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랑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 보아도 그 시절의 흔적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키 작은 소나무 숲에 감추어져 있던 아이들의 생가인 관사는 물론 중대 본부 건물마저 통째로 다 없어지고
그 자리엔 한창 건축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비포장 신작로였던 진입로도 깨끗이 포장이 되어 있고
바다쪽으로는 제법 번듯한 민간 해양 연구소가 세워져 있었다.
주변을 온전히 감싸 안았던 야트막한 야산의 해송 숲은 생뚱맞게 모텔로 변해 있고
발이 쑥쑥 빠지던 관사 옆 백사장에서는 마침 포크레인들이 한창 모래를 퍼 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 곳을 떠난 후 처음 찾았던 <죽변기행>을 쓴 94년 당시만 해도 부대와 관사는 그대로 있었는데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지금은 그야말로 상전벽해가 되어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우리는 온몸에 맥이 쭉 빠져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잠시 내리지도 차를 세우지도 않고 그곳을 외면하다시피 서둘러 빠져 나왔다.
- 이제 더 이상 죽변을 찾아 올 이유가 없어졌어.
가슴 한 구석이 휑하니 무너지는 것같은 서운한 마음에 눈물이 핑 돌았다.
- 지나가 버린 우리의 젊은 날들처럼 추억의 자취도 이렇게 사라져 버리고 마네.
마치 고향이 수몰지역 된 사람들처럼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자꾸 허둥거렸다.
이젠 어디로 가지?
우린 졸지에 목적지를 잃어버린 여행자가 되고 말았다.
하기야 그 시절에 내 뱃속에 있던 아이는 스물일곱 난 청년이 되었고
대위었던 그도 이미 예비역 대령이 되었으니
강산이 변해도 세번쯤 변할 시간이 흐르기는 했다.
그 세월 내내 마음 속에 묻어만 두고 찾아오지 않다가 이렇게 불쑥 나타나서는
죽변이 너무 변했다고 투덜거리는 것은 억지를 부리는 것인 줄 알면서도 못내 서운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꼭두새벽에 일어나 빗길을 달려서 오지 말것을 ....
우리의 결혼 27주년 기념 죽변기행 후편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계속)
Ernesto Cortazar - Message in a bottle ( 병속에 담긴 편지 )
지금은 눈이 피로해서 전혀 책을 못보고 살지만 40대 후반까지는 나름대로 무척 책을 좋아했었는데
노일전쟁을 다른 일본 소설이 있어.
"언덕위의 구름"으로 번역된 건데,
노일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일본의 장교들이 러시아 유학을 많이 갔기때문에
많은 양국의 젊은 지휘관들이 서로 친구가 됬지.
이 소설은 주로 해군의 활약상을 다룬 건데(실제로 해군이 주도권을 쥔 전쟁이었대)
러시아해군은 발틱해를 지나 그 먼 항로로 돌아오고
일본의 해군은 이쪽에서 북쪽을 경계하며 지키다가 마지막에 만나게되는데
각 함대에 타고있는 젊은 잘교들이 이제는 적군이 된 옛친구에게 아픈 마음을 담은 편지를 병에 넣어 바다에 띄웠대.
지금의 정서로는 그런 웃기는 짓을 할 사람도 없겠지만 참 아름답고도 애절하지.
오래 전에 앍었고 또 이제는 역사도 다 잊어버려서 내용은 가마득한데도
유독 그 장면만은 선명하게 남았어.
우리도 나이를 먹어 몸이야 늙겠지만 이런 마음만은 없어지지않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身老 心不老 라고 했으니
우리의 겉사람은 나이가 들면 늙고 후패해져도
속마음은 결코 늙지 못할거예요.
우리 속에 있는 열정을 상실하지만 않는다면 말예요.
(위 본문에서 이어 씁니다.)
아무리 둘러 보아도 그 시절을 기억하게 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내 마음은 자꾸만 뒤를 돌아다 보며 길 위에 떨어진 추억 부스러기라도 찾아 보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인지 완전히 새로 단장을 하였고 주변의 지형도 몰라보게 달라진 새 길이
차츰 내가 만삭의 몸으로 힘들게 지나다녔던 옛 길로 보이기 시작했다.
젊은이는 꿈을 먹고 살고 늙은이는 추억을 먹고 산다고 했는데
어느덧 꿈보다는 추억에 더 목말라 하고 있는 내 모습에 씁쓸해 하면서도
내 마음은 끝도 없이 자꾸만 후진 기어를 넣고 달려갔다. (계속)
그 때 나는 올해 스물 일곱 살이 된 큰 아이를 뱃속에 품은 임신 7개월의 임산부였다.
남편은 영양에서 내륙부대 중대장을 하고 있었는데
연대 본부로 회의를 하러 오라는 연대장의 명령을 받고 울진에 갔다가
그대로 해안 중대장으로 보직을 바꾸고 눌러 앉게 되었다.
총기 난사 사고 때문이었다.
해안 초소에서 근무하던 하사와 병장 간에 갈등이 심했는데
마침 회식이 있어서 술을 한잔 마신 병장이 술김에 총을 들고 내무반에 들어가
자고 있는 소초원들을 향해서 무차별 난사를 하는 바람에
일곱 명이 자다가 그대로 다 죽는 사고가 발생을 했다.
총을 쏜 본인도 그 자리에서 자살을 해서 정확한 정황조차 파악하기 힘든 사고로
중대장과 대대장이 보직해임이 되었는데 그 후임 중대장으로 남편이 가게 된 것이었다.
남편은 갈아 입을 옷 한벌도 챙기지 못한 채 죽변 예비 중대로 부임을 했다.
내게는 온다간다 말을 할 새도 없었다.
나 혼자서 이사를 해야 했다.
남편의 병사들 도움으로 뚜껑도 없는 군용 트럭에다 이삿짐을 빼곡히 포개어 싣고는
높다란 조수석에 간신히 올라 타고 한나절이나 덜컹거리면서 달려가야 했다.
나는 죽변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채로 그저 이삿짐처럼 실려서
경북 영양의 꾸불거리는 산길을 지나 영덕에서 울진으로 이어지는 좁은 해안도로를 달려갔다.
뱃속의 아이가 뭉쳐서 배가 뻐근해도 아무런 내색도 못 하고
막연한 두려움과 불안함을 이겨내느라 입술을 꽉 깨물고 창밖만 바라보며 달려서
죽변 예비대에 도착을 한 것은 해가 반쯤이나 빠진 저녁이었다.
감옥.
정문 위병소 앞에서 내가 느낀 부대의 첫 인상이었다.
감옥처럼 높은 담장을 두른 부대의 연병장을 가로질러 뒤 쪽으로 가면
문도 없이 그저 드나들 수만 있도록 해 놓은 뒷문이 있고,
그 문 안에 마당을 다져 놓지도 않아서 발이 푹푹 빠지는 백사장 한 가운데
외부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작은 집이 한 채 있었다.
감옥 속에 숨겨 놓은 깊은 감옥.
거기가 중대장 관사였다. (계속)
오직 그들만이 내 이웃이자 친구였다.
언제나 입버릇처럼 아무도 없는 곳으로 떠나고 싶다고 했던 것이 후회스러울만큼
나는 철처히 사람으로부터 격리되어 버렸다.
그 높은 담장 안에 사람이라고는 달랑 나 하나였다.
푸른 제복을 입은 그들은 <군발이>일 뿐 결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휴대폰은커녕 일반 전화조차 없고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는
손잡이를 마구 돌리면 <통신 보안>을 외치며 중대 교환병이 나오는 군용 전화 뿐이었는데
그것도 내게는 무용지물이었다.
나는 그 전화로 통화할 사람이 거의 없었다.
워낙 남편은 여자가 부대로 전화를 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계속)
원래는 예비대에 3개월쯤 머물며 부대를 정비하고 해안에 다시 투입이 되는데
우리 부대는 사고의 후유증을 털어낼 때까지 머무르게 되었다.
예비대에 머무는 내내 남편은 오로지 부하들 생각만 하며 살았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동료들의 죽음을 본 병사들이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휘관은 그들을 한편으론 엄히 다스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따뜻하게 달래기도 해야 했다.
병사들의 나이 고작 스물 두어살.
동료들의 피에 절은 모포를 걷어다가 욕조에 담가 빨면서 그들은 울었다.
내놓고 울면 기합을 받을까봐 아무도 모르게 소리 죽여 몰래 울었다.
부대 전체를 휘감고 있는 살기가 너무나도 무서워서 도망치고 싶어했다.
그들은 입을 꽉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그들의 속내를 털어놓지 않았다.
그래서 남편은 부대를 지휘하기가 더욱 힘이 들었다.
매일 병사를 두어명씩 돌아가며 관사로 불러다가
식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면담을 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달라고 했다.
중대원이 모두 몇명이었는지 확실한 숫자는 잊어버렸지만
백명은 훌쩍 넘었던 것으로 기억이 되는데
내게 그들을 모두 개별적으로 불러다 밥을 먹이랬다.
그것도 임신 8개월로 접어들어 배가 남산을 닮아가고 있는 내게....
나는 선선히 그러마고 했다.
그렇게라도 해서 병사들이 안정이 된다면 더 바랄것이 없었다.
부대에서 죽변 시장까지는 족히 오리길이 넘었다.
시내버스도 자주 없고 지나가는 차도 드문 한적한 길이었다.
나는 매일 아침을 먹고 나면 시장에 가야했다.
가는 길엔 짐이 없으니까 배를 내밀고 허위허위 걸어서 가고,
이것 저것 장을 보고 오는 길에는 버스를 타기도 하고
미터기를 꺾지 않고 제맘대로 왕복요금을 받는 택시도 탔다.
중대장 봉급으로 택시비를 내려면 간이 떨리게 비쌌기 때문에 되도록 버스 시간에 맞춰 다니면서
장정들에게 따뜻한 밥을 해서 먹였다.
특별한 요리는 아니었지만 일반미로 지은 민간인 밥이 그리웠던 병사들은 아주 맛있게 먹었다.
그렇게 밥상을 함께 나누면서 남편은 부하들과 신뢰를 쌓아갔고
중대원들이 모두 우리집에서 밥을 먹고 갈 즈음에는
부대에 감돌던 냉랭하고 어수선한 기운도 많이 사그라들었다.
나도 그러면서 차츰 민간인 태를 벗고 군기가 팍 들어간 <군대 각시>가 되어갔다.
그 쪽 사람들은 군인의 아내를 군대 각시라고 불렀다.(계속)
춘선아!
이 글 이제서야 봤다.
왜 자꾸 눈물이 나려는지!(눈물은 춘선이 전문인디)
선생도 그렇더라.
학생들하고 진솔한 대화를 나누려고 자꾸만 자꾸만 집으로 불러오는데........
여긴 군대도 아니니까 오면 술판이 벌어지고~~~
난 그게 너무 싫었어.
밥만 먹는 거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지만
(우리 친정집은 아주 많은 사람들이 드나 들어서 우린 사람 오는 게 전혀 낯설지 않았거든)
남편 말로는 술을 들어 가야 진솔하게 말들을 한다나 뭐라나.
그 효과(이게 적당한 표현일지?)가 지금 나타나고 있구나.
정년을 맞이한 남편은 요즘도 섭하기는커녕 즐겁기만 하고
현직에 있을 땐 틈만 나면 집에 붙어 있더니만 요즘은 나하고 시장 가 줄 시간도 없어.
물로 그게 돈으로 연결되는 건 아니지만 난 참 좋다.
게다가 이게 다 내가 밥을 잘 해 먹인 덕분이랜다.
속으로 좀 찔려.
난 춘선이 너하고는 다르게 남편에게 징징 짜쟀거든. ㅎㅎㅎ
빨리 새글을 나타내는 기구가 있어야지 이런 보물도 못 찾다니 말이야.
작가님! 계속 써주세요.

춘선아 ~
4월 끄트머리에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툭하면 머리위로 콩알만한 우박이 쏟아지고
이런 날씨는 난생 처음이라고
동네사람 모두가 봄을 기다렸지.
이 삼일 전부터 훈훈한 바람이 불더니
움추렸던 꽃망울이 한번에 터졌지 뭐야.
이곳 생활이 아직 사계절 한바퀴를 채 못돌았기에
앞 마당 한 구석에 홀로 서 있는 나무에 이렇게
예쁜꽃이 필줄은 몰랐어.

뒷마당 울타리쪽으로 가보니
Pat 할머니댁의 노랑꽃이 넘어와 있더군.
매화 맞아?
어찌하다 보니 쉬는날 없이 하루 열시간 이상
보초를 서게 되었네.
늘 바쁜중에도 잠시 잠시 지루할때가 있더군.
읽은책 또 읽고
묵은신문 이리 들쳐보고 저리 들쳐보고 하다가
울 아들이 고물 노트북을 가져다 주는 바람에
지루할틈이 어딨어...늘 내곁에 봄님들이 있으니
신바람이 나더군.
게다가 컴 기술자가 곁에 상주하고 있으니
걱정할일이 하나도 없고.
근데
인터넷선이 말썽이더군.
윗층과 아랫층
게다가 보안카메라 선까지
한꺼번에 뒤엉켜 버리는 사고가 하루에도 몇번 일어나니
답답하고...
하지만 우리 영심씨가 곧 해결해 주리라 믿고...
요즈음
여기 저기 묻혀있는 춘서니의 글을
찾아 읽노라면 얼마나 고마운 마음이 드는지 모르겠어.
윗글을 읽으며
같이 배불뚝이 새댁이 되어 함께 뒤뚱거리고...
그래
우리에게도 그런 젊은시절이 있었던거야.
힘든것도 모르고
멋 모르고 살았던 시절 말이야.
이야기 하듯 써 내려가는
춘서니의 군대각시 이야기
명옥언니 처럼
나도 눈물이 핑돌곤 하지.
그동안 춘서니에게 댓글다운 댓글 한번 못달아준것이
마음에 걸려
오늘 마음먹고
활짝핀 꽃 디카에 담으며 춘서니 생각 많이했네.
연분홍도 노랑도 연두도 다 매혹적인데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아릿한 그리움 때문인지 눈물이 핑....
수니 온니.
아침에 출근하는데 문득 언니 생각이 났어요.
조강지처.
언니와 함께 떠오른 단어예요.
한 남자의 조강지처가 되어 평생을 사는 것도 더할 수 없는 행복.
젊어서 고생을 같이 한 그 사람과 함께 오손도손 의지하며 늙어갈 수 있음은 더없는 축복.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직 감사, 또 감사.
역경도 감사, 환난도 감사, 슬픔도 감사.....
수니 언니.
언제나 따뜻한 모습으로
변함없이 그자리에 계셔서 고마워요.
꽃 선물 정말 고마워요.
글쎄 대망의 새글 표시 별이 오늘부터 반짝이게 됬어.
이곳에 별이 반짝이면 우리 춘선작가가 좋아할 것 같아서 그냥 아무 말이나 하려고 들어 왔는데
그 바쁜 순희가 이곳에도 아름다운 사진을 올렸구나.
노트북을 가져다 준 아들과 언제나 상주하는 맥가이버 영심씨에게 정말 감사하고 깊다.
우리가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키는 덕분에 유지되는 게 참 많지?
나이를 먹어 가면서 새삼 느끼는게 잘 산다는 게 뭔지?
제 자리도 지켜야 하고 그래도 제자리 걸음만 하면 안되고
끊임없이 자기 계발을 해야 하고~~~~~~~~~~~~~~~~~
단순한 듯 하면서 어렵고 어려운 듯 하면서 간단하고 ~~~~~~~~~~ㅎㅎㅎㅎ
작가님 다음 호 빨리 써 주세요.
결혼 27주년 기념 여행.

춘선이의 죽변기행 전편은 이미 보았고,
후편을 지금 보면서 괜스레 내가 섭섭한 마음이 드는군.
찾아가면 늘 거기에 있을 것 같았던 모든 것들이 다시는 찾을 수 없는 추억속의 것이 되어 버린 느낌.
언젠가 나도 내 생가를 찾아 가 봤더니 모두 없어져 버려 시원섭섭한 적이 있었는데.
그래도 후편이 To be continued... 라 조금 더 기대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