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밭에서 자랐어도 생긴게 제각각이다.  호박   03.10  소나무갤러리



형제, 자매라는 것...


우리는 4녀 1남이다.
큰 언니와 둘째 언니가 9년 터울이고 나는 그 밑의 연년생으로 셋째, 한해 걸러 여동생, 그리고 다시 연년생의 남동생이다.
둘째가 늦다보니 기쁘셔서 연년생으로 여럿을 나으셨다. 아들 낳느라 여럿을 나았겠네...듣는 이들은 얼른 그 생각부터 하게 될 텐데 우리는 정말 그런 줄 꿈에도 모른 채 철이 들었다. 부모님이 1.4 후퇴 때 피난 나오신 실향민으로 할아버지, 할머니, 시골...이런거 절대 모르고 자란 대신 남녀 차별이라던가 남존여비...이런 것도 절대 모르고 자랐다. 남동생이 어렸을 적 하 촐랑거리고 까불면 어머니가 '아이구 내가 이렇게 날려고 그런게 아니었는데...' 하던 말도 나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만큼  다들 존중받고 자랐다.

큰 언니는 워낙 터울이 많다보니 우리 중학교 다닐 때 결혼을 했다.
나머지 넷은 유치원부터 시작해 초, 중, 고, 대학교를 모두 같은 시대에 다니고 웬만하면 다 같은 학교 정문으로 들락거렸다.(대학만 빼고)
자연 친구들도 대충 다 알고, 선생님들도 대충 다 알고, 학교 생활, 자라온 이야기 대충 다 안다. 아니. 너무나도 서로를 잘 안다. 자매들은 더 그렇다. 게다가 한시간 나갔다 오면 두시간 상황 설명 실감나게 하셔야 되는 엄마에 맞춰 우리 딸들 모두 삼십 즈음해 결혼하도록 매일 저녘이면 식탁에 둘러앉아 미주알 고주알 웃고 떠들고 하였으니....

밥 먹다가도 팝송 나오면 노트 가져다 영어로 받아적어서 초등학교 다니던 내게 경이롭고 어머니보다 더 어려웠던 큰 언니, 겨우 한 살 터울임에도 엄청나게 언니 노릇하고 챙겨주며 늘 나를 격려하던 둘째,   맨날 신문 보고 책 읽느라 동네 사람들이 얼굴 구경하기 힘들다던 집안 제일로 얌전(?)이였던 나. 애교도 많고 행여 남동생이 동네 아이들에게 얻어맞으면 역성 들어 싸움도 잘하고 딱지도 잘 따오고, 또  어머니께 야단 맞으면 오히려 더 큰소리치던 가끔 깍쟁이 넷째, 그리고 그저 딱지, 구슬만 주머니 가득 채우고 다니던 어리디 어리던 막내...


그런데 바로 얼마전 갑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사고로.
아버지 돌아가시고 이제까지 근 17년간을 포함해 어머니는 변함없는 우리의 큰 중심이고 든든한 백그라운드셨는데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나셨다.

그래서  우리는 며칠을 정말 오랜만에 함께 지냈다.
정직하고 열정적이고 엄마 닮아서 독립투사 같고 요즘도 행여 밤 9시 25분인가 전화하면  EBS 영어회화 보느라 전화 끊으라는 큰 언니는 이미 손주도 셋이나 두었는데 이제 엄마 대신으로 우리를 염려하여 구미구미 우리를 챙겼다. 둘째는 요즘도 조그만 체구에 동동 거리며 사업도 잘 감당해내고 틈틈이 교회 성가대 하느라 바쁜데 멀리 바다 건너 살며 갑작스런 비보에 오지도 못하고 멀리서 전화로 애를 끓였다. 아이도 셋이나 키우며 하는 일 많으면서도 여유작작한 넷째는 씨애틀서 급작히 오며 L.A 들러 언니의 꽃과 편지글을 들고 와 엄마 영전에 놓아드리는 슬기로움을 보이고 '나 갈 때까지 기다려야 돼!" 전화로 울부짖어 입관을 발인하는 당일날로 늦추게 하였으며, 중학 어느 무렵이던가부터 의젓해지던 막내는 제 아내와 함께  우리의 오빠처럼 아버지처럼 제 할 몫을 다 하였다. 우리는 모든 절차들을 함께 의논하여 치루고 여동생 다시 멀리 집으로 보내기까지 울고 웃으며 어머니를 추억하고 위로를 나누었다.

아, 형제란 게 이런 것이구나, 가족이란 게 이런 것이구나...
어렸을 적  같이 자라던  모습과 심성이 이제 50을 넘나드는 나이가 되었음에도 전혀 변하지 않고 그대로 발휘되고 수용되는 점이 한편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신기하다. 또 다섯의 셋째로 이쪽에 치일까 저쪽에 치일까 늘 어정쩡하니 살다가 형제 좋은 것도 결혼해 몇 년 지나면서야 알기 시작하고 아이 하나만 가졌던 것이 늘 한켠에 걸리더니, 이번 일 겪으며 형제, 자매가 이다지  소중하고 고마울 수 가 없다. 혼자인 내 아이에게 너무나 미안하다.

이제 우리는 다시 제각기 헤어졌지만 급히 만들어진 어머니 싸이트에 사진과 자료, 글 올리며 가슴속의 애통함과 위로를 나눈다. 우리는 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가 슬기롭게 이 슬픔을 극복하고 아직 끝나지 않은 어머니의 사랑이 우리 서로서로에게 계속 이어지고 피어나리라는 것을 ...
어머니가 남겨놓으신 이십여년간의 일지를 파일로 만드는 작업도 내 몫으로 남았다...그러니 어머니 보내드리는 일이 아직 다 끝나지 않은 것 같아 긴장을 늦추지 못한다.  

때때로 전화 드리며 '김신영 여사, 안녕하세요? 최예문입니다~~~.' 목소리 높여 말하면 '아, 최예문 여사?'하시던 친구같던 엄마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