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 찍은 풍경 사진 (1) - 눈 오는 甲寺



                                                                                                                김   희  재




  주일 예배를 마치고 사람들과 어울려 점심을 먹고 나오는데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날씨가 푹해서 그런지 눈이 제법 탐스럽게 내리는데도 도로에는 쌓이는 것이 없다.
그래서 옛말에 <눈 오는 날은 거지가 빨래하는 날>이라고 한 모양이다.

눈은 오지만 포근한 날씨 덕에 겁도 없이 내 마음이 갑사로 향한다.
- 눈 내리는 갑사의 풍경을 찍으려면 오늘이 딱 제격인데....

내게 꿈을 찍는 사진사가 되어 눈 내린 계룡산의 모습을 그려달라던 분의 부탁이 떠올라
무작정 계룡산 쪽으로 가고 싶다고 했더니 그도 선선히 핸들을 꺾었다.

눈이 오는 날, 길 미끄럽다고 서둘러 집으로 가지 않고 일부러 길을 나서 본 것도 드문 일이다.




  동학사 입구를 지나면서부터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던 눈이
갑사 일주문 앞에 당도하니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처럼 화려했던 이파리들을 다 떨어내 버린 갑사의 나무들 위에
폭신한 흰 목화솜이 한 꺼풀씩 덧입혀지는 광경은 내 평생 처음 보았다.

특히 지난봄에 왔을 땐 그리도 아름다운 노랑과 연두의 향연을 연출하였던 키 작은 동반자 - 황매화 가지 위에
오늘은 다소곳한 하얀 꽃이 피어나고 있는 것이 너무도 반가웠다.

내가 나무들과 같이 눈을 맞고 서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다.

  아침에 공들여 매만진 내 머리 위로 눈이 소복이 쌓여도 우산을 찾지도 서두르지도 않고,
길옆에 늘어선 나무들 이름표까지 들여다보며 천천히 걸어가노라니
내 마음은 다시 스무 살로 돌아가는 듯 한껏 부풀어 올랐다.  




  눈이 오는데도 산사에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나처럼 아무 장비 없이 산보하러 온 사람보다는 대다수가 단단히 중무장을 하고 온 사람들이다.

나는 허위허위 올라가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산에서 내려오고 있다.
하기야 시간이 오후 세시가 넘었으니 겨울 산을 오를 시간은 아니다.

게다가 눈발이 제법 거세어지니 산을 내려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더욱 부산해 보인다.
우리도 금잔디고개로 향하려던 발길을 돌려
대웅전 옆 계곡에 있는 전통찻집으로 들어갔다.

   꽁지머리를 길게 길러서 묶고 수염까지 부숭하게 자란 주인 총각이 반갑게 맞으며
내가 좋아하는 창가 자리로 안내를 한다.

창을 바라보고 나란히 앉을 수 있는 테이블 위에는
아주 굵은 양초가 눈물을 펑펑 쏟으며 제 몸을 불사르고 있었다.

촛불을 앞에 두고 감초향이 진한 한방차를 한 모금 마시니
따뜻한 기운이 온 몸과 마음에 확 퍼지면서
순식간에 무장해제를 당하듯이 들떴던 기분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 비 윤씨의 중부(둘째 큰아버지) 윤덕영이 지은 별장이었던
자그마한 기와집을 절에서 인수하여 운영하고 있는 이곳은
내가 좋아하는 단골찻집이다.

창가에 앉아서 계곡을 내다보면 계절마다 다른 친구들을 만나 ( 새, 다람쥐, 나비 같은 )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고,
오래 전에 잊어버렸던 옛날 일들도 어제 일처럼 떠올릴 수 있어서 좋다.
마음이 울적하여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날에는
바람 소리 물소리를 들으며 위로 받을 수 있어서 더욱 좋다.




찻집에서 나와 대웅전 반대편 계곡을 건너
오른쪽으로 휘굽어진 길을 따라가면 자그마한 선방이 나오고,
그 앞에는 원숭이도 기어오르다 떨어진다는 커다란 목백일홍 한그루가 우뚝 서 있다.

올 때마다 나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매끈한 나무껍질을 손으로 쓸어보곤 했다.
워낙 나무 결이 단단해서 마디게 자라는 것이라는데
나무가 이만큼 자라려면 얼마나 많은 세월이 필요했을까.

문득, 사람은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고 치켜세우지만
어찌 보면 나무만도 못한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인생들은 그저 한 시절 빠듯이 살고 가면 다시 오지 못 하는데,
나무는 수없는 세월 속에서 죽은 듯이 다 벗었다가도
때가 되면 다시 회생하며 한 시절을 새로 사니 말이다.

  선방에서 갑사의 보물인 철 당간 지주가 있는 곳으로 가려면
능선이 가파른 언덕을 내려가야 한다.
언덕 양옆에 안쪽으로 굽어져 휘어진 대숲은 능선을 따라 도열해 터널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이 길을 지나는 길손들은 자기가 귀인이라도 된 듯 우쭐한 마음으로
가파른 길을 한달음에 내려가곤 하였다.

  눈발은 어느새 물기가 많은 싸라기로 변하여 갔다.
나는 행여 미끄러질세라 그의 손을 꼭 잡고 조심조심 대나무 터널 길을 내려왔다.
그의 언 손에 내 온기가 전해지니 오히려 내 마음에 훈기가 가득하다.
하산 길 내내 그는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처음처럼.





  일주문 밖 주차장 가는 길에서 밤과 은행을 굽고 앉아 있는 할머니들을 만났다.
얼기설기 엮은 쇠 바구니에다 담은채로 밤을 구워
작은 무더기를 지어 놓고는 2000원 이란다.

나무 등걸처럼 딱딱하고 금이 패인 손에 밤 검댕이가 묻어 시꺼멓다.
커다란 나무를 의지하고 나란히 앉아서 품을 파는 할머니들 얼굴에서
어설픈 장사꾼 냄새가 난다.

서로 자기 것을 팔아달라고 호객을 하는 바람에
나는 아예 눈을 내리깔고 가장 가까운 할머니에게 다가가서
새로 구워낸 따끈한 것 한 무더기를 얼른 샀다.
  



돌아오는 길엔 거짓말처럼 눈이 그치고
말갛게 씻긴 해가 산등성이로 넘어가는 것이 보였다.

덕분에 차는 씽씽 잘 달리니 좋고, 내 마음에는 아직도 함박눈이 펑펑 내려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