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안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학생들의 방학과 성탄절과 연말이 겹쳐 빈자리가 하나도 없었다.
영어에 자신이 없는 나는
짐을 찾는 일과 공항 안에서 어설프고 서투를 내 모습에 걱정이 되었다.
실제로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사모님과의 만남이 그 넓은 공항에서
제대로 이루어 질 수 있을까?
주님이 나를 이 곳에 보내 준 뜻에 충분히 순종될 수 있을까?
비행기 안에서 생각과 기도가 엇갈렸다.
두고 온 교회와 성도들의 얼굴과
남편의 식사랑 살림들...
이래서 여자는 있었던 자리를 선뜻 나서지 못하나보다.

내 앞에서 내린 사람이 한국사람 인 듯 하여
그 사람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그러면 짐을 찾을 수 있고 공항에서 무언의 인도가 될 것 같아서였다.

무사히 짐을 찾아 나오는 길목에 누가 와서 나의 목을 껴안는다.
아! 나영자 사모님이셨다.
사진으로 이미 고운 자태를 알고 있었지만 실제는 더욱 부드럽고 아름다운 분이었다.
우리는 그동안 친 자매이상으로 서로를 기도해주며 위로해 주며 그리워했었다.
사모님의 운전 속도에 따라 미국의 황홀한 야경이 물결치듯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가 교회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유명애 선배님과 정인옥 동기가 기다리고 있다는 전갈을 받았다.
4시간이 넘는 먼 곳으로부터 먼 길이라 여기지 않고 단숨에 달려온
선배님과 친구의 사랑이 내 가슴에 뭉클하게 올라왔다.

미국 땅에서의 우리의 재회는 따뜻이 안아주는 포옹으로 행복하게 이루어졌다.
나구용 목사님께서는 토요일 밤인데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에게 뉴욕의 야경을 보게 해 주셨다.
세계적인 도시 뉴욕은 거리마다 사람마다 성탄의 기쁨으로 충만해 있었다.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황홀한 야경은 노래와 함께 울려 퍼졌고
곳곳에서 감탄의 탄성이 메아리쳤다.

나 역시 콧노래를 부르며 그 멋진 도시를 벗어날 때
나의 눈에는 어느 교회 건물 앞에
다 떨어진 담요 한 장을 덮고
추위와 배고픔에 떨며 자고 있는 홈리스들이 보였다.
그 때 유명애 선배님은  
“교회가 저들에게 문을 열어주면 얼어 죽지는 않을텐데...” 라고 말했다.
만약 선배님의 집이라면 당장 뛰어나가 문을 열고 들어오라고 할 것 같은
안타까움으로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저 곳이 교회 앞이니까 홈리스들이 잠을 자지
다른 빌딩 같으면 건물 벽에 의지하여 잠을 자도록 내버려 두지 않아요.” 라고
목사님도 안타까워 하셨다.

내 머리 속에는  뉴욕도시가 주는 눈이 부시도록 환한 빛과
홈리스들이 덮고 자던 시커먼 담요와
그들의 피부와 그들의 배고픔과 추위가
어두운 그늘이 되어 명암으로 강하게 각인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늘어나는 실업과 경기 침체로
노숙자들이 급증한다는 신문 기사를 읽고
어느 날 새벽
청량리에 나간 일이 있었다.
아직 어두움이 가시지 않은 새벽길은 저절로 몸이 덜덜 떨려왔다.
그런데 벤치와 건물의 후미진 곳에서 웅크리고 자는 사람들이 눈이 띄었다.
그들이 잠을 자고 일어난 어젯밤의 추위는 서울에 첫 얼음이 얼었다는 추위였다.
어쩌면 저들 중에는 어젯밤 잠들어 오늘 아침에
잠깨지 못하고 얼어 죽는 자들도 있을 것 같았다.  

이리저리 살피는 중에 다일 공동체가 노숙자들에게
무료로 점심을 주는 곳을 답사할 마음으로 그 곳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 곳에 30여명의 노숙자들이 이미 와 있는 것이었다.
나는 옷이 유난히 남루한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왜 이 곳에 와 계세요?
아! 점심만 주는 것이 아니고 아침도 주는군요.”
할아버지는 내가 철없어 보이는지
“이따가 점심 먹으려고 줄 서려고 왔어.”

11시에 점심을 제공하는데 아침 7시에 그 곳에 와 계셨던
그 날의 할아버지의 오랜 기다림이
시리고 아픈 바람이 되어 내 가슴을 바늘처럼 찌르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추위에 떠는 노숙자들에게
따뜻한 국밥 한 그릇 주어야겠다.
국밥이 안 되면 컵라면이라도 주어야지.
컵라면도 안 되면 뜨거운 물이라도 마실 수 있도록 해야겠어.
커다란 주전자와 보온 물통을 사야지...
무조건 시작해야 해!”

생각이 많으니 말은 없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은 조용했다.

생각이 많았던 깊은 밤을 잠깐 잠을 자고 주일 아침이 밝았다.
목사님은 주일 1부 예배와 2부 예배의
설교 시간을 나에게 맡겨 주셨다.
목사님의 설교 말씀이 얼마나 좋은데
그 말씀을 받으러 나온 성도들에게 가장 미안했다.
강단의 귀한 시간을 부족한 나를 믿고 내어주신 목사님께
누를 끼칠까봐 나의 마음은 무거웠다.
예배 시간보다 한 시간 전에 교회에 도착해서
나는 주님께 간절히 간구했다.
“주님! 주일 설교의 강단을 저 같이 부족한 사람에게
내어 주셨는데 이를 어쩌면 좋아요.”
가슴 저 깊은 곳에서 뜨거운 눈물이 계속 솟았다.
주님은 나를 눈물로 씻기시고 또 씻기시고...
나를 비우시고 또 비우셨다.
그리고 세미한 성령의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진실하거라!”
기도하던 나의 온몸이 전율하며 그 소리가 내 몸으로 들어 왔다.
나를 짓누르던 모든 두려움과 걱정이 다 사라지고
주님이 나와 함께 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과
아름다운 이 교회와 성도님들에게
은혜를 베푸실 분은 나의 거침없는 달변이 아니고
주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강단에 서니 수 백 명의 반짝이는 눈들이 나를 응시했다.
저 쪽에서 가장 빛나는 눈으로 나를 지켜보시는 주님이
나에게 다시 한 번 말씀 하셨다.
“사랑하는 딸아! 너는 나와 이 성도들 앞에서 그저 진실하면 된다.”

나는 띄엄띄엄
아주 서투른 나의 본래의 모습대로
주님이 나에게 베푸신 은혜와 사랑을 말하기 시작했다.
말하는 내가 울고
남자 성도님도 여자 성도님도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청년도 새 신자도...
우리 모두의 얼굴은 미처 닦을 사이 없이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로 얼룩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