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니 새소리가 요란합니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았건만 부지런한 새들은 가지각색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뻐꾸기 소리가 제일 큽니다.   뻐꾹. 뻐꾹.
나는 귀에 제일 잘 들려오는 뻐꾸기 소리에 반사적으로 콩을 심어 놓은 모판을 바라봅니다.

뻐꾸기 울때면 콩을 심는다지..

비둘기가 무서워 마당에 모판을 깔아놓고 지난주 콩을 심었습니다.
콩 싹은 이제 그 무거운 머리를 마악 쳐들고 있군요.

' 그런데 이게 뭐야? '

파르스름하게 머리를 내밀고 있는 콩 모판에 발자국 여섯개가 찍혀 있습니다.
틀림없이 고양이 짓입니다.   밤 눈이 밝은 고양이가 왠일일까?

' 이 놈도 봄에 취했었나?   간밤에 봄바람이 너무 감미롭더니만... '

밭 가장자리에 심어놓은 헛개나무는 어느새 잎이 다 나와 바람에 출렁이고 있습니다.
며칠 안 보는 사이 나무는 무성해져 버렸습니다.   그동안 내 눈이 스쳤겠지만 나는 못보고 있었습니다.

' 봄이 가는구나. '

뻐꾸기가 울고 콩 싹이 나오고 헛개나무가 저리 무성해 졌으니...
나는 떠나가는 봄을 조용히 바라봅니다.

' 이 봄은 나에게 무엇이었나? '

이 봄은 왜 나를 힘들게 했었지?
이 봄은 왜 나를 흔들리게 했던 것일까?


지난주 화요일이었지요?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기 모임에 나갔습니다.

보고 싶은 얼굴도 있고,  스페인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걷고 돌아온 친구의 얘기도 듣고 싶고
또 밭일도 어지간히 정리가 되었으니까요.   내게 논이 있다면 모내기 준비에 정신이 없었겠지만..

모임을 끝내고 나니 아직 기차시간에 여유가 있습니다.
몇이 어울려 다시 길바닥 노천 주점에서 생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친구 하나가 새로 왔습니다.

모임에는 참석하지 못하고 길바닥으로 불려나온 친구입니다.
보고 싶던 친구이고 술 한잔 같이 하고 싶던 친구입니다.

" 야.. 근데 너 오자마자 난 일어서야 되겠네.   막차 탈 시간이야. "

나는 엉거주춤 일어나면서 친구를 바라봅니다.
그런데 친구의 한마디에 나는 다시 주저앉고 맙니다.

" 야.. 막차가 있으면 첫차도 있잖아! "

나는 머리가 띵 합니다.   이미 술로 젖어버린 내 머리속은 혼란 속에 빠집니다.
친구의 그 한마디는 내 인생에 한줄기 번쩍이는 빛처럼 느껴지고 심오한 철학이 숨어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나는 깜박 속습니다.

그렇게 망가져서 결국은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첫차까지 놓치고 맙니다.
양평까지 걸어 가겠다는 나를 말린 친구 집에서 골아 떨어지고 말았지요.

친구 집에 들어가 또 술을 내놓으라고 그랬지요?
돌아오는 길은 씁쓸하기 짝이 없습니다.   머리는 흔들리지..  속은 쓰리지.

막차를 탈 때가 되었으면 그냥 막차를 탈것이지 왜 첫차 소리에 그리 예민하게 반응을 했을까요?
그날 밤도 봄바람은 살랑거렸습니다.


내가 네팔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니
이 산골짜기는 막 봄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밭갈이가 늦었는지라 부지런히 땅을 뒤집고 감자부터 심느라 서두르지만
몸이 잘 따라주지 않습니다.

히말라야 산 속에서도 걸리지 않았던 감기가 걸리고
트레킹 마지막 날 산을 내려오면서 다친 무릎이 영 불편합니다.

너무 힘이 듭니다.   작년하고는 또 다르군요.

그런데 봄은 사정을 봐주지 않습니다.

꽃은 줄줄이 피어나고 나무의 새 잎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납니다.
밭을 만들고 씨를 뿌리고 모종을 심기도 바쁜데 내가 심지 않은 것들은 더 잘 자랍니다.

나는 두 손을 들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제 봄은 내가 감당을 못하겠어.

봄을 바라보는것 자체가 충격입니다.

내가 히말라야의 만년설산 앞에서 숨을 헉헉 거리면서 그 대단한 산들을 바라 보았을때
그 산들은 나의 접근을 거부하고 오연한 자세로 나를 굽어만 보았었지.

그때 나의 무력감에 충격을 받았는데
내 집에 돌아와 맞이하는 봄마저 나를 충격 속에 빠뜨리네.

봄은 저 혼자 신이나서 이 꽃 저 꽃을 마구 피워내지만
저 생명의 힘이 펼치는 잔치에 나를 끼워 달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 그럼 나는 뭐야. '

나는 혼란에 빠집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봄.  그 속에 푹 빠져 봄을 즐기고 싶었는데...

왜 봄을 낯설게 바라 보아야만 하는가?
봄은 봄,  나는 나란 말인가?

봄은 靑春이고 나는 봄이 아니지.

인생이 기차라면 나는 막차를 기다리거나 아니면 막차를 타고 있겠지요.
되돌아 오지 않는 막차.   물론 첫차는 없습니다.

막차가 있으면 첫차도 있다는 친구의 말은 거짓말 입니다.

그렇게 나는 봄을 앓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봄을 떠나 보냅니다.  봄은 꽃을 다 떨어뜨리고 나를 흔들어 놓고 떠나갑니다.

그래도 그립습니다.   떠나가는 봄이...

봄은 다시 찾아 오겠지요.
내가 봄을 다시 바라볼 수 있다면 그때도 나는 가슴을 앓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