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
어덯게 알았지?
나의 밝히고 싶지않은 부끄러운 어떤것을?.....
유정옥 사모를 꼭 보듬어 안고 표현하기엔 더무나벅찬 나의 마음을 눈빛으로만 전했다.
"게시판에 올리시면 김치 보내드리겠어요"
난 아무말도 안했는데 아니 못했는데.......
내가 김치 안 해먹고 살고있다는것을 어떻게 알고 이런 말씀을 하실까?
역시 마음이 맑으신 분은 상대의 마음도 마음의 눈으로 다 보이는 걸까?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고해성사 보는 마음으로 나의 부끄러운 김치 역사를 이야기나해볼까 보다.
내가 결혼하고 한 3년 간은 우리엄마가 언덕배기 아파트까지 김치를 해서 날라 주셨다.
그땐 고마운 것도 모르고 당연한 듯 받아먹었다.
이것이 사랑표 김치의 첫번째 행진이다.
그후로 7년간은 남편 따라  대구에서 보내게 되었는데
애 셋 낳고 절절메는  딸이 안스러웠는지 친정 엄마가 가정부를 보내주셨는다. 남편의 묵인하에 철 딱서니 없는 주부로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김치는 맛이 있거나 없거나 가정부 몫이었다.
다시 서울 생활이 남편의전근으로 시작되었다.
이때도 철 없기는 마찬가지
남편월급이 60여만원이 었을때 아무 하는일 없이 28만원 씩이나 월급을 주면서 가정부를 두었다.
지금 생각 해도 알수없는 일이다.
어느달 갑자기 남편은 사표를 내고 사업의길로 뛰어들었다.
이때는 남편을 조금씩 돕는다는 명분으로 어린 애들 집에서 봐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한치 앞 일도 모르면서 가정부를 계속 두고 있었다.
김치는 당연히 가정부 몫이었다.
조금 사업이 잘돼는가 싶으면 확장하고 또 확장하고......
경험없는 월급쟁이가 겁없이 일을 벌리다 사향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쪼들리느데 어쩌랴~~
가정부를 내보내는 수밖에....
애 셋 데리거 중심 못잡고 휘청거리는 나를 불쌍히 여겼는지 같은 성당 다니는 동생같은 자매가 말없이 김치를 해서 갖다주기를 5년여~~
그자매가 남편 따라  판교에 있는 정신 문화원 사택으로 이사갈때 까지 사랑표 김치 행진은 계속 되었다.
그후론
사랑표 김치 행진은 친정 엄마가 떠 맡았다.
"내가 너희들에게 몇번이나 더해주겠니?"
벌써 10  여년째 이말씀을 하시면서 온 기력을 다해서 두딸에게 김치를 해주신다.
올해로 80 을 훌쩍 넘기신 엄마가 이젠 은퇴 하실 때가 가까운지 김치하시는날은 기운이 없어 힘이드신다고 딸들을 부르신다.
그래도 주체는 엄마이시다.
이리하여 60을 바라보고 며느리 사위 손주 까지 다본 나는 김치를 담가보지않고 살았다.
실은 나도 약간의 양심은 있는지라 며느리 볼때 동서들과 잔치김치 만들고 결심한바 있는데
이젠 빗을 갚을때가 된것 같으니 내가 손수한 김치를 아들네 집에 엄마네 집에 해서 보내야 겠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이~ 김치 안해 주셔도 돼요"
이는 바쁜 시어머니 배려해주는 기특한 마음인데 저변에는 친정에서 갖다 먹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수있다.
이래서 한번의 기회는 지나갔고
딸이 결혼한 작년에 결심 비슷하게 한것은 이번에야 말로 김치해서 여러집 나눠 먹어야겠다고.....
또 수포로 돌아갔다.
딸네 집은 시어머님 해주신 김치가 남아 돌아가 어떤때는  내 차례 까지온다.
이래저래 김치 담아 먹을 팔자는 아닌가 보다.
참 뻔뻔한 대한민국의 주부이다.
그런데 이건 어떻게 되는 이야긴가?
연로한 엄마의 사랑표 김치의 바톤이 유사모에게 넘어가 그행진을 계속할 모양인데~~~~~
절대로 그럴수는 없다.
이번에 받은 유사모의 정성어린 사랑표 김치는 내마음안에서 우리들 마음안에서 뜨거운 감동 으로 잊혀지지않고 계속적으로 행진할것이기 때문이다.
진정 나는 사랑 받기위해 태어난 사람인가보다.
유사모에 모인 우리 인일  식구 모두는 사랑 받기위해 태어난 축복 받은 사람들임엔 틀림이 없는것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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