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회 | 포토갤러리 | - 게시판담당 : 박화림
우리들의 어머니 이,양,숙님은 1927년 추석 담담날 이땅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때로부터 82년을 살아오시면서 아름다운 족적을 많이 남기시고
지난 수요일 낮(6월 18일)에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나가셨습니다.
82년의 생애를 돌아 볼때 가장 특기할 일은 18세에 친절하신 우리 아버님과 결혼하신 일입니다.
슬하에 4남 3녀의 풍성한 가정을 이루시며 64년이나 해로하셨기 때문입니다.
미국에는 저와 제 남편의 초청으로 53세 때 오셨는데 늦게 낳은 막내 아들의 박사 공부가 꿈이었지요.
그 꿈을 이루시며 자립적이고 성실한 자세로 열심히 사신 것은
많은 사람들이 잘 아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석주 전 제가 이곳에 와서 사흘을 지냈는데
그때도 병든 불편한 몸으로 부추를 다듬는 일을 하셨으니까요.
이곳에 계신 분들 중에 우리 어머니께서 기르시고 다듬으신 채소와 도토리 묵,
만드신 떡 등을 맛보신 분들이 많이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우리 어머니의 훌륭하신 일을 이야기 하려면
오늘밤 다가도 다 못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어머니의 자랑을 길게 늘어 놓으려고 나온 것은 아닙니다.
어머니의 생애에 어떻게 좋으신 하나님께서 찾아와서 만나 주셨던가...
하는 것을 중점으로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미국에 와서 교회에 정을 붙이고 사는 것은 대부분의 우리에게 당연한 일이었듯이
어머니도 세례도 받으시고 빠짐없이 교회 출석을 하셨지요.
그런데 깊은 믿음을 가지시게 된 것은 남다른 아픔이 있어서였어요.
첫째 아들을 삼십대에, 두째 아들을 사십대에 잃은 것이 그것이었어요....
제가 동생의 사고 소식을 듣고 한국에 나가보니 어머니는 더이상 울지 않으셨는데
넙적다리를 보여주셨어요. 너무나 두둘기며 울어서 그렇게 까맣게 된 것이었어요.
둘째 아들의 병수발을 들었던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고
바로 이 동네에서 하여서 여러분들 중에도 잘 아는 이야기 일것입니다.
거의 일년간 두세주에 한번씩 하루종일 걸리는 그 병원을 따라 다니셨지요.
한번도 마다 하지 않으시고 떡이며 따뜻한 음식이며 새벽부터 장만해서 따라가셨습니다.
까다로워진 아들의 입에 무엇이라도 넣어 보려고 그리하셨지요.
병들어 시들어 가는 잘 생긴 아들을 바라보는 엄마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너무도 기가 막히고 가슴이 아팠던 심정을 나중에서 이렇게 털어 놓으셨습니다.
"아무도 안보는 곳에 나가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싶었다"구요.
그러나 아들 둘을 잃으신 대신에 진실한 믿음을 얻으신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는지요.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삼년전쯤 다리가 부러지셔서 몇달동안 병원에 입원했었을때 였습니다.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께서 평생 워낙 어머니를 잘 돌보시니까 소홀한 면이 많이 있었고
저도 그때 찾아와 뵙지 않는 불효를 했습니다.
병원에 혼자 남겨진 외로운 어머니께 하루는 주님께서 대신 찾아 오셨답니다.
"내가 너에게 모든 것을 주었느니라..." 어머니는 꼭 그 말씀 한마디를 들으시고
무척이나 위로를 받으셨다고 합니다.
인생의 절반이상을 병든 몸으로 고생하며 살아오셨고, 죽을 고비도 여러번 넘기셨어요.
뿐만 아니라 누구나 처럼 인생이 만만한 것이 아니어서 어려운 경험을 많이 하셨죠.
아들을 둘이나 앞장 세운것은 남보기도 부끄럽다고 하실 정도로 가슴 아픈 상처였였는데
주님의 그 말씀 한마디로 모든 슬픔과 아픔이 녹아 내리는 것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그전부터도 그리하셨지만 그 일 후로 어머니께서는 더욱 모든 교회 일에 적극 협력하시고
새벽기도도 6개월 전인 지난 겨울까지 하루도 안 빠지고 다니셨어요.
물론 우리 차장로님께서 날마다 라이드를 주셔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저희들은 차장로님을 "우리집 큰 아들"이라는 별명으로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교회를 무척 사랑하시고 목사님을 참으로 좋아 하셨어요.
목사님께서는 특히나 어른들을 잘 돌봐 주셨지요.
해마다 여러번 여행도 같이 해드려서 우리 부모님께서는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 입니다.
이자리를 빌어 고석천 목사님과 요벨 교회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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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하나님께서 불효자 제게 임종을 지킬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 마지막 밤에 어머니의 고통하시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18시간을 함께 지내면서
자꾸만 시편 23편, 주 기도문, 사도 신경을 외워드리고 찬양을 해드리고 기도를 해드렸는데
무척 좋아하시는 것을 느낄수가 있었습니다.
저희들이 새벽에 다 모여 찬양을 해드리기도 했는데요...
아버지는 쉬지 않고 노래하실 정도로 노래를 잘하시지만 어머니는 노래같은 것 안하시고 평생을 사셨거든요.
그런데 찬송은 그렇게 좋아하시는지 몰랐어요.
손으로 지휘를 하시며 좋아하시고 찬양이 끊어질 때 마다 손으로 더 하라고 손짓을 하셨어요.
예배드릴 때는 아멘! 아멘!을 그렇게나 크게 하시기도 하셔서 우리가 다 놀랐습니다.
"내가 먼저 가야지?" 피곤해서 잠이 살짝 들 때마다 어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저는 깜짝 놀라 깨어서 어머니를 위로해드렸습니다.
"먼저 가 계시면 우리도 곧 따라 갈께요."
"엄마 이제 모든 것 다 내려 놓으세요" 어머니는 고개를 끄떡 끄떡 하셨습니다.
내가 먼저 가야지? 라고 그렇게 열번이나 물으셨습니다.
성도의 죽음을 귀히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그 몇시간 동안
여러 명의 귀한 목사님, 전도사님들을 수시로 보내 주시고 믿음의 격려를 해주셨어요.
고 목사님이 오셔서 마지막 예배를 드리고 나서
세번째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호흡 곤란으로 서너 시간후에 임종하셨습니다.
그 모든 일에 하나님의 손길이 임한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께 자녀들을 대표해서 감사드리는 것은
병이 들어 짜증나고 힘들어 하시는 어머니를 끝까지 잘 참아주신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 아니고 다른 보통 한국 남자를 만났더라면 우리 어머니는 이렇게 오래 사실수가 없었지요.
64년이나 함께 하시며 본이 되는 삶을 살아주신 아버지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리 어머니를 위하여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마지막 인사를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특히 뉴저지 상록회 회원들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 때문에 참 재미나게 사신다고 자랑을 많이 하셨지요.
특히 하일랜드 아파트에서 이웃하여 사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충분히 자주 찾아 뵙지 못한 우리들 불효자들 대신에 이웃 사촌 여러분께서 좋은 관계를 맺어주시고
맛있는 것 나누어 주시고 자주 찾아와 위로해주시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어머니를 하늘로 떠나 보내 드리면서 부탁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혹시라도 우리 어머니께서 알게 모르게 마음에 상처를 드렸거나 하는 일이 있으면 이시간에 모든 것 다 용서해 주시고
환송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 아버지를 부탁드립니다.
앞으로는 저희들도 예전보다 더 자주 돌보아 드리기로 결심합니다만
가까이 계신 친구분들께서 외로움 잘 타시는 우리 아버지를 배나 더 생각해주시고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우리도 다 이땅을 떠날 때가 있고 순서없이 다 가야합니다.
이곳에 오신 분들 중에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시는 분이 혹시 있다면
어머니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부디 예수님을 믿으세요. 그리고 천국 백성이 되세요. 그리고 우리 다 함께 영원히 그곳에서 살기로해요."
끝으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제게 귀한 어머니를 주신 하나님, 어머니를 구원해주신 하나님, 어머니를 친히 만나 주신 하나님,
또한 천국에 불러 올려 가시게 해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우리 어머니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할렐루야!. (2008년 6월 20일 두째딸 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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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Once Upon a Time in America)
사랑하는 어머니께
어머니 아니 계신 뉴저지는 텅 비어 버렸습니다.
어머니 가시던 날... 하늘이 함께 울었습니다.
우리들이 흘려야 할 그 많은 눈물이 다 비가 되어 땅을 적셨습니다.
이 땅이 옥토가 되어 어머니의 땀과 수고를 아름답게 돌려주었던
이 뉴저지 땅 한 구석에서 어머니를 아쉬워합니다.
아, 내 생애 가장 귀한 분을 잃었습니다.
다시는 그 지혜롭고 총명하던 어머니의 어드바이스를
얻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시는 내가 어머니! 엄마!라고 부를 분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숨쉬기도 고달파 하셨던 어머니
누워서 주무시지 못하고 꼬부리고 앉아서 잠깐씩만 졸던 어머니
6개월 이상 그런 몸으로 헐떡이던 어머니
마지막 주일 예배까지 기어서 참석하셨다니…
이제는 그 힘든 고통에서 완전히 자유하셨겠지요.
더 이상 눈물이 없는 곳, 더 이상 고통이 없는 곳,
그 아름다운 곳에서 새 몸을 입으셨겠지요.
이제는 가고 싶은 곳에 훨훨 다니세요.
두 아들과 딸을 만나 새로운 기쁨을 나누시고...
앞서간 성도들과 우리 주 예수님을 만나
찬송도 목청껏 부르세요.
이땅의 수고를 다 잊고 편히 쉬세요. 어머니
다만 저의 불효와 부족을 용서해 주세요..
이제 조금 있으면 따라 올라 가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어머니..
사랑합니다..어머니...
인선아~
당분간 어머니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질거야.
어머니란 존재는 우리에겐 늘 `눈물`이지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한 그리움.....뭐 그런 것과 닮은.
깊은 위로를 보내며 아버님의 쾌유를 기원할께
그렇게 부지런하시고, 총명한
또 지혜로운 조언을 해 주시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새록새록... 마음 가득하겠지만
눈물도 고통도 없는 곳에서 자유롭게
안식을 누리실 어머니를 생각하며
새힘을 내라.
구원 받은 성도로, 하나님 품으로 가신
복된 죽음에 깊이 감사드린다.
그래도 더 편한 곳으로 가셨다는 생각을 하면 좀 낫지안나 한다.
시간이 갈수록 못해드린 생각만 나지만 그래도 서로 사랑을 나누어 왔던거도 역시 큰 선물이 아닌가 싶더라.
그러니까 우리는 감사할일이 많지. 씩씩하게 잘 지내.
우리 모두 부모님께 제대로 효도하며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많은 분들의 축복 속에서 소천하신 어머니도 행복하신 분이지?
우리 친정어머니가 1927년 음력 8월28일 생이시거든.
거의 비슷한 시기에 사셨다 그지?
홀로 되신 아버님이 걱정이겠구나.
그래도 곁에 믿음의 형제들이 많이 계셔서 다행이다.
인선아 아무쪼록 기운 잃지말기를 바란다.
화림아, 명옥아, 혜옥아, 수인아, 순호야, 경선아,
친구들아 참 고맙다.
혜옥이 말대로 감사한 것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
모두들 건강 유의하고 부모님 살아 계시면 잘 해드리고...
좋은 여름날들 되기를 바란다...
할 수 있으면 힘들 때 서로 돕고 사는게 당연한 거 아니니?
마침 출장 기간이 아닌데다가
저녁 시간과 토요일이니까 시간이 가능해서야.
참,
네 부군 마음이 참 좋아 보이셨어.
때가 묻지 않은 그런 품성을 지니신 것 같애.
우리 아빠 잘 안다고 하시는 모습이 어찌나 순순해 보이시는지...
몸 추스리는데 시간이 걸릴거야.
절절한 어머님의 사랑.
그무엇에 비하겠니.
주님께서 귀히 쓰시고자 데려 가셨으니
슬퍼하지 말자.
좋으신 곳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계실테니 이 또한 감사할일.....
몸조심하고 아버님께서 빨리 쾌차하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