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의 두 영웅 루즈벨트와 박정희 그리고 5.18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 민족사에 천년에 아주 드물게 나타나는 위대한 지도자였다. 박정희 대통령과 김영삼, 김대중 양김씨의 차이가 무엇인가? 박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목표를 세우셨으며, 주산을 사용하던 시절에 건설 비용을 정확히 산출해 내고 추진하셨다. 그런데, 발전하는 한국을 위한 물류 유통의 중요성을 내다보지 못하던 양김씨는 극렬하게 공사 반대 시위를 선동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장차 수도가 이전할 때를 위하여 이미 치밀한 설계 도면을 마련해 놓으셨으며, 중국과 교역할 시기가 올 것을 예상하고 서해안에 해상 물류 유통 기지를 만들어 놓으셨다. 실로, 그의 경제 전략은 삼십 년 앞을 내다보았기에 그의 시대의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그의 위대함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한국 경제는 대통령의 통치 영향을 아주 크게 받는다. 워낙 시장 경제가 튼튼하게 발달한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한번 과오를 범했다고 해서 경제기 쓰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 경제는 대통령의 정책 여하에 따라 성장하기도 하고 휘청거리기도 한다. 우리는 그것을 양김씨의 합작품인 IMF 사태를 거치면서 뼈저리게 경험하였다. 경제 주권 상실은 정치적 주권마저 위협하는데 경제가 무너지면 민주주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을까? 한국은 안정된 경제의 토대 위에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기 위해서라도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를 필요하였다. 그럼에도 그를 독재자라고 부르는 이들이 있었다. 그에게 아직 진행 중이었던 경제 계획을 완성할 수 있도록 대통령 재출마의 기회를 부여하였던 유신 헌법 때문에 그가 독재자였던가?

한국 전쟁 때 한국에서 전사한 오만 명의 미군 병사들은 정말 좋은 시절에 목숨을 잃었다. 그들의 청년기에 미국은 부강한 나라, 점점 살기 좋은 나라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어릴 적 미국은 몹시도 가난한 나라였다. 1920년대와 1930년 대 초의 대공황 때 실업율이 아주 높았으며, 생필품은 커녕 식량 구하기 어려운 가정들도 많았다. 마비된 경제는 점점 더 나빠졌으며, 거리에 넘쳐나는 어깨쳐진 실업자들이 매일 구직의 문을 두드려도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미국도 이때가 경제 문제가 미국의 존속을 위협하던 시절이었다. 경기가 나쁘고 소득이 줄 수록, 소비 심리는 위축되고, 소비가 줄 수록 경제는 더욱 나빠지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었으며, 역대 정부의 경기 부양책은 미국의 병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 뿐이어서 정부마저 무기력감에 빠져있었다.

이때 등장한 미국 경제 재건의 영웅이 바로 프랭클린 D. 루즈벨트(Frankiln D. Roosevelt) 대통령이었다. 그는 자신은 절뚝발이이면서 미국의 절뚝발이 경제를 일으켜 세웠다. 장래가 유망한 소년으로서 갓 청년이 되었을 때 소아마비를 앓아 장애인이 되었던 루즈벨트는 한때 몹시 절망하며 실의에 빠져있던 적이 있었다. 다시 걷기 위해 불굴의 노력으로 또 도전하고 도전하였던 그였기에 그의 연설에는 남달리 용기를 주는 힘이 있었다. 그는 1920년대의 대경제 공황 앞에서 절망에 젖어 있는 미국인들에게 계속 긍정적인 비전과 용기를 심어 주는 연설을 함으로써, 심리적으로 긍정적인 정신을 조성했다. 여기서 1960년대에 우리 민족도 잘 살수 있다는 믿음과 꿈을 심어준 박정희 대통령의 연설과 루즈벨트 대통령의 연설 사이에 공통점이 있음을 우리는 발견한다.

때는 미국에서 경제 이론이 헤매고 있던 시절이었다. 공황을 탈피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이 오히려 미국 경제를 더욱 더 공황의 늪에 빠기게 함에 따라 정부가 경제에는 간섭하지 않는 영국의 자유 시장 경제 논리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엄청난 불황의 늪 앞에서 루즈벨트는 케인즈의 경제 논리를 과감히 도입하였다. 정부가 시장 경제에 적극 개입하는 뉴딜(New Deal) 정책을 실시해 노동 시장을 창출하여 실업자를 구제하기 시작했다. 루즈벨트라고 미국병을 고치는 해결책을 처음부터 알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다른 미국 대통령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지도자 스타일이 있었다. 박정희와 양김씨가 다르릇 루즈벨트는 다른 대통령들과 사뭇 달랐다.

한국 사람은 고추장을 먹어서 인내심이 강하다고 한다. 실론 인내와 끈기는 한국인의 미덕이었다. 그런데, 이런 한국적인 미덕이 루즈벨트에게도 있었다. 그는 부시 대통령처럼 유리한 위치에서 대통령이 되지 않았다. 그는 불구자라는 불리한 조건에서 출발하였다. 늘 휠체어에서 생활하던 그는 다시 걷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물론 그것은 실현 불가능한 목표였으나 자신의 장애와 싸우는 사이 그는 남달리 정신력이 강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입버릇처럼 '용감하고 끈질기게 뭔가를 시도하라. 만약 실패하면 다른 방법으로 다시 하라.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포기하지 않고 끝없이 시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 침체로 침체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미국인들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것은 파이프를 물고 앉아 항상 여유 있게 웃고 있던 대통령 루즈벨트의 모습이었다.

이렇듯 루즈벨트는 남보다 불리한 환경에서 불굴의 투지로 꿈에 도전했던 인물이라는 점이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이기도 하다. 중국 공산군 출신의 좌익들과 그 후예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군 장교 출신이었다는 점을 들어 그를 친일파라고 매도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일본군 장교가 된 이유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그가 문경국민학교에 부임하던 날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일본인 교사들에게 몰매맞는 수모를 당하였다. 이튿날 자취를 감춘 박정희는 여러해 후에 일본군 장교의 모습으로 다시 그 일본인 폭행 교사들 앞에 일본검을 들고 나타나 그들의 사과를 받아낸다. 이런 점에서 그는 민족주의자였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 시대 상황에서는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폭행에 그가 항거하는 유일한 수단이었기도 하다.

그런데, 박정희가 일본군 포병대 장교였다는 사실이 한국 경제 발전을 위해 의미하는 바는 자못 크다. 포병대 장교가 되었다는 말은 상당한 수준의 과학 지식 습득을 의미한다. 포병 장교가 되려면 한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 받는 과학 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대포의 발사는 정밀한 수학적 계산에 따라 이루어진다. 수학적 계산에서 한치의 오차라도 있으면 대포는 절대로 명중하지 않는다. 화학을 모르고 폭탄을 다를 수 없으며, 대포는 물리학 원리를 응용한 현대 무기이다. 즉, 한 사람의 포병 장교에게는 적어도 기초 과학에 관한한 탄탄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일본인이 정책적으로 한국인에게는 인문계 대학에만 진학하게 하고 과학 두뇌의 등장을 제한하였던 시대에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이 미국에 항복하였을 때 우리나라가 해방될 수 있었던 것은 1943년 12월 1일 미국의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 중국의 쟝 개석 총통 등이 모인 삼개국 정 회담에서 “때가 되면”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카이로 선언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3년간의 미소 신탁통치 없이 한국의 미래를 한국인의 손에 내버려두었다면 우리나라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우리 힘으로 우리 땅에 주둔하는 일본군을 해산시키고 총독부를 접수하기 어려웠겠지만 그것도 가능하였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아마도 박헌영의 남로당 세력과 중공군 팔로군 소속 독립군들과 러시아군 소속 조선인 부대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이 내전에 중국 공산당 군대나 러시아 군대가 불참하였다고 하면 박헌영의 남로당이 정권을 잡았을 것이다. 일제 시대 때 우리나라에는 상해 임정을 제외하면 전혀 민주주의 세력이 없었다는 것이 현실이었으며, 상해 임정은 국내 기반이 없었다.

정권을 잡은 박헌영의 남로당은 죽창 들고 지주들과 부자들을 찔러 죽였을 것이다. 그들이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그렇게 했던 것은 해방후 미군정과 한국 정부 수립 하에서 5년간 못했던 것을 한 것이다. 땅 기진 사람과 재산 있는 사람들을 죽창으로 찔러 죽이는 것이 그들의 경제 이론이다. 그렇게 사유 재산 제도를 없애면 빈부의 차별이 없어지니 국민 경제가 향상되는가? 아니다. 아마도 열심히 일하면 잘살게 된다는 희망이 사라져 버린 사회에서 농산물 생산의 효용성은 더욱 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이 정책적으로 조선인 산업기술 인력을 양성하지 않았기에 일본인들이 철수한 우리나라는 경제적인 타격을 받았었다.

바로, 그 점이 2차 대전 후 일본과 한국이 달랐다. 일본은 비록 패전국이었지만 이미 세계적인 과학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는 아무런 과학 지식이 없었다. 미국이 국가 예산의 90%를 지원하던 이승만 정권 하에서도 국민 GNP가 75불로 세계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였다면 미국의 무상 원조마저 없는 박헌영 치하에서 아마도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존속이 어려워졌을 것이다. 박헌영의 공산당 일파가 부자들과 지주들을 모두 죽이고 경제 시스템을 망가뜨린 다음에는 아무런 외화벌이 수단이 없는 나라는 다시 외국에 빚을 지게 된다. 이런 경제적인 현실을 감안하더라도 해방 정국의 정권을 절대로 박헌영의 남로당에 넘겨서는 아니될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일에 힘을 써 준 분이 맥아더 원수였다. 군정 기간 동안 한국의 잘래를 위하여 이승만 정권 탄생을 후원한 맥아더 원수의 선견지명은 참으로 옳았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중 박정희 대통령은 인문계와 이공계의 두뇌를 모두 소유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는 독특한 대통령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치학 박사였으나 농업국 경제를 어떻게 발전시켜야 되는지에 대하여는 전혀 식견이 없었던 듯하다. 한국이 식량 자급자족도 못하는 빈농국에서 30년만에 산업 선진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데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과학 두뇌가 있었다. 앞은 내다보고 미국의 지원을 받아 한국과학연구소(KIST)를 설립한 분도 박정희 대통령이었으며, 중화학공업단지 등 새로운 첨단산업 단지들이 건설될 때마다 미국에 기술 고문단 파견을 요청하여 그들로부터 신속하게 기술 이전을 해오신 분도 박정희 대통령이었으며, 한국 각 공장의 구조와 공정을 현장 실무자보다 더 잘 파악하고 계셨던 분도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결코 한 나라의 경제는 자연발생적으로 농업국에서 산업국으로 되지 아니한다. 그리고, 후진국에서 산업 개발을 차관을 빌리기가 무척 어려운 이유는 실패로 끝나기 쉽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국의 지도자로서 박정희 대통령에게는 농업국을 산업국으로 발전시키는 원대한 목표와 치밀한 경제 전략 그리고 반대에 굴하지 아니하고 이행하시는 투지가 있었다. 루즈벨트의 뉴디일 정책도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정책처럼 독재성이 있는 정책이었다. 사공이 많은 배는 아무데도 가지 못한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약점이다. 그러기에 일국의 경제 발전은 강력한 지도자를 요구한다. 이런 논리에서 미국의 루즈벨트도 한국의 박정희도 독재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장기적 경제 정책의 필요성 때문에 4년씩 두번으로 제한되어 있는 대통령 임기를 헌법을 개정하여 연장시켰다는 점에서도 루즈벨트와 박정희 두 대통령은 공통적이다.

박정희와 루즈벨트는 모두 열등감과 싸워야 하는 인물이었다. 흔히 박정희의 키가 작은 열등감에 대하여 말한다. 무엇보다도 그에게는 나라 잃은 민족의 청년이라는 불리한 조건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일본과 싸우기 위해 일본에서 배울 것은 배웠다. 그는 조선시대의 실학과 일본의 과학 지식으로 무장된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지식을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 남김없이 발휘하였다. 루즈벨트와 더불어 실로 그는 난세의 영웅이었다. 온갖 악조건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끊임없이 배우고 노력하며 분투하는 가운데 연마되는 정신력과 닦아지는 지도력--이것은 실로 한국의 신세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스타일의 지도력이다. 요즘 청년 좌익들처럼 선동적인 기질만 가지고 정치판에 뛰어드는 이들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운 지도력을 그들은 난세에 키우며 꽃피웠던 것이다.

이런 위대한 대통령이 김재규 당시 정보부장에게 시해당하던 1979년 10.26 사태의 비극은 부마사태에 대한 김재규의 잘못된 관찰 때문이었다. 우리에게 위대한 박정희 대통령을 일본은 곱게 보지 않았으며, 부마사태의 직접적인 원인은 부산 시민의 반정부 감정을 선동하는 일본의 편파적인 방송이라는 사실을 김재규는 모르고 있었다. 10월 16일 왜 김재규의 범행 장소 가까이에 정승화 장군이 있었는지는 아직 밝혀지고 있지 않으나, 12월 12일 정승화 등 중공군 출신 장성들이 육사 출신 장성들을 제거하려던 시도는 오히려 영관급 장교들이 육사 출신 장성들을 중심으로 딘합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리고 창군 40년만에 비로서 한국군은 중공군 출신 장성들의 입김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점에서 힌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12.12 사태가 가지는 의미는 중대하다.

12.12 사태 때의 군부 내 충돌이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장교들의 승리로 끝나는 것을 가장 싫어한 자들이 바로 김대중 일당이었다. 이후 김대중 일당은 정권 찬탈을 위해 민중 봉기를 일으키려는 노력을 끊임 없이 하였다. 김대중의 장남 김홍일씨의 주도로 결성된‘민주연합청년동지회(이하 연청)’가 전국적인 청년 봉기조직을 결성하였다. 김대중의 지지세력이 5월22일 정오를 기하여 서울은 장충공원, 지방은 시청 앞 광장에서 개최할 ‘민주화촉진 국민대회'에‘연청’이 전국적으로 가세한다는 계획도 있었다. 서울대 복학생 이해찬씨가 중심이 되어 5월13일부터 5월15일까지 전국 각 대학에서 시위를 벌였다. 그 시위 는 표면상으로는 최규하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였으나, 그 시위를 배후에는 김대중은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 민족에 남긴 정치적 유산을 모두 없애려는 음모가 있었다.

노벨 평화 수상자 김대중은 실제로는 북한이 한국을 남침할 기회를 제공하는 일을 초지일관 해오고 있었음이 주목된다. 1975년 3월 월남 중부 지방에서 1894년 4월의 동학혁명과 1980년 5월의 광주사태와 유사한 민중봉기가 일어나 월남군을 월맹의 남침 앞에서 무력화시킴으로 적화통일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는데, 문익환 목사가 한국에서는 제2의 동학혁명이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재야 출신 이문영 고려대교수와 문익환 목사의 ‘국민연합’이 그런 정치 집단이었다. 김대중씨의 흉상이 새겨진 메달들을 운동권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화갑씨가 김대중씨의 불법 연설 녹음테이프를 재야인사들에게 200여개 배포했다 (본인은 20개 배포했다고 주장.) 그리고 5월 22일로 예정된 김대중의 거사 일정은 5월 16일 이화여대 강당에서 열렸던 전국총학생회장 비밀연석회의 참석자들 중 일부가 경찰에 연행되면서 밝혀졌으며, 그것이 또한 5.17 전국계엄확대가 불가피했던 이유 중 하나였다.

5월 16일 오후 6시에 경찰이 이화여대 비밀연석회의장을 덮칠 때 빠져나온 일부 학생들은 전국 대학에서 19일부터 시위를 일으키기 위해 17일에 고대에서 다시 비밀연석회의를 가졌다. 이렇게 계엄 수사 당국의 검거 대상이 된 전남대 총 학생회장 박관현이 그의 일행 두 사람과 더불어 광주의 혁명가 윤상원 자취방에 은신하러 온 때가 5월 18일 아침이었다. 윤상원이 폭동 거사를 제안한 것은 바로 이때였으며, 이들은 아침 식사를 하였으나 서울의 모 대학을 경비하던 계엄군이 아침 식사는 커녕 식기조차 챙기지 못하고 전남대로 이동하기 전에 이미 폭동 모의를 했다는 사실은 과잉 폭력이 먼저였다는 주장이 거짓임을 분명하게 입증한다. 그날은 일요일인데 윤상원의 사주를 받은 학생들이 전남대에 모여들었다. 5월 14일부터 16일까지 공부 안하고 시위하던 학생들이 도서관 문도 안여는 5월 18일에 학교에는 왜 모여드는가? 윤상원은 계엄군이 시위 진압 작전인 충정 작전이 불가피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학생들과 계엄군을 자극하도록 선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5월 21일 오후 8시경 일부 광주시민들을 포함 실탄을 장비하고 무장한 이십 만명의 폭도들이 광주 도청을 경비하던 이백 명 정도의 계엄군의 생명을 위협하던 중 급기야 장갑차로 국군 병력들을 무자비하게 압사시키자 도청 방어를 포기하고 철수할 길을 열기 위해 첫 공포탄 발사가 있었다. 이후로 폭도들은 그들이 예비군 무기고 무기를 탈취한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그날의 발포 명령자가 전두환이라는 유언비어를 전국에 유포시켰다. 그들은 그것을 학살 명령이라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그 날의 피해자는 국군 병사들이었지 폭도들이 아니었다. 그후 김대중 일당과 폭도들은 계엄군의 과잉진압이 민주항쟁의 원인이었다는 주장을 줄곧 해왔다. 그러나, 그 폭동의 근본 원인은 본래 박정희 대통령을 어떻게 보느냐는 김대중의 사관(史觀)이었다. 이렇듯, 5월 22일로 예정된 김대중의 민중봉기를 정부가 5.18 계엄확대로 저지하자 윤상원이라는 광주의 혁명가가 5.18일에 폭동 거사를 한 것이 그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을 뿐, 본래 5.18 광주폭동의 근본 원인은 난세의 영웅 박정희를 바라보는 두 다른 시각의 충돌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1963년에 민족의비전을 제시하는 박정희 대통령.
(사진 좌)1969년의 한국은 아직 가난한 후진국이었다. 그러나 성공적인 경제개발 5개년 계획 후 한국은 빠르게 도약하기 시작하였다. 1969년을 분수령으로 한국은 농촌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그 이미지가 바뀌기 시작한다. 1969년에 한국 사람들은 가난 속에서도 꿈과 낭만을 가지는 멋을 향유하고 있었다. 그 후 십년은 조국이 급속히 산업 사회로 발전하는 기간이었다. 그러나 1979년의 부마사태로 인한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 사건은 그의 모든 업적을 부정하려는 무리들에 의해 광주 5.18 폭동이라는 또 하나의 사태로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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