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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교회 이름이 <영양교회>였음도 그 곳에 도착을 하고서야 알았다.
따져 보니 우리는 꼭 27년 만에 그곳을 다시 찾아간 것이었다.
교회는 그 때나 지금이나 거의 변함이 없어 보였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교회 앞에 있던 시장이 복개공사를 했는지 깨끗하게 정비가 되어 있고
제법 규모가 큰 음식점도 몇 개가 새로 생겼고
말끔하게 단장을 한 군청 건물이 늙은이가 입은 새 옷처럼 생뚱맞아 보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봐도 우리가 살았던 동네가 어디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오직 기억이 나는 것이라고는 시장 근처에 있던 교회의 붉은 건물과 동네 목욕탕, 중국집뿐이었다.
주일이면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오는 길에 중국집에 들러 짜장면을 먹고 왔다는 생각밖에 나질 않으니
어디에다 대고 무엇을 물어볼 수도 없었다.

우리의 27년된 추억줍기는 불과 30분도 되지 않아서 다 끝났다.
토요일인데도 문이 꽉 잠겨 있는 교회 앞에서 그저 서성거리며 사진 몇 장 찍고 나니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다.
목욕탕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고, 중국집도 거기에 있었지만 들어가 볼 마음이 나질 않았다.
하기야 불과 서너달 밖에 살지 않았던 동네인데 무슨 살뜰한 정이 그리 많이 남아 있을까.
그 때 만났던 사람들도 모두들 이곳을 떠나고 없을것이 자명한데 누구를 찾을까.
게다가 부대조차 철수를 하고 지금은 예비군 대대가 되어 있었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거의 세번쯤 변할 시간이 지났으니 당연한 일이라 여기면서도
어쩐지 마음 한구석으로 싸아하니 바람이 들어 오는것 같았다.

우리는 차를 돌려 오던 길을 되돌아 나왔다.
아직 해가 중천에 걸려 있고 정오도 채 지나지 않은 벌건 대낮이었다.


남편이 영양에 한번 가보자고 했을 때 나는 그저 농담인 줄 알았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고 딱히 찾아갈 만한 추억의 장소도 없는 그곳을 찾아갈 이유는 단 하나였다.
남편이 처음 중대장으로 근무를 했던 곳이라는......
그것도 4개월쯤 근무하다가 죽변에 있는 해안부대로 가게 되는 바람에 거의 슬쩍 스치듯이 지나간 곳이었다.

- 이젠 속이 시원해요? 그렇게 와 보고 싶다더니...
- 정말로 여기는 기억나는게 별로 없네. 우리 그냥 죽변까지 가 볼까?
- 죽변에 가면 오늘 돌아오기는 어려우니까 오늘은 그냥 가고 다음에 여정을 새로 잡아요.
- 하긴.... 오늘 돌아오려면 너무 피곤하겠지?

남편은 그 길로 영덕을 지나 울진, 죽변까지 달려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곳들은 자기 삶의 전적지와도 같은 해안 중대장을 했던 곳이었으니까.

군대 생활 30년, 육사 시절까지 다 합치면 34년 동안 군복을 입었지만
남편이 야전에서 지휘봉을 잡고 근무를 한 것은 해안에서 중대장을 한 것밖에 없었다.
그 30년 중 약 삼분의 일은 위탁교육을 받으러 미국에 가서 공부하느라 고생을 했고
삼분의 일은 초급 지휘관과 정책부서에서 참모를 하며 보냈고
삼분의 일은 연구소에서 무기를 개발하며 보냈으니
보통의 군인들과는 약간 다른 경력을 쌓으며 살아왔다.
그래서 나는 가끔 그에게 군복도 입지 않는 <무늬만 군인>이라고 놀려댔다. .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이번 1월에 예편을 하고 나자 말할 수 없는 상실감에 그가 휘청거렸다.
말이 예편이지 연구소에서 하는 일도 똑같고, 보직도 똑같고,
정년은 오히려 더 늘어나고,
달라진 일상은 아무것도 없는데
자기를 지탱하고 있던 마음의 중심축이 무너지는양 서운해 했다.

30년 이상 신고 있던 워카를 벗으려니 발이 잘 빠지질 않는다나....

게다가 처음 육사에 입교를 하던 날 느꼈던 두려움과 설렘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는지
술 한잔 하고 들어 온 날이면 자꾸만 되풀이해서 그 이야기를 하고 또 했다.
그러더니 자기가 군복을 입고 아이들과 함께 가족사진을 찍어 거실에 걸어 놓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자기 곁에 있어 주어서 정말 고맙다며 내 손을 잡고 영양에 한번 가보고 싶다고도 했다.
사복을 입고 있어도 그는 결코 무늬만 군인이 될 수 없는 전형적인 군인이었던 모양이다.

 
그가 이러는 것도 다 삶의 한 획을 긋느라 진통을 겪는 것이지 싶다.
그러니 나는 그의 곁에서 장단을 맞춰 주며 그가 다시 민간인으로서의 새로운 자아상을 만들때 까지 기다릴 수밖에....
그래서 그와 함께 오래된 추억을 찾아 영양에도 가고,
정복을 입은 그와 함께 식구들이 활짝 웃고 있는 가족사진도 큼지막하게 새로 찍어 거실에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