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마침내 그 친구를 찾았다.
36년 만의 만남이었다.

우리 또래는 중학교도 입학 시험을 치뤄야 했던
고달픈 세대였다.
치열한 입시 전쟁 때문에
곳곳에서 과외가 성행했었다.
내가 간 곳은 과외를 전문으로 하는 집이었다.
반에서 3등이내의 성적표를 들고 가서
그 곳에서 내놓은 시험을 치뤄
합격점을 받아야 과외를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인천 시내의 각 초등학교의 수재들이
모여들었다.

나는 그 곳에서 그 아이를 만났다.
내가 다니는 초등 학교에서 전교 회장인 아이였다.
귀공자 같은 그 아이를
많은 아이들이 부러워했다.
선생님이 그 아이를 특별히 귀여워 했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은 샘이 나서
그 아이를 미워했다.
어느날 우리들은 그의 신발을 감추었다.
그 아이가 신발을 찾느라 애쓰도록
혼을 내주자는 모의였었다.
수업이 끝나고 우리들은 숨어서 그 모양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그 아이는 신발을 찾느라 고생하기는 커녕
선생님이 그 아이를 등에 업고 집까지 데려다 주는 것이었다.
그것을 본 우리들은 다시는 신발을 감추지 말자고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그 아이는 수업이 끝났는데도
집에 가려하지 않고
눈물만 흘리고 있는 것이었다.
"남자애가 울긴 왜 울어."
내가 핀잔을 주자
"정옥아 우리 엄마가 돌아가셨어." 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떻게해야
그 아이의 슬픔을 달래줄 수 있는지 알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날은 다른아이들과 공모하지 않고
나혼자 그 아이의 신발을 감췄다.
아니 내 손에 들고 있었다.
밖에서 지켜보니 그 날도 선생님이
그 아이를 업고 그의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울고 있던 그 아이에게
선생님의 등으로 엄마의 등에 업힌 것처럼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그 아이의 신발을
그의 집 대문밑으로 살며시 넣어 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에  나는 아무도 모르게 그 아이의 신발을 감춰
그 아이가 선생님의 등에 업히게 해 주었다.

나는 6반 반장이고
그 아이는 2반 반장 이었다.
그런데 우리반에서  키가 가장 큰 여자아이가 문제였다.
그 아이는 수업만 끝나면 2반으로 달려가서
남자 아이들을 때려 주는 데
하필 그 아이만 때려주는 것이었다.
"그 아이는  엄마가 돌아가셨으니 때리지 말라."고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았다.

그 여자 아이는
인일여고 3학년때 우리반이 되었다.
어렸을 때 처럼 공부를 잘했는데
서울대를 실패하고 후기 대학을 갔다.

졸업 후 4년이 지난 어느날  
그 두 사람이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웃음이 터지는지.
아! 그 친구가 어려서부터 그 남자아이를 좋아한 것이었구나!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들으며 나는 참 기뻤다.
그의 신부는 똑똑하고 야무져서
이젠 남편을 울지 않게 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을
내가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 오손도손 행복하게 잘 살고 있겠지
결혼식에 참석한 친구들의 말에 의하면
남자의 키가  훨씬 컸다고 하니
아내에게 매맞지는 않을거야
이렇게 생각을 떠올리면 언제나 웃음을 주는 커플이었다.

그런데 2년전
초등학교 동창생에게서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아내와 이혼 했다고 찾아온
그의 모습이 너무나 초췌했다는 것이었다.
거듭되는 사업의 실패로 인해 몹시 지친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구조조정이니 명퇴니 하여 압박받는  
우리 또래의 남자들이
자기 자신도 서 있기 어려운 이때  
오랫만에 불쑥 나타난 초등학교 동창생의 아픔을
세세히 돌아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동창생을 찾아 왔다가 별다른 이야기 없이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나는 왠지 어서 그 친구를 찾아
우리 동기들이 힘을 합하여
그의 고통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마음에서 강하게 재촉하는데도
연락할 길이 없다는 구실로 접어두었다.

이제 학교마다 하나, 둘
홈페이지가 생겨나고
더듬더듬 그 곳에 들어가는 법을 익힌 나는
오늘에서야 그 친구의 연락처를 찾기 위해
그가 다니던 고등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다.

아! 마침내 그 친구를 찾았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내가 찾은 것은 그의 장례식 사진이었다.
꽃으로 장식된 상여와
그 뒤를 따르는 아들과 딸아이의 모습과
선영에 묻히는 그의 하관 사진이었다.
그 사진에 찍힌 날짜는
친구의 고통을 돌아보지 않았던
우리들의 무관심을 진하게 질책하고 있었다.

그 친구는 동창생을 만나
마지막 무언의 호소를 하고
스스로 이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엄마의 등이 아닌
선생님의 등이라도 업힐 곳을 찾아 헤매던
그의 외로움에 아무도 귀기울여 주지 않은 것이다.

조금만 더 일찍 찾아나섰더라면...
이 뼈아픈 후회로 하루종일 마음이 아팠다.

이런 후회는 다시는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내일은 그의 아내였던 키 큰 내 친구를 찾아 나서야겠다.
차마 친구도 찾아오지 못하고
쓰리고 아프게 살아가고 있을 또 다른 나의 친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