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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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므이의 초상화
커피숍에는 재환이 먼저 와있었다. 그의 얼굴이 생각보다 어두워 이한은 마음이 불안했다. 가벼운 인사를 주고받은 후 재환은 담배를 피워 물고 묵묵히 연기를 뿜어냈다.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이한은 조바심을 억눌렀다. 그가 입을 열었다. 그의 첫 마디는 뜻밖이었다.
“이쯤에서 그만 두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입니까?”
재환이 담배를 비벼 끄고는 말했다.
“이번 일은 살인사건에 대한 조사이기도 했지만 제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시작한 일이기도 합니다. 정말 세상에 저주라는 게 있을까 알고 싶었거든요.”
이한은 뚫어지게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 재환이 테이블에 놓여있던 누런 봉투를 이한의 앞으로 밀고는 말했다.
“이걸 한번 봐 주시죠.”
이한이 봉투를 집고서 안에 있는 내용물을 꺼내려고 할 때 재환이 다시 말했다.
“므이라는 여자의 초상화입니다. 이한씨 증조부가 그린 바로 그 ‘므이의 집’에 살던 여자의 초상화.”
순간 이한은 놀란 눈으로 재환을 건너다보았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전율이 그의 손끝에서 온몸으로 번져나갔다. 이한은 지금까지 ‘므이의 집’이 정말 존재했으리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므이의 집’은 단지 그림에 붙은 제목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로 ‘므이’가 존재했고 ‘므이의 집’도 존재했다니! 대체 증조부는 어떤 경로로 그 그림을 그리게 되었고 또 김재환 형사는 100여 년이 지난 그림의 주인을 어떻게 찾아낼 수 있었단 말인가.
이한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회에 젖어 봉투 속에 사진을 끄집어냈다. 사진 속 초상화는 보관을 잘못한 탓인지 색이 많이 바랐지만 초상화의 주인을 알아볼 정도는 됐다. 재환이 말했다.
“유화로 그렸다고 하더군요.”
흐릿하게 퇴색된 사진 속 초상화의 여인은 베트남 정통복장인 아오자이를 입고 있었다. 여인의 긴 생머리는 가슴 양편으로 길게 늘어뜨려져 있었고 왼손이 오른손목을 잡은 단아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한은 사진을 본 순간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과 관계없이 놀라서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이 여자를 봤습니다.”
“예? 어디서요?”
“제 방 서재에서. 정확하게 말하면 이 여자의 원혼이겠죠. 물론 흐릿한 형상이긴 했지만 이 사진 속 초상화를 보니 비로소 얼굴이 또렷하게 떠오릅니다. 바로 이 여자가 어제 제 옆에서 절 노려봤어요. 대체 이 므이라는 여자는 어떤 여자입니까? 왜 증조부가 이 여자의 집을 그린 겁니까? 그리고 100년이나 지난 이 초상화의 사진은 어떻게 구한 겁니까?”
이한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두서없이 질문을 쏟아냈다. 재환이 수첩을 보면서 말했다.
“실은 저도 그림에 대한 단서를 그렇게 쉽게 찾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므이’라는 이름은 베트남에서 상당히 유명한 이름이었습니다.”
“유명하다고요?”
“좋은 의미로서가 아니라 저주받아 절대 금기시하는 이름이었습니다. 조사원의 말에 따르면 베트남 사람들은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초상화는 100여 년 전 지금은 베트남 최고의 휴양도시인 달랏의 한 사원에서 봉인한 채 보관해왔다고 합니다. 므이라는 이름은 베트남에서 숫자 ‘열(10)’을 의미하기도 하고 순박한 시골처녀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고 합니다. 지금도 베트남에는 그 ‘므이’의 초상화에 얽힌 전설이 수십 가지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가장 유력한 건 이것입니다. 100여 년 전 므이라는 아름다운 처녀가 베트남을 점령한 올리비에란 프랑스 점령군 책임자를 사랑해 아이까지 가지고 프랑스로 함께 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그녀를 저주해 살해하였고 므이는 저주받은 원혼이 되어 사람들을 살해한다는 전설입니다. 그런데 당시 므이가 살해되기 직전 한 화가가 그녀의 초상화를 그렸다고 합니다. 혹시 이 사진 속 므이의 초상화를 그린 화가가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이한은 그가 묻기도 전에 이미 머리에 떠오른 예감이 있었지만 차마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재환이 말했다.
“이 므이의 초상화는 당시 올리비에를 따라왔던 한 조선인 화원이 그렸다고 합니다. 아마 추측이 틀리지 않다면 이한씨의 증조부일 겁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100년 전 증조부가 베트남에서 그린 초상화의 저주가 증손자인 이한씨에게까지 이어져왔다는 사실이. 초상화는 지금도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사진은 베트남 달랏교육대학에서 베트남 문화를 연구하는 김영채 교수를 통해 어렵게 입수한 것입니다. 교수는 오래전부터 므이의 초상화에 얽힌 저주를 추적해왔다고 하더군요.”
“왜 공개를 하지 않죠?”
“저주 때문이죠. 베트남에는 이런 전설이 있습니다. 질투에 사로잡힌 여인이 므이의 초상화에 대고 상대방 여자를 저주해달라고 빌면 상대여자는 끔찍한 재앙을 당한다고 합니다.”
“재앙이라면?”
재환이 갑자기 긴장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낮췄다.
“왼쪽발목과 오른손목, 그리고 머리가 잘려 사라진다고 합니다.”
이한은 너무 놀라 하마터면 소리라도 지를 뻔했다.
“이해합니다. 저도 그 소리를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앞서 제가 본 그 끔찍한 사건들의 피살자들이 모두 그 저주의 형태 그대로 살해되었고 놀랍게도 피살자와 연적관계에 있던 여자들이 ‘므이의 집’ 그림을 소장하고 있었으니까요. 오직 이한씨의 집안에서만 다른 형태의 살인이 일어난 겁니다. 하지만 질투에 의한 저주라는 점에서는 같죠. 자, 이 정도면 제가 왜 이 실험을 그만두자고 하는지 이해하시겠죠?”
이한이 낮게 신음했다.
“그 그림을 집에 두면 아내는 남편을 의심하고 결국에는...”
“압니다. 그만하십시오.”
이한이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는 이내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저도 신경이 예민해져서. 혹시... 감시 카메라를 좀 볼 수 있을까요? 지금 아내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한번 지켜보고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가시죠.”
재환이 이한을 데려간 곳은 커피숍 바로 근방에 있는 창고처럼 허름한 사무실이었다. 두 사람이 들어가자 재환이 일을 맡긴 머리가 희끗한 퇴직형사가 얼른 일어나 인사를 했다. 이한은 그가 들여다보고 있던 3대의 모니터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바로 자신의 집 모든 공간이 훤하게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물론 자신이 부탁해서 한 일이지만 막상 눈으로 보니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고 현경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 이한의 눈치를 본 재환이 얼른 퇴직형사를 소개했다.
“사생활을 들여다보는 일이기 때문에 아무한테나 맡길 수 없어 믿을만한 분에게 맡겼습니다. 지금은 퇴직하셨지만 제가 처음 경찰에 입문 했을 때 반장님이시던 강반장님입니다.”
퇴직형사가 얼른 말했다.
“반장은 무슨? 강입니다. 무능하긴 하지만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한 적은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한은 그제야 마음을 놓고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모니터는 서재와 거실, 그리고 2층 복도까지 모두 3군데 장소를 비추고 있었다. 뜻밖에도 그 모니터 안에서 현경이 이한의 서재책상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지금 집사람이 뭘 하는 거죠?”
강 반장이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아까부터 계속 저렇게 앉아만 있더군요.”
이한이 말했다.
“혹시, 어제 저희 집사람이 저한테 달려들었던 시간에 집안을 녹화한 테이프가 있을까요?”
“예. 있습니다.”
강 반장이 반대편 모니터 3대에 녹화한 테이프를 넣고 동시에 틀었다. 이한은 여러 감상에 사로잡혀 모니터를 지켜보았다. 모니터를 통해 보는 자신과 가족의 모습은 평소의 느낌과 전혀 달랐다. 특히 현경의 모습을 지켜볼 때는 견딜 수 없이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하루 종일 멍하니 소파에 앉아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시선 대부분은 ‘므이의 집’에 가있었다.
이한이 서재 모습을 녹화한 장면을 보다가 소리쳤다.
“잠깐만요!”
이한이 소리치자 강 반장이 테이프를 뒤로 돌려 재생시켰다. 장면은 바로 현경이 문을 열고 그에게 들려들기 얼마 전 서재의 모습이었다. 이한 자신이 책상에 앉아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재환과의 통화일 것이다. 이한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바싹 당겨 모니터 앞으로 갔다. 그가 중얼거렸다.
“이게... 뭐죠?”
그의 말에 강 반장과 재환도 앞으로 다가앉았다.
“뭐 말인가요?”
“여기 이거요. 검은 형체!”
이한이 화면 하단 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강 반장과 재환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잠시 후 재환이 말했다.
“우린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이번에는 이한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들을 돌아보았다.
“안 보인다구요?”
이한이 다시 모니터를 돌아보았다. 분명 그의 눈에는 전화를 받는 자신의 앞에 서있는 검은 형체가 또렷하게 보였던 것이다. 이한은 바로 옆 서재 밖 복도를 녹화한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수정의 방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현경의 모습이 모니터에 나타났다. 현경이 막 서재의 문을 열려고 할 때였다. 이한은 훅하고 숨을 삼켰다. 서재에 있던 검은 형체가 연기처럼 문밖으로 새나와 현경의 앞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검은 형체가 마치 귀에 대고 뭔가를 속삭이는 것처럼 현경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러자 바로 다음 순간 현경이 온 몸을 축 늘어뜨리며 고개를 숙였다. 검은 형체가 현경의 귀에 대고 계속 뭔가를 속삭였다. 현경은 고통스럽게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아 뜯으며 몸을 비틀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뜻밖에도 갑자기 고개를 치켜든 현경이 정신 나간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며 서재로 뛰어들었다. 그 뒤의 일은 굳이 모니터를 보지 않아도 이한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김 형사님과 강 반장님에겐 정말 아무것도 안 보이나요?”
이한의 말에 두 사람이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내게만 보인다는 얘기군요.”
그때 김 형사가 긴장된 음성으로 소리쳤다.
“여기 좀 봐요.”
모두가 고개를 돌리자 뜻밖에도 화면에 수정이 나와 있었다. 수정은 거실 그림 앞에 얼어붙은 것처럼 서있었고 그녀의 입이 뭔가 중얼거리는 것처럼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들리진 않지만 마치 그녀는 그림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한이 놀라 소리쳤다.
“이건 언제 녹화한 테이프입니까?”
“이건 녹화본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 이한씨 집을 비추고 있는 겁니다.”
이한의 입에서 비명이 새나왔다. 수정의 등 뒤에서 서서히 다가오는 검은 기운을 봤기 때문이었다. 이한은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거실과 서재에 있는 전화기에서 동시에 전화가 왔다는 신호음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수정도 현경도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특히 현경은 바로 눈앞에서 전화가 울리고 있는데 시선은 허공에 고정되어 움직이질 않았다. 이한이 핸드폰에 대고 소리쳤다.
“어서 전화를 받아!”
보다 못한 재환이 이한을 잡아끌며 소리쳤다.
“어서 갑시다. 둘 다 아무런 소리도 못 듣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