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님, 마치 주말농장에 온 기분이 들어요."

여름이 한창이던 지난  달에  캘거리 외곽에  사시는  선배님 댁에서  동문들이 모였다.



로키 산자락이  손에 잡힐 듯 한  들판 한가운데 있는  집  마당이  마치 5일장이 선 듯  여자들의 재잘거림과 웃음소리로  가득하였다.



나무 그늘 우거진  숲에서  저녁을 먹은 후  우리는  앞 마당  옆  쪽에 만들어진  텃밭으로 들어갔는데,   그리 크지않은  그 밭에는  여러 종류의 야채와 꽃들이 자라고 있었다.



너무 빼곡히 씨앗을 뿌린 상추를 쏚아내자고 시작한 것이  그만   우리 모두에게  각종 꽃과  야채를  

분양해주는 주말 농장처럼 되고 말았다.



이민 오신 지 오래 되신 선배님에게 주말농장의 의미를 설명해드렸더니,

"그러지 뭐, 어려울 것 있나.  한 평씩 떼어줄테니  알아서 심으라구..." 하시며 웃으셨다.



이민을 오기 전 우리는 친구들과  주말농장에서 농사를 지었었다.



농사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사치스러운...



주말마다 시간을 내어 가보면 다른 집 밭에는 야채와 과일등이  풍성하게  열렸지만  서로 미루고 돌보지않는 우리 밭은 언제나  잡초가 무성하고  열매는 부실했었다.



어느 해인가 고추를 심었는데  예상 밖으로 수확이 많이 되어서  모두들 환호성을 지르며  가져왔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누군가 거름을 잘주고  보이지않게 돌보았으리라  .



고개를 들어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니 문득 그 때 함께 지내던 친구들 얼굴이 구름 위로 스쳐지나가고있었다.



나도 몇 가지의 야채 모종와 꽃을  얻어왔다.

배추, 부추, 분홍 코스모스 그리고 이름모르는 노란 꽃.



마땅히 심을 곳도 없었던 나는 커다란 화분에  배추를 심고 부추는  잔디가 패여져나간   빈 자리에

심었다.

코스모스는  앞마당에 있는 나무 아래 심어놓았는데  오며가며 보는  재미가  만만치않았다.



배추모종이 뿌리를 잘 내리고 올라오는 것을 보다가 문득 어디에선가  열무와 완두콩 씨앗를  본 기억이 났다.

날씨는 하루하루 다르게  기온이 내려가고 있었지만  마지막 남은 그 몇 일동안의 여름날씨를  가까이에서 더 보고 싶은 마음으로  다른 화분에 그 씨앗들도  심었다.



마침 파를 사 온것도 있어서 그 뿌리들은  콩 심은 가장자리에 둘러심었다.

급한 나의 마음은  아침 저녁으로 언제 싹이 올라오는 지 보려고   늘  화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2주쯤 되었을까?

여리디 여린 열무  떡잎이 올라오더니  콩 싹도  눈을 틔우며 올라오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아--"하는 환호성이  나오고 있었다.

열무는  어느 새  떡잎을  밀쳐내고  본잎이 올라오면서  커다란 화분 전체를  감싸며 퍼져올라오고 있었다.



이민을 오던 첫 해이던가.

이삿짐 속에서  발견한 열무씨를  나무 상자에 심었는데 키다리처럼 부쩍부쩍 올라오더니  예쁜 보라색 꽃을  피웠었다.

마치 고향 집 마당에  온 느낌으로 늘 들여다보던 기억이 난다.



완두콩은  열무보다는  더디 싹이 올라왔지만  그 앙징스런 모습의 콩깍지 같은  이파리들을 달고  그 사이로 덩굴까지 뼏어올라오니 제법 콩 다운 모습이 되어가고 있었다.

덩굴을 뼏어 올라가라고 막대를 꽂아주었지만 그 콩 덩굴은 막대가 있는 지 없는 지 아랑곳없이  곁에 있는 파줄기를 타고 올라가는 것이었다.

파 줄기들은  힘에 겨운 듯  옆으로 쓰러지기도하고 눕기도 하면서 콩들의 의지처가 되어가고 있었다.





부추는 잔디밭 사이에 심었더니  어느 날 밤인가  토끼들이 빨간 눈을 반짝이며  오물오물 먹고 있어서 늦게 귀가하던 나를 깜짝 놀라게도 하였다.



배추도 날이 갈수록 잎새가 늘어나더니 어느 새 꽃대가 올라오고 있었다.

제법 벌레도 생겼는 지  군데군데 구멍도 뚫어지고  배추 모습이 영글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배추벌레의 모습은 보이지않고 배추에 구멍만 늘어나더니 몇 일이 지나자  어린 시절 보았던 그 푸르딩딩한 배추벌레가 너무도 당당하게 배추를 갉아먹고 있었다.



친정어머니는 집 가까이에 있는 공터에서  텃밭을 부치시곤 하였는데  해마다  가을이 오기 전 아직 볕이 따갑다고 느껴질 무렵이면 늘 김장 배추나 무우씨앗을 사다가 심으시곤 하셨다.

어린 마음에 아직 이렇게 뜨거운 여름인데 웬 김장걱정을 벌써부터 하실까  하는의문이 들었지만  싹들이 올라와서 제법 배추나 무우 형태가 되면  어느 덧 찬 바람이 느껴지면서  어느 덧 가을을 느끼곤하였었다.



어느 해인가 어머니는 유난히 많이 늘어나는 배추벌레 때문에 걱정을 하시다가 우리들에게 벌레잡이를 시키셨다.

동생들은 그 징그러운 벌레를 무슨 놀이를 하는 것처럼 잘도 잡았지만 나는 그 벌레를 보기만해도 소리를 지르며 도망을 가곤하였다.



그런데 저리도 당당하게 배추 위로 스멀스멀 기어가며 유유자적 하는- 더구나 나의 아름다운  배추 정원을 훼손하는- 저 푸른 벌레를 바라보며 나의 입가에 웃음을 띄우다니...



배추꽃 사진을 찍으러 나왔던 딸아이는 내게 이렇게 말하였다.

"엄마,  배추를 갉아먹는 저 벌레를 왜 안잡으세요?"

"응, 그냥 두려무나...  벌레도 먹고 살아야지......"



참으로 많은 시간들이 지나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옆에 이상한 싹이 올라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모양은 코스모스 같은데,  그럴리가 없지...  아마  배추 모종을 얻어올 때  그 흙에 붙어있던 잡초일거야.



물을 줄 때도 배추 잎에는 좀 더 물을 주려고 했지만 그 이상한 잡초는 눈여겨보지 않았었다.

그래도 그 것은 열심히 고개를 내밀며 쑥쑥 자라나고있었다.

"참 이상한 잡초도 다 있네,  어쩌면  코스모스와 저리도 닮았을까..."



그런데 지난 주말 아침,  쓰레기를 버리려고  마당을 지나서 돌아가던 중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그 잡초가, 아니 그 것이  하얀 코스모스였던 것이었다.

하얀 소복을 입은 시골 처녀처럼 수줍게 웃으며 나에게 미소를 보내는 것이었다.

"저예요.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그럴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데..."



나는 돌아서서  그 하얀 꽃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배추 꽃 옆에  그 코스모스가  갑자기  불쌍하게 느껴지면서  나 자신을 돌아보게하였다.

저 여리디 여린 것이 배추들 사이에서 저 홀로 외로히 꽃을 피우고  씩씩하게  자라 났구나!



마치 그 코스모스가 우리 이민자 자녀들의 삶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더욱 정이 느껴졌다.

백인들의 터전인  이 곳에서  우리 이민자 자녀들은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지도 않으면서 그저 묵묵히 그 들의 할 일을  하면서 뿌리를 내려간다고 생각하니 그 코스모스가 마치 우리 아이들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생각되었다.



언덕 아래 연못에서  오리들의 아침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시간에 쫒기는 평일에는 느낄 수 없었던 모습과 소리들이 모든 것이 고요한 주말 아침에 나의 마음을

찾아오고있다.



잔디 위로 떨어진 낙엽들이 꽃처럼 아름다운 것은 가을이 오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