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랑
<와호장룡의 한 장면처럼 산이 눕다. - 순천 송광사 >
지난 여름이었다.
서울에서 차를 몰고 온 친구들을 우리집 주차장에서 만났다.
이제부터는 내가 운전수가 되어 마음이 끌리는대로 가기로 하고 길을 떠났다.
일기예보에서는 오후부터 전남 지방에 집중호우가 내릴 것이라고 계속 경고를 하고 있었지만
우리는 조금도 망서리지 않고 순천으로 길을 잡았다.
남도 한정식을 제대로 하는 집을 목적지로 놓고 고속도로를 달려갔다.
담양에서 순천으로 가는 고속도로는 산에서 산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겹겹이 쌓여 있는 산 중턱으로 낮은 구름이 잔뜩 걸려 있는 것이 마치 산수화를 보는 것 같았다.
평일이어서 길에 차도 별로 없고 낮은 구름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니 달리기엔 딱 안성마춤이었다.
우리의 일상탈출은 별다른 계획도 기대도 없이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생각보다 아주 빨리 순천에 도착을 해서 별로 늦지 않은 점심을 먹게 되었다.
허름해서 오히려 정겨운 식당에 예약도 안하고 들이닥쳤지만 다행히 방이 있었다.
갖가지 곰삭은 젓갈과 나물과 밑반찬들이 수십가지 놓인 밥상을 앞에 놓자 환호성이 절로 나왔다.
맛있는 음식을 찾아가는 여행보다 더 신나는 것이 있을까 싶었다.
밥을 먹으면서 우리는 이번 여행의 테마를 잡았다.
- 그래, 남도 맛기행으로 가는거야.
관광지에 가서 기념사진 찍는 것도 별로 재미 없어진지 오래고
그렇다고 꽃이 흐드러지게 필 계절도 아닌 오뉴월 염천에 떠났으니
그저 여유롭게 남도 음식이나 실컷 먹어보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될 것 같았다.
워낙 입에 착착 감기게 맛있기로 유명한 남도 음식이 아닌가 !
- 송광사를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해요?
밥을 다 먹고 난 후에 음식점 아줌마에게 길을 물었다.
아줌마는 이왕 관광을 온 길이니 고속도로를 타지 말고 호수를 끼고 가는 국도로 가라고 권했다.
가는 길에 있는 <선암사>에 들러 긴 산책로를 따라 산책을 하며 머리를 식히는 것도 좋다고 추천도 했다.
송광사가 남성적인 절이라면 선암사는 여성적이라는 설명도 잊지 않았다.
우리는 그녀가 일러준 대로 길을 잡았다. (계속)
<
비는 그야말로 작심을 한듯 정신없이 쏟아졌다.
우리는 두어집을 돌아다닌 끝에 마음에 드는 크고 깨끗한 방을 구했다.
- 원....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건 또 첨 보네요.
우선 방에 들어가서 옷이나 갈아입고 저녁 드시러 건너 오세요.
주인 여자가 열쇠만 건네 주고는 빗속을 가로질러 길 건너에 있는 식당으로 가버렸다.
여관 건너편에 식당까지 겸해서 하고 있는 집이라 밥은 자동으로 그 집에 가서 먹으면 되고,
성수기를 비킨 평일에다 비까지 억수로 내리는 날이라 방값도 아주 싸게 해주었다.
게다가 방 문 앞에 일본식 집처럼 쪽마루와 유리문이 하나 더 달려 있어서
오래 전에 떠났던 고향집에 돌아온 것같이 편안했다.
- 나는 지금 송광사에 올라 갈거야.
느그들은 방에 있고 싶으면 그냥 있어. 난 갈테니......
미친듯이 퍼붓는 빗속으로 그녀가 달려 나갔다.
여관 주인 여자가 내일 날이 개면 올라 가라고 권해서 잠시 망서리는 사이에
그녀는 행여 발목을 잡힐까봐 그랬는지 쓰나마나한 우산을 들고 휭하니 가버렸다.
그 바람에 우리는 선택의 여지조차 없이 그녀 뒤를 따라 나서게 되었다.
정말로 지독한 비였다.
우산을 쓰고 있어도 바지는 물론 얼굴까지 다 젖었다.
신발은 이미 물창이 되어버린지 오래였다.
걸을 때마다 철커덕 철커덕 신발에 고인 물에서 소리가 나고 바지가 다리에 자꾸 감겼다.
그나마 날이 춥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하기야 말복더위 한창인 오뉴월 염천이었으니 오히려 덥지 않아 좋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이겠다.
그녀는 어느새 저만치 앞서 가고 있었다.
뒤에다 제 등짝의 두배는 됨직한 검정 배낭을 메고 무엇에 홀린듯 뒤도 보지 않고 저 혼자 서둘렀다.
우리는 바지를 둥둥 걷어 무릎까지 올리고는 부지런히 그녀 뒤를 따라 갔다.
계곡의 물이 불어서 넘치려 하는 것도 못본척 하고
그저 그녀의 꽁무니만 놓치지 않으려고 정신없이 걸었다.
아무도 오르지 않는 산길을 우리 셋은 우산 세개를 펴고도 다 젖으며 올라갔다. (계속)
워낙 거센 빗줄기 때문에 그런지 사람들은 모두 법고와 목어가 놓인 누각 아래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누각 밑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빗줄기에 떠밀리는 꽃잎처럼 마당을 가로질러 대웅전 앞 계단 위로 올라갔다.
대웅전에는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고 진한 밤색 방석 수십개가 바둑판처럼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황금빛 불상 때문인지 환한 조명 때문인지 모르지만 대웅전 안은 온통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내게는 너무도 생소한 광경이었다.
이문 저문 기웃거리며 안을 들여다 보는 우리가 먼발치에서도 이방인으로 보였는지
어떤 사내가 황급히 마당을 가로질러 달려와서 곧 예불이 시작될 것이니
단지 예불을 구경만 하려면 누각 아래로 내려가라고 했다.
그 말에 나는 순순히 계단을 내려오려다 보니 친구는 어쩔 요량인지 건물 귀퉁이에 붙은 옆문으로 냉큼 들어가
대웅전 구석에 쪼그리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계속)
크리스챤인 내가 대웅전에 들어가 예불을 드리자니 내키지 않아서
마음을 쉽게 정하지 못하고 섰는데 갑자기 미친 바람이 온 산을 휩쓸며 불어 닥쳤다.
그 바람에 빗물이 온 얼굴에 확 뿌려졌다.
샤워꼭지 물을 맞은 것처럼 잠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내 곁에 섰던 다른 친구도 눈에 물이 들어갔는지 벽에 몸을 대고 머리를 수그렸다.
우리는 마치 조난을 당한 사람들처럼 서로의 어깨를 부둥켜 안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대웅전 앞에 떡 버티고 있던 산이 눕기 시작했다.
꼿꼿하게 서 있던 나무들이 하나같이 90도 각도로 휘어지며 돌아눕는 것이었다.
솨아 ~ 솨아 ~산이 눕는 소리가 났다.
마치 효과음처럼.
- 와호장룡에서 나오던 그 장면 같다 !
다른 친구와 나는 순간적으로 벌어진 그 광경을 보고 합창을 하듯 탄성을 내질렀다.
때마침 누각 위에서 장삼을 잘 차려 입은 승려들이 법고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누웠던 산이 다시 일어섰다.
드러누웠던 산이 다시 일어서는 모습은 더 장관이었다.
한껏 머금었던 물을 푸우 ~ 하고 뱉어내는 양 이번에는 안개같은 물보라가 확 ~ 일었다.
다시 승려들이 법고를 치고 목어를 두들겼다.
그 소리는 더 이상 현실의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이미 영화의 한 장면 속에 녹아들어 버려서
나도 내가 아니고 다른 친구도 그녀가 아니었다.
우리는 무엇에 홀린듯이 친구가 쪼그리고 앉아 있는 대웅전 귀퉁이로 스며들어가 그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냥 서 있어도 물이 줄줄 흐르는 홀딱 젖은 차림새 그대로 대웅전 바닥을 흥건히 적시면서....
한 떼의 승려들이 황금색 법의에 밤색 장삼을 걸치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예불이 시작되려는 모양이었다. (계속)
종 소리가 울리고 승려들의 청아한 합창이 울려 퍼지면서 예불이 시작되었다.
원래 송광사는 학승이 많기로 유명해서 승보사찰로 불리는 절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예불 드리는 것을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들이 부르는 것이 어떤 내용의 무슨 노래인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지만
그리 귀에 거슬리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들의 노래소리는 끊어질듯 이어지고 이어질듯 끊어지며 계속되었다.
이 모든 것이 내게는 낯설고 어색했다.
하지만 친구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여태 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그 등에서 내려놓는 것처럼 편안해 보였다.
돌아다 보니 다른 친구도 제대로 좌정을 하고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얼굴이 마치 해탈을 간구하는 구도자처럼 절실하고도 경건했다.
그런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려니 울컥 목이 메었다.
도대체 무엇이 그리도 갈급하였기에 저들은 저리도 간절하게 마음을 내어 놓는 것인가 !
소망을 이루고픈 것인가,
위로를 받고 싶은 것인가,
자신을 비우고 싶은 것인가....
문득. 우리가 더 이상 젊지 않다는 것과
이미 살아오며 겪은 것이 많아 내려놓아야 할 것도 많아진 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우리 욕망이 원하는 것을 채우기에 급급하기 보다는 우리 삶에 여백을 두기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비우는 노력을 더 많이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空수手래來 공空수手거去.
올 때 빈 손이었듯이 갈 때도 다 비우고 가는 것이 마땅한 일임을 받아들여야 노추(老醜)를 면할 수 있을게다.
이런 깨달음을 얻으려고 우리는 그 빗길을 무릅쓰고 마치 운명에 이끌리듯이 이 자리에까지 온 것일까?
엎드린 친구의 등이 가만히 흔들렸다.
깊은 한숨을 쉬는 것인지, 소리 죽여 흐느끼는 것인지... (계속)
예불이 무르익기 전에 우리는 그 곳을 빠져 나왔다.
어색해 하는 나를 배려하느라 그랬는지 친구가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마당 건너 누각 밑에 모여 예불 구경을 하고 있던 사람들도 하나 둘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오면서 돌아다 보니 환하게 불을 밝힌 대웅전이 마치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 난 정말로 이 절 스님들의 독경소리를 들어보고 싶었어.
오늘 들어 보니까 합천 해인사 스님들보다 여기 스님들이 진짜로 노래를 잘하는거 있지.
친구가 어색한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나도 아무 말 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여주었다.
내려오는 길에 우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의 인기척만을 느끼며 부지런히 걸었다.
계곡의 물이 부서져 내리는 소리에 묻혀서 우산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는 들을 수조차 없었다.
그 시끄러움 속에 흐르는 적막감을 무엇이라 표현할 수 있을까.
그리고 적막감 속에 꽉 채워져 있던 충만함은 또 무엇에다 비유할 수 있을까.
우리의 하산 길은 이미 짙은 어둠에 덮여 버렸고, 집중호우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끝)
그 날 송광사의 기억이 너무나 선명하고 느낌이 특별해서
그로부터 한달 쯤 후에 다시 가 봤어요. 다른 사람과 함께.....
저 위에 있는 사진이 두번째 가서 찍어 온 대웅전 앞 산의 풍경이예요.
그런데 전혀 그 때의 그 느낌이 아닌 평범하고 적막한 절이었어요.
많이 실망했지요.
그 날은 집중호우와 동행과 예불시간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서 이렇게 특별한 추억을 만들 수 있었어요.
함께 동행해 준 친구들 ~
짧은 여정이었는데 그대들 덕분에 아주 긴 여운을 남긴 여행이 되었어.
그 다음 날 여정은 다른 제목을 뽑아서 구상해 볼 예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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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읽어주신 그대에게 술 한 잔 드리리다. 건배 ~
마치 제가 그 빗 속에 서 있는 느낌으로 글을 읽었어요.
창 밖으로 보이는 로키산이 짙은 군청색으로 덮히고 가로등에 벌써 불이 들어오는군요.
오늘 하루의 고단함이 날개를 접듯 우리네 삶 속에서 정말 가치있는 것을 발견함이란 얼마나 어려운지요.
선배님
좋은 글 많이 쓰세요.
잘 지내죠?
이렇게 글 사랑에다 방을 열고 초고를 작성할 수 있으니
저는 정말 복을 많이 받았어요.
마음먹고 원고를 쓰려고 하면 글머리가 안잡혀서 애를 먹는데
이렇게 음악을 깔고 댓글난에다 조금씩 써서 모으는 것은 아주 쉽게 되네요.
금재씨도 글 많이 쓰세요.
그리고 우리 서로 이 공간을 통해 서로의 작품을 합평해 보는 것도 좋을거 같아요.
좋은 작품을 얻으려면 끊임없이 담금질을 하는게 필요하니까요.
금재씨가 바라보고 있는 로키산을
저는 그냥 마음으로 그려보는데도 좋군요.
날마다 더욱 행복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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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많이 안 좋아요?
아주 쬐끔 많이 걱정이 되네요.
몸조심, 마음조심, 황사조심, 봄바람조심..... 오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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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ㅎ 춘선아!
선생님이 되도록 말하지 말라는구나.
허긴 말하기도 힘들어 쉰소리가 나서.
떡 본 김에 쉬어간다고 이참에
"말로서 말많으니 말말을까 하노라"
이런 거나 실행해보련다.
평소에 내가 좀 실행하기 힘든 화두거든!
명옥아~!
봄이라 그럴꺼야.
조심해라.
금재~!
반가워.
글 잘읽었어.
조근조근 일상을 그려 내는것을 보니
금재의 삶이 보이는것 같애.
건강하구 다음글 기대할께.
춘서나~!
니 글읽으며 한수 위구나 하는걸 느꼈다.
잔잔한듯하면서,박력있고,
당시의 상황을 묘사하는데 뭐 그렇게 아는거이 많니?ㅎ
역쉬 작가는 다르더군...
계속 정진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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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를 오래 만나지 않아도 친구가 쓴 이런 글을 읽으면 마치 한 방에서 벽에 등을 기대고 발바닥을 맞대고 이야기 하는 것처럼 마음이 따스하고 편안하구나.
더구나 함께 했던 일들이 화제가 되면 더욱 재미있지?
같이 보았던 곳이나 상황에 대한 느낌이 저마다 다르면 더 재미있고.
참 잘 읽었다. 아주 좋은 여행기구나.
뭔가 잘 만들어 낸 여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더 좋구나.
3월 지나면 좀 여유가 생겨 이런 좋은 글에 충분한 댓글을 달 수 있었으면 좋겠네.
순호 언니 ~
언니의 과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언제나 제게 격려를 아끼지 않으시는 언니 덕분에
저는 늘 용기를 얻고 힘을 받습니다.
그 칭찬에 부끄럽지 않도록
더욱 좋은 글을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명옥 언니 ~
부활절이라 바쁘신가요?
교회에서 음악예배 반주를 하시느라....
항상 건강하소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건강임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으니
저는 늘 언니의 건강을 위해 기도하렵니다.
옥규 ~
바쁘지만 날마다 새 힘이 솟아나기를 기도하마.
영혼과 육신이 모두 강건하기를 기도하마.
신영 ~
사진을 올리려니 용량이 안 되네.
더 이상 댓글에다 파일을 첨부할 수가 없어.
다음 이야기를 쓸 때 새로 방을 만들고 올려야겠어.
자네가 바톤을 받아서 써도 좋고....
우리 광야 온이 말끔하게 방 정리를 해 놓으셨네.
보이지 않는 손길로 구석구석을 매만지는 우리 광야온...
알라뷰 ~ 리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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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하는 님들 ~
여기에 쓴 글을 다듬어서 <계간 수필> 여름호에 발표를 하려고 보냈어요.
제목도 새로 뽑았고요.
< 그때 산이 눕는 바람에 > 라고 했지요.
여기에서 제가 크게 힘들이지 않고 초고를 쓸 수 있도록
언제나 좋은 독자가 되어 주시고
추임새도 넣어 힘을 주시고
지쳐 있을 때는 위로도 아끼시지 않으시는
친구들과 언니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3년전쯤 10기동창 4명이서 후배님들처럼 숙소정해놓고 송광사로 무조건 올라가
스님들의 권유로 대웅전의 저녁예불에 참여한 적이 있어요.
이 글을 읽노라니 그때의 종소리,북소리,목어소리, 수십명의 스님들의 예불소리가 들리는듯..
지금까지 강한 기억으로 남는 송광사...
조계산의 선암사와 송광사의 숲길을 걸어보려는 꿈은 아직도 있답니다.
산책로를 반쯤 올라가는데 마구 퍼붓기 시작했다.
일기예보대로 집중호우였다.
우산을 써도 아무 소용이 없게 온 사방에서 빗물이 쳐들어왔다.
어느틈에 그리 불어났는지 계곡의 물이 콸콸 소리를 내기 시작을 했고
고즈넉한 산사의 정적은 간 곳이 없이 대웅전으로 오르는 계단에도 폭포처럼 흐르는 물소리가 가득했다.
선암사는 덧칠을 하지 않은 고아한 기품을 간직하고 있었다.
오래된 나무 색이 비를 맞아 그런지 더욱 고색창연하게 보였다.
단청의 색감도 오래 묵은 그리움처럼 낡고 바랬지만 처연한 당당함을 담고 있었다.
깔끔하게 비질을 한 것처럼 잡풀이 하나도 없는 마당에 드문드문 자리를 잡고 서 있는 목백일홍들은
마치 각자 자기의 영역을 고수하는 비구니들처럼 단정했다.
선암사는 자존심이 강하고 절개가 곧은 여인네처럼 단아한 모습이었다.
- 여기 산길을 넘어 가면 바로 송광사로 갈 수도 있대.
절 입구에 놓인 푯말을 가리키며 친구가 말했다.
- 이 빗속에 산길을 오르자고?
- 아니.... 그저 그렇다는 거지. 뭐....
등산로는 제법 넓어서 자동차도 한 대쯤은 너끈히 갈 수 있어 보였다.
내 차가 4 X4 만 되었어도 한번 도전해 보겠지만 야트막한 승용차로는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앞이 보이지 않을만치 집중호우가 내리고 있지 않는가 !
우리는 산길을 뒤에 두고 다시 국도로 나와 송광사 이정표를 보고 달리기 시작했다.
비가 오는 와중에도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는지 어둑한 기운이 몰려들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