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9.11 테러가 있은 후
온 세계가 술렁이더니
드디어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발발했다.
그 테러와 전쟁이 우리나라 경제에 타격을 입힐 것이고
나에게는 좀더 어려워진 생활을 감내하게 할테지
이렇게 먼 나라의 이야기로 뉴스를 듣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총회 본부라면서 남편을 찾는 전화가 왔다.
그 내용은 아프가니스탄 전쟁때문에
그 나라와 인접국가에서 일하던 선교사들이
대거 귀국 중이라는 것이다.
그 인접국가들은 대부분 이슬람교를 믿고 있어서
선교사들의 신변이 위험한 것이다.
그것과 우리 남편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가?

문득.
요즈음 혼자서 이곳 저곳을 다니고 오는 느낌이 들어왔다.

저녁에 집에 들어온 남편에게 그 이유를 묻자
러시아어를 할 수 있는 선교사를 찾는 것을 보고 지원을 했다는 것이다.
이미 카자흐스탄으로 배정이 되었고 일주일 후에 떠나게 되었는데
지금 그 곳 주변이 전쟁 중이어서 혼자 들어가게 되었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20년이 넘는 시간을  
힘든 길 어려운 길을 같이 걸어왔는데
왜 나에게는 이렇게 중대한 결정을 의논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나를 더 힘들게 했다.

남편은 당신이 떠난 후.
교회에 빈자리를 이미 준비해 놓은 상태였다.
이 일을 꾸미는(?)동안 내가 감쪽같이 몰랐던 것은
우리 서로가 너무 믿은 탓 일것이다.

남편 나름대로의 더 깊은 사랑의 배려가 있었을테지...
여기까지 마음을 추수리는 데는 사흘이 걸렸다.  

교회에는 전에 우리 교회에 기거하면서 죽기까지 공부하여
신학박사가 되신 김목사님이 오셔서 섬기게 되었다.
그러나 나혼자 남겨진 교회에서의  나의 일할 몫은 더 커진 셈이다.

"어려운 곳으로 파송되는 선교사는
가장 유능하고 경험이 많은 목사가 가야만 합니다.
초대교회에서도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은 전쟁 속에서 폐허가 되어가는 그 곳에
여러분이 사랑하고 아끼는
담임목사를 보내주는 헌신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가면 기도해 줄 분들이 이렇게 많지 않습니까!
전쟁이 끝나고
그 곳에도 정부가 인정하는 교회가 설 수 있는 날
저는 여러분에게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성도들은 남편의 마지막 설교를 듣고
오히려 감동으로 "역시 우리 목사님이야."
하면서 기쁨으로 보내 드리는 것이었다.
내가 남편을 말릴 수는 없고
은근히 성도들의 만류를 기대했던 꿈은 끝내 사라지고 말았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소식이
연일 뉴스에서 불붙고 있던 날.
카자흐스탄으로 떠나는 남편을 배웅하러
많은 성도들과 함께 인천공항에 나갔다.
떠나려고 나간 남편은 아프가니스탄 입접국가에서  
마침 귀국하는 친구 선교사들을 속속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왜 이렇게 위험할 때 하필 그 곳으로 떠나느냐."고
한결같이 만류한다.

남편은 나에게 다가와
조그만 소리로 소근거렸다
"너희들이 다 나오니 들어갈 사람이 필요하잖아."

남편의 짐이 떠나고 남편이 떠나기 위해서
나를 안아주며
"나는 다 좋은데 이렇게 조그만  당신에게
크고 무거운 짐을 지우고 떠나니 그것이 제일 가슴아파,
당신에게 의논하지 않은 것은 당신이 힘들어서 "아니오."하면
내가 포기하게 될 것 같아서였어."
그 날
뒤돌아 서는  남편의 등이 한없이 크고 넓어 보였다.

성도들은 "목사님 떠나시고 나면 우리 사모님 어떡게 해.
하면서 내 눈치를 살핀다.
눈물이 목까지 차올라 금방 봇물처럼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만일 그리하면 성도들도 참았던 눈물을 쏟아낼 것이 아닌가!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조용히 찬송을 불렀다.
성도들도 따라 불러 카자흐스탄으로 떠나는 남편을 찬송으로 배웅했다.

그 날 밤.
결국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내 몸 속에 그렇게 많은 눈물이 고여 있었을줄이야!

"여보! 쌓인 눈위에 또 눈이 쌓이오. 밖은 영하 30도의 혹한이오."
라는 편지 내용이 연일 계속되는 곳.
바다는 없고 건조한 내륙의 광대한 땅.
물이 나빠 2년만 지내면 풍토병이 드는 곳.
러시아에서 1991년에 독립하였으나 아직도 공산주의 체제의 나라.
대통령이 이슬람교도이기 때문에 다른 곳보다 종교 탄압이 심한 나라
전 국민이 가난하여 도둑과 강도가 많은 위험한 나라.
아무도 아는 이 없는 그 곳에서 남편이 밤낮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 나라에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국가에서 운영하는 탁아소가 아닌 민간 유치원을 건립하였다는소식.
300명이 넘는 성도들이 유치원 강당에 모여
앉을 자리가 없었다는  성탄절 예배 소식.
한국어와 한국 역사 강의를 하고 있다는 소식.
그리고 어쩌면, 남편이 카자흐스탄에 끼친 공로의 상으로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교회를 세울 수 있을 것 같다는
기적같은 소식이 계속 전해졌다.
그 곳은 예배를 숨어서 드리고
건물 밖에 공공연히 십자가를 세울 수 없다.

일년이 지난 후
남편은 나에게 카자흐스탄에 잠깐 다녀가라고 했다.
그 곳에 와야만 줄 수 있는 선물이 있단다.
인천 공항에서 알마티까지 5시간 30분을
알마티에서 남편이 있는 꾸스타나이까지
또 4시간 30분을 비행기가 날았다.
낯설고 먼 이 길을, 전쟁의 포화에 휩싸이던 이 길을  
가족을 두고.
십수년을 목회하던 교회와 성도들을 두고
일년 전 이 곳에 오던 남편도
꼬박 하루쯤은 울었을 것 같았다.

내가 도착하기 오래 전 부터
공항에 나와 있던 남편의 인도를 받아
남편이 일하고 있는 곳에 다달으니

아! 십자가!

십자가를 세운 하얀 교회가
오후의 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사랑 교회라는 푯말과 함께...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당신에게 주는 선물로는 이것이 가장 클 걸.
당신의 작은 손으로는 절대  들을 수 없으니까."
어린애처럼 웃고 있는 남편이 정말 자랑스러웠다.

그 곳에 간지 두 해가 지나서
유치원에 150명이 입학하고
그 곳에서 공부한 원생들이
국가 명문 초등학교에 대거 합격하여
국가에서 공인하는 유치원이 되었다.
교회에서 운영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무료 병원이 세워졌다.
한 주일에 300 가정에 일주일 양식을 나눠주고 있다는 소식이 있었다.
카자흐스탄인들이 300명이나 예수를 영접하여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남편이 가기 전 전임 선교사를 강제 추방한 꾸스타나이 시에서는  
그 곳에 정부의 공식 인정서를 받아
전무후무하게 세워진 사랑교회를
약탈자들로 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교회 옆에 방범초소를 세웠다.
이런 안전한 선교지에는 누구나 가고 싶어했다.
많은 선교사들이 앞다투어 그 곳을 지원할 무렵.

남편은
이 년 전  떠났던 먼 길을 다시 밟아
나와 교회와 기다리는 성도들 곁으로 돌아왔다.

남편은 영하 30도의 추운 날씨에 적응을 못하고
계속 감기를 앓았다.
고열로 인한 중이염으로 왼쪽 청각을 잃었다.

병원에서
"조금만 더 있었으면 오른 쪽 청각도 위험했다."는 말을 듣고

"귀 하나에 교회 하나! 어때?  가 볼만 했지?"
나의 걱정스런 얼굴을 보더니 남편은 오히려 익살을 떤다.

"남편없는 하늘아래 두 해만 살면 교회 하나!
어때! 나도  살 만 했지?."
나도 익살로 응수했다.

이래서 우리 부부는 천생연분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