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한 친구가 전화를 했습니다.
인도여행 기행문은 쓰지 않니?
다녀온 얘기 저도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풀어야할지 머리속이 복잡합니다.

그 많은 볼거리,그 많은 느낌, 그 많은 즐거움...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 행해졌던 시간들에 취해 아직도 얼얼하다고나 해야하나요 그렇습니다.

인도는 가기 전부터 기대와 설레임으로 미리 몸살을 앓았던 나라라
책을 통해 간접경험한 느낌이 원체험처럼 돼 있었지요.
원체험과 직접체험이 딱 맞아 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품고 떠난
이번 여행은 당연히 찾아올 느낌의 혼선으로도 일단 간단하지 않은 여행이었습니다.

먼저 여행 일정을 미련한  저를 위해서도 정리해봅니다.
할아버지 수염처럼 생긴 인도 지도
믐바이를 기착지로해서 일박 이튿날 아리비아海 보트쿠르즈하며 코끼리 사원의 석굴 관람.간디 생가 구경.
국내선으로 아우랑가바드로
그곳에서 교과서에서 배운 아잔타석굴과 엘로라 석굴을 보고 다시 국내선 타고 가 믐바이에서 일박.
국내선으로 인도의 유럽이라는 별호를 가진 인공호수가 아름다운 우다이프르로 이동
작디쉬사원,피춀라호수 보트쿠르즈,007 옥토퍼시의 무대였던 카테리온키바라를 원경으로 구경했음

벌써 5일 째 버스를 타고 무굴제국이 번성했던  핑크시티 자이프르로 이동
암페르성등을 관람
6일째  파테푸르시크성 관람
다시 국내선으로 아그라로 향함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타즈마할,아그라성 방문

7일째 기차로 잔시로 이동 오차성 및 힌두사원 방문
버스로 4시간 걸려 카주라호로 이동 일박

8일째 미투나상으로 유명한 동,서쪽 사원군 방문
국내선으로 바라나시로 이동
9일째 갠지스강에서 보트타고 꽃불 강에 떠내보내는 의식 치룸
녹야원,박물관 방문 국내선으로 델리로.
델리에서 인천공항으로 이상 끝

이 나이에 한국지명도 외우기 벅찬데 생소하고 길기만한 인도 지명과 사원 이름들을 기억하며
여행 몇일째 봤나를 기억하기란 진땀나는 일입니다.
여행 처음과 끝은 비교적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는데 중간 부분은 나름대로 방점 찍을 곳만 기억에 자리잡고 있네요.
솔직히 씨티펠리스는 어느 도시에서였는지,하와마왈은 봤는지 어쨌는지
5인승 짚차는 어느 곳에서 몇일째 타고 달렸는지 막 헷갈리고 있습니다.
방문지에서 관람한 것들을 다 기록하지 못한 부분은 함께 여행한 여사모님들이 보충해 주십시오.


*아그라역에서 춤을

아그라 역에서 잔시로 떠나는 기차는 두시간도 넘게 연발했습니다.
기차,비행기의 연발은 인도에서는 예사로운 일이었지요.
역사 찻집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몇 년 댄스스포츠 내공이 있는 인순의 동작에 따라
2기 언니들 흥겹게 춤을 배웠습니다.

화장실에서 차례를 기다리면서도 동작을 연습하던 某언니 이를 리얼하게 흉내낸 선희
우리를 포복절도 시켰지요.
마침 인도 음악은 스포츠댄스를 하기에 맞춤했지요.
게다가 누군가 음악을 경쾌한 것으로 바꿔주니 2시간이 너무 빨리 지났더이다.

실은 이날 새벽 호수를 배경으로 자리한 환상적으로 아름다운 호텔 정원에서
쏟아지는 별빛을 받으며 인순이와 저는 춤을 췄었는데 저의 서툰 동작도 인순의 수려한 리드로
그럴듯했었는지 우리들의 원 투 쓰리 동작을 지켜본 두분이 계셨지요 ㅎㅎ 누구라곤 쓰지 않겠어요.

세상에서 얌전한 사람 한사람 남으라면 남겨질 단정한 인순이
인간에게 춤이란 원초적인 자유의 표출이 아닐까합니다.
우리들의 춤을 재미있게 구경하는 현지인들에게
모자들고 구경값 받으러 다니는 모션으로 모두를 ㅂ 빠지게 한 명제
2기언니들이 재치박사란 별호로 불렀지요.

춤을 흉내내면서, 보면서 옛날에 읽은 단편소설이 떠올랐습니다.
사변 이후 우리가 무지하게 가난하던 시절
미군집에서 식모살이 하던 소녀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애정 표현을 적나라하게 하던 미군내외.
우리도 아마 선진국에 역사였다면 그렇게 단체로 들썩일 수 있었을까하는.
우리의 자신감은 국력과 비례관계?

닥터지바고가 가족을 이끌고 바리키노로 떠날 때 역사와 조금 닮은 아그라역에서
춤 때문에 즐거운 추억 또 한 場 품습니다.

*켄터키 옛 집

인도는 매우 넓은 나라라 아무리 국내선을 다섯번이나 이용한다 해도
버스로 이동하는 거리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강행군을 하는지라 버스에 타면 일단 한두시간은 충분히 못잔 잠을 벌충했지요.
그리고도 남은 시간은 많기도 했으니 여행 어느날 춘순 회장님이 노래잘하는 12기 선희를
오락부장으로 노래부르는 시간을 갖자고 제안했는데 선희가 사회만은 못보겠다고 고사하여
2기 모연자 언니가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고참 선배님이 사회를 보시는데 직책을 부장으로 할 수가 없어 오락회장님이란 생소한 신조어로
오락회장님이 급조됐지요.ㅎㅎ

그런데 이상한 현상-마이크만 잡으면 가사가 부분부분 혹은 전부 날라가는 게 아닙니까
마이크 잡은 누구에게나 적용됐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구러 마영옥 언니 차례가 됐지요
젊은 시절의 애잔한 모습이 어렵지 않게 유추되는 고운 언니
치매병원에 입원시키고 온 시어머니 얘기를 하시며
울먹이시니 우리도 덩달아 눈시울이 조금 적셔지는데.
저 `캔터키 옛집` 부르겠어요 하시더니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메기 같이 놀던 곳.......``부르시는 게 아닌가
버스 안이 뒤집어진 것 상상할 수 있지요?

그 때부터 우리 아랫 것들 2기 언니들에게 세자 이상되는 이름을 되물으며
기억력 테스트를 수시로 하는 깜찍한 짓을 한 것 같습니다.ㅠㅠ
언니들~ 우리 5기는 특히 기억력 부분에선 언니들과 대동소이한 것 아시지요?


*마후라증후군

터키도 그렇고 인도도 그렇고 머플러 및 쇼올의 색깔이 다양하기 그지없습니다.
다채로운 색깔이 우리 여인들을 가는 곳마다 홀려댔습니다.

마후라만 보면 떼로 몰려가니 某언니 曰 와우 쟤들 꼭 화적떼 같애 ㅉㅉ
그런데 참고로 그 언니 마후라 23개 샀습니다 ㅋ
마후라 소유 20개 이하인 여사모 별로 없을 것으로 사료됨


*인도 전통 결혼식에 불청객으로 당당하게 참석

어린 시절 우리 어머니는 우리집 엥겔지수가 엄청 높은 것에 관계없이
동생과 내 옷을 서울에 가서 사오곤하셨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옷 날아갈듯한 깐따꾸들,
무늬놓아 기계로 짠 세타, 밑부분엔 끈이 달려 잡아다닐 수 있었으며 끈 끝엔 예쁜 방울이 달려 있었지요.

해서인지 오늘날 저는 보석엔 무관심해도(돈이 없어서기도 하지만) 옷탐은 있는편입니다.
이런 제가 인도옷을 안 살 수는 없겠지요.
몇 명이 인도옷을 사서(그래봐야 30불) 차려 입고
마침 우리가 묵는 호텔에서 치뤄진 결혼식을 구경했습니다.

아마 인도 결혼식은 며칠을 두고 치룬다고 들었어요.
신랑 신부 무대 가운데 앉아 있고 하객들이 차례로 올라가서 인사하며 사진도 찍고 그러더군요.
인도 신부들 무지하게 예쁘고 호텔 결혼식을 할 정도면 부유층이여서인지 하객들의 옷차림도 호화스러웠지요.

여행 길에 전통 결혼식도 구경하고 일석이조의 행운이었습니다.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

피촐라 호수에서 배를 탔습니다.
날씨는 덥지도 춥지도 않은 쾌적한 날씨 산들 바람이 감미롭기 그지없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노래가 흥얼거려지며 같이 어우러지는데
그 노래가 바로 이은하의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
청승을 떨어요.......ㅉㅉ 내 소리에 같이 노래 부르던 후배들 ㄲㄲㄲ

아마도 너무 행복한 순간 무의식 중에 떠오른 사람이 짝꿍들이었나봅니다.
착한 여사모들이지요?
아! 집에 가서 이 노래 불렀다고 얘기하면 또 보내줄거야 하며 누군가 말해서 다시 까르르.
여행중 너무 웃어서 엔돌핀 과잉이라고 걱정했다니까요.



*명품

오늘 서울 롯데백화점에 가서 소위 명품이란 것들을 구경했습니다.
혹시나 역시나 늘 그저 그렇습니다.
명품이라니 명품인가보다 그래서 값도 비싼가보다
늘 돈 아까운 생각이 먼저 드는 가난뱅이 기질에 다름 아니었지요.
저의 명품에 대한 생각은 명품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못하고
늘 마뜩잖은 기분으로 마무리되곤 했습니다.

그런데 타지마할을 본 순간 이건 한마디로 명품이다란 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살 수 없는 물건이라 후하게 점수를 줬을까요?
아닙니다.
혼을 뺏아간다고나 할까요.타지마할을 본 순간 눈을 뗄 수 없이 홀려지더군요.
아름다움의 결정이라해야 할지,어지간히 세계 곳곳에 건축물을 봤건만 최고였습니다.
어떻게 건축물이 그렇게도 사랑스러울 수가 있을까요?

무굴제국의 5대 황제였던 샤 자한은 아내 뭄타즈마할이 출산 중 죽자
머리가 하얗게 셀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아내의 대한 그리움을 역사상 유래없는 화려한 무덤을 건설하는 것으로 대신했습니다.

타즈마할은 왕비가 죽은 이듬해인 1632년부터 22년간이었답니다.
투입된 물량 인부 20여만명,코끼리 1000마리,
설계는 이란출신의 우스타드 이샤.
이태리,프랑스,터키,중국 등의 다양한 기술자들의 합작품.

지혜와 총명함으로 왕의 사랑을 독차지 했던 왕비
얼마만큼의 지혜와 총명함이길래....
공민왕과 노국공주를 살짝 질투한 시절도 있었는데
샤 자한과 그의 왕비는 노골적으로 시샘해도 되겠지요?


*가이드

여행 중 가이드가 세명이었습니다.
첫번째 가이드는 네루대학 한국어과에 다닌다는
한국어를 아주 잘하고 싶은 마음만 큰 국어에 매우 어눌한 친구였지요.

국내선을 갈아탄 어느 공항에서 그가 타라는대로 먼저 나간 일행 댓명이 버스를 타고 비행기까지 갔는데
그 비행기가 아니었습니다.
공항 안내원에게 플라이트 넘버를 말하니 잠시 기다리래더니 다른 버스를 오라해서
우리가 탈 비행기로 데려다 주더군요

잠시 기다리는 사이 2기 마영옥 언니 曰
인생을 사는데 지도자를 잘 만나야 되는데 나는 하나님을 지도자로 모시고 있어 하시더군요.
듣는 순간 저의 인생좌표를 정해주고 이끌어주는 지도자는 누구일까 생각도 해봤지요

다시 가이드 얘기
최고를 경험한 사람은 기대가 없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무슨 얘기냐구요?
몇년 전 로마에서 시쳇말로 끝내주는 가이드를 만났었거든요.
빛나는 미모에 지성에 화술에 뭐 하나 나무랄 것 없어
종내는 아깝다는 생각이 마음 짜안하게 하던 가이드
르네상스의 역사, 스콜라 철학,색채의 미학,종횡무진 그녀의 知的 편력을 듣는 행복을 누릴수 있었지요.

이름이 아소 라는 첫 가이드 그의 더듬거리는 한국어를 들으며
스트레스 풀러 왔다 쌓인다고 누군가는 우스개소리도 했지만,
아소 마소 가소 하고 말하고도 싶었지만 열심히 우리말을 배우고자 하는 모습이 예뻐
어눌한 말도 용서가 되는 청년이었습니다.

두번째 가이드 싱이라는 투잡족
독학으로 공부했다는 한국어가 제법 유창했어요.
인도인들이 세계에서 가장 수학을 잘한다더니
이 친구 눈빛이 아이큐 높아보이던걸요.
우리에게 인도 부동산펀드 사라고 귀뜸도 했습니다.
펀드 애기를 열심히 하고 듣던 중 저 밖을 보세요 사람들이 쭈욱 앉아 있지요?
저 사람들 뭘 생각하고 있을까요? 묻더군요
버스 밖을 내다보니 과연 사람들이 빙 둘러 고요히 앉아있는 것이었습니다.
인도인들 명상을 즐긴다더니 혹시 명상? 혹은 요가? 하며 머리를 굴리는데
싱曰 무슨 펀드를 살까 고민하고 있어요.
아! 이제 인도인 가이드까지 우릴 깔끔하게 웃기니 남아날 ㅂ이 없겠다 ㅎㅎㅎ 한참들 웃었지요.

세번째 가이드는 한국인 청년
인도의 신비스런 정기를 받아서인지 가늠불가 눈빛에
부정확한 말소리도 애매함을 보태주는 수사가 되는 걸 꿈꾸는 대한의 신인류 아들.
델리역에서 헤어지면서 아침반 멤버가 약간의 돈을 걷어 주고올 수 있게
무의식적으로 만드는 청초가련형 총각이었습니다.

*바라나시 갠지스강에서

인도여행을 다녀온 것을 아는 친지들이 묻더군요
그래 무엇을 깨달았어?
왜 다른 곳을 다녀오면 묻지 않는 질문을 하는 것일까 생각해봅니다.
인도에 대한 숱한 여행기에는 `깨달음`이 중심語로 돼있어
우리에게 강박증을 줬었지요 깨달음이 나만 안찾아오면 어쩌나 하는 기우를.

바라나시에 갠지스강을 가기 전 날
2기 언니들의 조촐한 환갑 축하연 자리에서 돌아가며 여행의 소감을 말하는 자리에서도
저는 책을 통한 간접경험에 의한 원체험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고백했었지요.

이튿날 갠지스강 해뜨기를 봐야하기 때문에 꼭두새벽부터 차비하고 갠지스강가로 향했습니다.
어둑신한 가운데 들어나는 남루한 건물들,지저분하기짝이 없는 거리,무심결에 마스크를 쓰게 만드는 고이한 냄새,
지옥의 그림자인양 뿌옇게 안개도 낀 것 같고,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묘한 인도음악,
왠지 악몽을 꿀 때 본 듯한 데쟈부 현상이...

우리팀이 타기 맞춤한 보트를 타고 인도소년이 파는 꽃불을 밝히우고
갠지스강에 떠보냈지요.
일렬로 떠내려가는 꽃불들, 멀리 화장터엔 두 구의 시체를 화장하는 중
이 순간이 울음 우는 타임이다 하고 원체험이 속삭거릴 때 한 분이 흐느끼더군요
덩달아 우리도 다들 눈물이.....아! 바로 이거구나.

해 뜨고 해 지고 나날의 반복
삶이란 무엇이며 죽음은 언제인가?
행복은 무어며 불행은 또 무엔가
성공과 실패,가진 자와 못가진 자,기쁨과 슬픔,유식과 무식,美와 醜

온갖 대비되는 말들이 스르르 힘이 빠지며 하나로 뭉뚱그려지는 순간을 체험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諸行無常`
기독교에서 말하는 `헛되고 헛되니 헛되고 헛되도다`를 새삼 확실하게 알아버린 찰나가 아닐까요?

순우언니가 꽃불이 강물위로 떠날 때 내 영혼이 같이 떠나는 것 같았어 하고 말씀하셨지요.
理科的이어서 감정의 일말도 내보이지 않을 것 같은 분도 이렇듯 문학적인 표현이 나오는 갠지스 강이었습니다.




* 에필로그

그동안 그룹여행을 제법 다녔었습니다.
여행의 묘미는 관광, 플러스 알파가 있어야 빛을 발합니다.
그런데 무슨 무슨 관광에 끼여간 여행에는 플러스 알파는 없더군요.

이번 여행 중 점심시간 어느 호텔 식당안 풍경
한국인인듯한 일행이 묵묵히 심각하게 밥을 먹고 있었는데
저녁시간 또 점심과 똑같은 좌석에 그들이 정물처럼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인이세요? 물었더니 녜 하고 접시로 시선을 보내는 여행객.
오늘 인도에 오셨어요 다시 물었지요 아니요 마지막 날이예요 대답하더군요.
아마도 거의 하나씩 모여서 팀을 이룬 일행이었나봅니다.
그 썰렁함이라니 ㅉㅉ

우리 여사모팀 플러스 알파가 넘치는 팀이었습니다.
2기 선배님들 바리바리 싸오신 밑반찬(김,멸치,깻잎 등등)을
유례언니,추강언니가 끼마다 배급하셨지요.
실은 열흘 정도는 우리 음식 없이도 버틸 수 있었지만 먹으니 또 좋더군요.
출발 공항에서부터 연자언니 물티슈 그리고 또 뭘 나눴는데 아이고 내 정신 참...

명제가 동문수학을 한 인연에 대해서 말했거니와
같은 학교를 나왔다는 인연이 보통 교감신경을 맞추는 게 아니더이다.
아 소리에 어까지 알아차리는 혜순이 선희가 있어 플러스 알파를 배가했으며
머리 허연 후배들의 어떤 농담도 너그러이 받아주시고 귀엽게 봐주신 선배님들 고맙습니다.

정제된 상냥함이 몸에 밴 3기 정숙 언니
소싯적 본 일본 소설에 나오는 정갈한 에프런 두르고 에브리데이 현모양처로 사는 정숙한 여주인공 같았습니다.
한마디 말 섞을 기회가 없었던 귀부인 재숙언니 말없는 편안함을 느꼈구요
학교 때 일등을 주로 하셨다는 추강언니 목은 어떠신지요 목에 두른 의료기구를 보면 안스러웠습니다.

14기 인희와 경원이 그대들이 있어 우리가 얼마나 편했던지..
젊다한들 오십줄에 가까운데 돈계산하기 힘들었을거야 고마웠다.

플러스 알파가 넘쳐 힘든 여정임에도 지치지 않을 수 있었고
앞으로도 여사모의 힘으로 작용할 것 같습니다.

여사모님들
`삶은 늘 고작 그런 것`
그러니 에브리바디! 에브리데이 가능한한 즐겁게 행복하게 살자구요.

(에브리바디와 에브리데이는 우리끼리만 통하는 암호지요? ㅎㅎㅎㅎㅎ)




*네버 앤딩 스토리 인도

사람이 고장난 수도 꼭지 같다거나
뭔 일을 끝낸 후에 뒷 북을 치는 짓을 싫어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인도 여행은 제게 새로운 경험을 여럿 주네요
에필로그라고 졸문을 마감하고 나서도 줄줄줄줄 떠오르는 얘기와
정리해야할 생각이 멈추질 않는군요.

우리가 가본 곳 중 big three는
타지마할과 아잔타 석굴(엘로라 석굴 포함) 그리고 바라나시 갠지스 강이었습니다.
저의 느낌 우선의 가치로 선정한 장소이기도 하지만
타지마할과 아잔타 석굴은 인류 최고의 문화유산입니다.

타지마할은 이미 설명하는 글이 있으니 생략하고 바라나시도 그러하고
아잔타 석굴을 살펴봅시다.
BC2~1세기에 조성,불교가 쇠퇴한 8세기 이후 소멸하면서 1,100년 간이나 밀림 속에 감춰 있었다네요.
1819년 호랑이 사냥을 갔다 길을 잃은 동인도 회사 소속의 영국군 병사에 의해 발견됐지요.

아잔타석굴 사원군은 인도 불교 미술의 최고봉으로 모두 28개의 석굴에
최고 수준의 불교 벽화와 조각품이 가득했습니다.

엘로라 석굴은 불교예술의 보고로 인정받는 아잔타석굴 사원群과는 달리
불교,힌두교,자인교 유적이 혼재해 있어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합니다.
6세기경에 불교가 등장한 것을 시작으로 무려 50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힌두교,자인교가 차례로 자리를 잡았다네요.

특이한 점은 같은 장소에 여러 종교가 거쳐갔는데도
문화적인 훼손작업이 전혀 가해지지 않았다는 것.
역사 속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종교 전쟁을 떠올린다면 이와 같은 현상은
자비와 평화를 모토로 네세우면서 반목과 대립을 일삼는
종교가 가진 아이러니를 극복한 훌륭한 사례라 더 놀랍습니다.(자료 `인도 백배 즐기기` 참조)

사실 우리 나이에는 기억력이 형편없으므로
역사적 사실보다는 역사가 남긴 진실 부분이 더 어필되는 게 당연합니다.

제가 빅쓰리라는 시쳇말로 인도를 정리하려는 것은
인도라는 나무에 큰 가지를 세워 잔가지를 채워가려는 욕심에 다름아닙니다.
그 잔가지들!!
버스 밖 풍경,황량한 벌판,오차성 근처 다리에서 무슨 인도 악기로 연주하던 악사 할아버지
시냇가에서 웃으면서 어린 아들 시냇가에 앉쳐놓고 빨래하던 아낙.
우리 아이들과 다르게 울음 울며 구걸하는 아이들,
구걸하면서도 드레쉬 한 사리를 입은 아낙네,
그리고 그 많은 역사가 있는 城들.....
프랑스 어느 시인의 싯귀 `城이여! 계절이여!`
젊은 시절에 읽었을 때는 생뚱맞았었는데 이제야 공감을 합니다.

인도 여행에서 얻은 소득(너무 계산적이라 쓰기 싫은 단어지만)
운명에 대한 순응적 자세가 肉化될 것만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