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범도 30년 이상 묵으면 그렇게 바스라질 정도로 삭는 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30주년 행사에 쓸 사진이나 편지등을 찾아서 내 놓으라는 준비위원 말에 순종하느라 그 더운걸 무릅쓰고

베란다에 빼곡히 쌓인 앨범들을 다 뒤져서 고등학교 때 정리 해 놓은 앨범을 찾아냈다.

앨범은 손으로 만지기조차 겁이 날 정도로 낡아서 아주 조심스레 뚜껑을 열었다.

묵은 먼지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진들은 하나같이 다 사이즈도 작고 그 속에 찍힌 얼굴들도 작았다.

내 눈이 나빠진 탓인지 얼굴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 단체 사진에서는 내 얼굴조차 찾아낼 수가 없다.

대개 수학여행을 가거나 소풍을 가서 찍은 사진이고 교정에서 선생님과 친구들 틈에 끼어서 찍은 사진

도 있었다. 지금 애들에 비하면 거의 표정이 없다시피한 그 때의 아이들....

근데 희한하게도 희미한 사진들을 들여다 보고 있노라니 그 때의 정황이 서서히 되살아 났다.

우리의 기억주머니가 아주 튼실했던 시절의 기억이기 때문일까?

나이가 들어가면서 우리의 뇌 속에 있는 기억 주머니의 끈이 느슨해지면서 보고 듣고 느꼈던 모든 기억

들은 쉽게 놓치게 되는데, 아직 뇌 기능이 왕성했던 시절의 기억은 웬만해서는 놓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치매 환자들도 현재의 자기는 누구인지 모르면서 아주 오래 전에 있었던 일들은 어제 일처럼 기

억을 해 내는 것이라고 한다.


앨범을 보는데 희한한 사진들이 몇장 눈에 띄었다.

교복도 아니고 평상복도 아닌 아줌마 한복을 입고 있는 아이들 사진이 대여섯장이나 있는 것이다.

지금은 이름도 가물가물한 아이의 독사진도 있고, 가정집은 아닌데 응접실 분위기가 나는 곳에서 전화를

받으며 웃기도 하고, 차려 자세로 서로 손을 잡고 서있기도 했다.

자세히 보니 사진마다 아이들이 입은 한복이 서로 바뀌어 있었다.

어떤 애는 치마가 껑충하니 짧아서 운동화가 다 드러나는 것은 물론 거의 정갱이까지 다 보였다.

이게 무슨 사진일까.....

처음엔 그게 뭔지 금방 떠오르지 않았는데 한 20분 정도 가만히 들여다 보니 그 때의 정황이 생생하게

다 재생이 되어 마치 기록 영화를 보는 것처럼 눈 앞에 펼쳐졌다.

지금처럼 스튜디오 시설이 없던 그 시절에 학교 근처의 어느 사진관에서 그렇게 세트를 갖춰 놓고 한복

까지 빌려주며 사진을 찍어 준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로 큰맘을 먹고 방과 후에 친구들과 우르르 책가방

을 든 채로 몰려 갔다.

아직 전화도 흔하지 않았고 양옥집에 응접세트를 갖추고 사는 집이 많지 않을 때라 그랬는지 우리는 거

기 놓인 싸구려 소파와 탁자, 장식용 조화를 보고 입이 딱 벌어지게 좋아했다.

별로 구색도 갖추지 못한 몇 벌의 한복중에서 그래도 맘에 드는 것을 골라 교복위에다 걸쳐 입고 저고리

바깥으로 교복이 삐져나올세라 카라를 마구 구겨서 집어넣고는 영화배우라도 된 양 폼을 잡았다.

요즘 애들이야 다들 탈랜트 뺨치게 포즈도 잘 잡고 표정도 다양하게 사진을 찍지만 30년 전의 우리는 그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어서 카메라 앞에 앉아서 어색한 웃음을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남의 떡이 커 보였는지 자기가 입은 것보다 친구 것이 더 예뻐 보여서 급기야  사진 한 장 찍고 서로 옷

바꿔 입고 또 한 장 찍고 또 바꾸고....

생각이 많고 조숙했던 나는 사진값이 너무 많이 나오면 부담이 클까봐 독사진을 끝내 찍지 않았다.

우리가 그때 한복을 입고 그리 서대며 사진을 찍은 것은 요즘 애들이 머리에다 분홍 가발, 초록 가발을

쓰고 희한한 복장으로 사진을 찍는 거랑 비슷한 심리였던거 같다.

아무리 세월이 바뀌어도 인간의 발달심리는 거기서 거기로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는 모양이다.

그 사진 속의 아이들은 지금 다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하나같이 내성적이고 남 앞에 좀처럼 나서지 못하는 아이들이었는데 무슨 맘을 먹고 그렇게 사진을 찍었

는지... 아마도 혼자서라면 죽어도 못했을 일이지만 친구들과 어울린 바람에 다들 그렇게 야시짓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린 그렇게 재잘대며 꿈꾸며 여고시절을 친구들과 함께 보낸 것이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찡하다.

내 유년의 모습은 그 몇 조각 기억의 편린 덕분에 조금 더 그림의 윤곽이 드러나고 있었다.

퍼즐의 한 귀퉁이가 제 조각을 찾아 밑 그림을 맞춰가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