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산딸나무꽃 친구
                                                                                                                                                                이정원

  사람에게 지친 마음을 꽃나무에게 풀러 갔다. 그 산 휴양림에 있는 꽃나무라면 말하지 않아도 마음 알아주는 오랜 친구처럼 맞아줄 듯했다. 한데 꽃이 흐드러져 피는 계절이 지나서일까. 막상 꽃을 달고 있는 나무는 찾기가 어려웠다. 휴양림으로 들어오는 길가에서 하얀 꽃을 피운 찔레나무는 보았지만 차로 지나는 바람에 가까이 하지는 못했다.
  배정받은 숙소에 짐을 놓고 조별로 나무공부를 하러 나섰다. 그 길에서도 시들어가는 노란 괴불꽃과 보라색 붓꽃이 눈에 띌 뿐. 피었다 떨어진 쪽동백의 꽃잎을 발밑에서 주워드는 게 다였다. 등산로를 중간쯤 오를 무렵에야 하얗게 핀 꽃을 아직 떨구지 않고 있는 산딸나무를 한 그루 만났다. 반색을 하며 다가가 말을 건넸다.
  “많이 찾았어.”
  “왜 꼭 나지?”
  “꽃을 단 나무가 너밖에 없었으니까.”
  “꽃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꽃은 아름답지만 아픈 사연을 담고 있잖아. 아픈 사연을 담은 존재가 아름다움으로 화한다는 것 자체가 위안이니까.”
  “둘이서만 이야기 할 수 있는 시간에 다시 와. 지금은 얼굴이 너무 많아.”
  나무공부를 마치고 내려와 산나물 반찬으로 저녁을 먹고 별이 떠있는 잣나무 숲에서 시낭송을 들었다. 통나무집 앞엔 어느새 날아오르는 반딧불 같은 불티를 내며 모닥불이 피워져 있었다. 노래와 웃음이 연신 오가는 그 자리에서 왜 눈물이 났는지.
  그 불가에 두고 떠나온 지 벌써 사 년째인 아이들 얼굴이 잘 구워진 감자알처럼 뒹굴고 있어서였을까. 아이들을 데리고 수련회에 가면 마지막 밤은 늘 오늘처럼 모닥불 잔치였다. 거기에 흥겨움을 더하는 건 별 재주가 없어도 괜찮은 담임의 모습이었다. 불빛 안 가 닿는 곳에 숨어 있으면 어떻게든 찾아내 노래든 춤이든 시키고야 말던 녀석들.
  처음 아이들 뒤로 하고 나왔을 땐 오랫동안 누리지 못한 자유로움에 그리운 줄도 몰랐다. 이런 휴양림에 소나무와 자작나무와 산딸나무를 심어 가꾸듯이 나도 그들을 교실에 심어 가꾸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었다. 눈만 뜨면 덜 자란 사람나무 다루느라 목이 잠기고 다리가 쑤셔도 사람으로 하여 지친다는 생각 든 적 없었는데.
  어우러지지 못하는 사람처럼 뒷전에 있다 들어와 다락방에 누웠다. 작은 창문으로 하늘이 보이는 이런 방에서 글쓰기만을 소망했던 꿈이 또 다른 그리움으로 졸음처럼 밀려왔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새벽안개가 지나가는 소리에 눈을 떠졌다. 찬물로 머리를 감고 서둘러 신발을 찾아 신었다.
  안개에 싸인 숲은 더할 수 없이 몽환적이다 .나무들 모두가 그 안개의 자락에 휩싸여 꿈을 꾸고 있는 듯하다. 등산로를 오르다가 저절로 걸음이 멈춰졌다. 하얀 꽃이 나무 전체를 뒤덮은 산딸나무 주변을 진보랏빛 날개의 작은 나비들이 쉼없이 팔랑이며 맴돌고 있는 풍경. 내가 지금 환상의 나라로 들어가는 길목에 선 나무를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무엇 때문에 지쳤는데?”
  “사람들이 내 맘과 영 달라.”
  “너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야.”
  “그건 그래.”
  “날 봐. 네 눈에도 이 하얀 네 개의 잎이 꽃으로 보이지. 하지만 이건 꽃이 아니라 총포라는 거야. 이파리의 변형으로 꽃의 밑부분에서 꽃을 보호하는 역할을 해. 진짜 꽃은 총포 가운데 원반 모양으로 오밀조밀하게 붙은 하얀 것들이야. 모르는 사람들은 총포를 보고 산딸나무는 하얀 십자형의 꽃이 나무 전체를 뒤덮는다고 하지만 난 가만히 있어. 아름답게 보이면 되는 거니까. 내가 할 일은 빨갛고 단 열매를 많이 맺는 거니까.”
  “그랬구나.”
  “네 지친 마음 나한테 다 주고 가. 너 사는 골목에선 나 같은 나무 쉽게 만날 수 없잖아.”
  돌아오는 차 안에서 문득 걱정이 됐다. 내가 그런 마음 놓고 오는 바람에 산딸나무가 대신 아프면 어쩌지. 하지만 남들 자는 새벽에 돌아다닌 덕분에 개도 안 걸린다는 오뉴월 감기로 목이 붓는 걸 보면 나대신 친구가 아프지는 않은 모양이다.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5-08-23 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