.
친구에게 자랑하고 싶을 만큼...
아버지는 너를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자랑으로 여기는데
너는 그 아버지를 수치하게 생각하다니
이 몹쓸 것!
어머니의 모진 매를 맞으며
나는 그동안 아버지를 부끄러워했던
나의 잘못을 얼마나 회개했는지 모른다.
밤늦게
술에 만취되어 들어오신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회초리로 맞은
나의 다리를 얼음찜질 해주라고 하셨다.
여학생 다리를 시퍼렇게 멍들게 해놓았으니
학교도 못 다니겠다고
오히려 어머니를 나무라셨다.
나는 홑이불을 뒤집어쓰고
"아버지 잘못했어요
아버지 잘못했어요."
나의 아버지는 3대 독자셨다.
나의 친할아버지는
외할아버지와 같은 시대에 복음을 받고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셨다.
두 분은 막역한 친구 사이였고
두 분 다 자신의 고향에 사재를 털어 예배당을 지으셨다.
일본 식민지 시대에
교회의 종을 떼러 온
일본 순사에게 대항하다가
지하 감옥에서 모진 매를 맞으시기도 하셨다.
1.4 후퇴 때는
교회를 지키느라 피난하지 못하셨다.
아마 그 곳에서 두 분이 돌아 가셨을 것이라고
어머니는 때때로 북녘 하늘을 보며 눈물 지으셨다.
어머니는 아버지 집안의 신실한 신앙이 마음에 들어
위 어른들의 권면에 따라 결혼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듯이
할아버지의 하나님, 아버지의 하나님이
너의 하나님이 될 것 이다”
라고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머니는 항상 즐거워 하셨다.
조상 적부터 내려오는 순결한 신앙이
딸에게 유산되는 것을
삶의 가장 최고의 기쁨으로 여겼던 어머니는
그 날
깊은 상처와 실망과 비애를 맛보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한 평생
이 세상 사람들이 자랑하는
부와 명예와 권세...
아무 것도 갖지 못하셨지만
아들도 아닌 딸들을 지극히 사랑하셨고
신실한 믿음을 상속하셨다.
아버지의 임종은
찬송 속에서 이루어졌다.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은
언니에게 목걸이, 반지를 빼어
성경책 위에 놓게 하고
“금이나 은을 위하여 살지 말고
성경 말씀을 따라 살라”고 하셨다.
“천사들이 꽃마차를 가지고
나를 영접하러 왔구나.
찬송을 계속 부르고 싶다.”
찬송을 부를 수 없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우리들이 찬송을 부르고
아버지는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손가락으로 찬송에 박자를 맞추셨다.
나의 아버지의 유택은
시부모님이 사시는 청평집 울타리 안 언덕에 있다.
고향을 두고 피난하셨고
아들이 없는 친정아버지를
측은히 여기셨던 시아버님이
당신을 위해 준비하셨던 가묘를 선뜻 내주셨던 것이다.
시아버님은 김포 선산에 묻히시겠다고...
시부모님을 뵈러 가면
“어서 아버지에게 먼저 올라가서
인사 여쭙고 내려오너라.
너희를 얼마나 기다리겠니?
어제 내가 너의 아버지 머리카락 새치를 뽑아 드렸다.
네 아버지가 시원해 하셨을 거다. 허허허”
아버지의 산소에 가보면
잔디에 나있는 잡초를 다 솎아 놓으셨다.
“아가! 내가 오늘 네 아버지 이발을 말짱히 해 드렸다.
동갑나기인 이 친구가 먼저 가서 나를 이렇게 부려먹는다. 허허허”
아버지의 산소에 가 보면 풀을 말끔히 깎아 놓으셨다.
“아가! 네 아버지가 궁금하지 않도록
내가 매일 아침마다 올라가서
너희들 소식을 전해 드린단다.
이번에 큰 손자 장학금 받은 얘기도 해 드리고
작은 손자 학사 장교에 합격한 얘기도 해드렸다.
네 아버지가 심심해 하지 않을거야.
나도 너의 아버지와 같이 있어 든든하다."
아버님은 수시로 친구를 만나러 가듯
내 아버지의 산소를 돌보신다.
장남에게 시집 간 딸들 이여서
같이 동거하며 살지 못했는데
돌아가신 아버지는 우리 집 울타리 안에 같이 살고 계시다.
4대가 같이 살고 있는
우리 시아버님을 그토록 부러워 하셨던 아버지는
평생에 자식들과 얼마나 같이 살고 싶으셨을까?
매년 설날, 추석날 명절 아침을 두 분만이 지내고
이제나 오나 저제나 오나
시집 간 딸들을 기다리던 쓸쓸한 베란다에
이젠 허리 굽은 어머니 홀로 기다리고 계신다.
오늘이 식목일이라고
내일 시댁 선산에 가기 전에
먼저 친정아버지에게 다녀가라는
시아버님의 고마운 전화를 받았다.
나는 아버지를 찾아 뵈오면
빼놓지 않고 이렇게 고백한다.
“아버지!
나는 아버지가 자랑스러워요.
내 가슴에 순교자로 살아 계시는
할아버지도 자랑스러워요.
할아버지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고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었어요
또 나의 하나님이
내 아들의 하나님이 된 것을 믿어요!"
나의 아버지 묘비에는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나의 가슴에 아버지는
“내가 막내 딸 가슴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2004.04.06 08:06:30
저의 선친도 황해도에서 피난오셨는데~~~!
어릴적 인천중공업 노무자로 근무하셨던 아버님이 참 대단해보였는데....ㅋㅋㅋ
남자와 여자의 느낌의 차이라고나 할까...........?????
돌아가실때까지도 친구분의 전도를 받아드리지 못했던 아버님을 생각하면 유사모님
아버님의 신앙이 부러웁죠!
단지 하나의 위안은 아버님이 돌아가실때 오셨던 아버님친구분의 전도로인해 상이 끝난후
어머님이 전식구들 데리고 교회로 갔다는것이죠!!!
항상 좋은 글 가슴에 새깁니다! 좋은하루, 승리하는 하루가 되기를 바라며........^ㅎ^
어릴적 인천중공업 노무자로 근무하셨던 아버님이 참 대단해보였는데....ㅋㅋㅋ
남자와 여자의 느낌의 차이라고나 할까...........?????
돌아가실때까지도 친구분의 전도를 받아드리지 못했던 아버님을 생각하면 유사모님
아버님의 신앙이 부러웁죠!
단지 하나의 위안은 아버님이 돌아가실때 오셨던 아버님친구분의 전도로인해 상이 끝난후
어머님이 전식구들 데리고 교회로 갔다는것이죠!!!
항상 좋은 글 가슴에 새깁니다! 좋은하루, 승리하는 하루가 되기를 바라며........^ㅎ^
어머님 형부인 우리 큰이모부는
우리 아버지와 비교하면 항상 월등허단 생각이 들었거든요
방학해서 이모님댁에 놀러 가면 대한극장에서 영활 보여 주시고
명동에서 양식사주시고 드라마쎈터에서 연극 보여주시고...
이래서 전 소년기 시절 이모부와 아버지의 단숫 비굘 하면서
아버지가 째째하고 초라해 보였어요
게다가 우리 아버진 멋지고 낭만적인 데라곤 하나도...
그저 검소하고 정직하기만 강조하셨어요...
정말 싫었었죠...
제철딱서니는 생각지 않고서리.....
결혼해보니까 울이모부 완전 철없어서 울이모 가슴아리...
(바람핀 건 아니지만...)
울아버지가 더 좋으 점이 많더라구요....
그런데 우리 아버지 지금은 안계세요
잘해드리려는데 돌아가시더군요....
너무 허망합니다
아버지 !!!
철없는 딸 용서하세요....
아버지 말씀처럼
생각은 높고 깊게
생활은 낮고 검소하게...
늘 생각하면서 살려고 노력할게요
그리고 상대방을 배려하라구 늘 하신 말씀
안까먹고 있어요
유선배님
우리모두 선배님처럼 그런 안좋은 기억 거의 있을 거예요
인제부터 남아게신 양쪽 부모님께 더 잘해드려야겠어요...
넘 좋은 글 감사드려요(:l)(:l)(:l)(: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