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마다 테니스 코트에서 나를 기다리는 親韓狂('파' 도 아니고 '주의자' 도 아니고 '광') 주부가 있어.
그  니쿠라 마사요는 작년 여름방학에 중학생 딸을 데리고 한국에 가서 한국어 어학원도 다니고 맛있는 것도
실컷 먹고온 걸 생애 찬란한 추억으로 끌어 안고 산다.
일본에서 컨서트를 여는 젊은 가수들을 나 보다도 더 잘 알고, 드라마에 나오는 탈렌트의 이름도 줄줄이
꿰고 있어 어떤때는 내가 물어 볼때도 있어서 "너 한국 사람 맞어? " 농담도 한다.
드라마를 보다가 모르는 게 있으면 메모해 두었다가 수요일 나를 만나면 붙잡고 묻곤 해서 다른 이들의 곱지 않은
눈총을 받아 민망하기도 하지.
이를테면 약혼식(일본엔 약혼식이 없다)이 워냐든지, 양뱐이 뭐하는 직업이냐는 둥, 배(梨)가 사철 있느냐느니.
참 알고 싶은 것도 무궁무진하다.

그런 그녀는 그렇게 한가한 유한 부인이 아니다.가축병원 (동물병원)수의사인 남편의 조수 일을 파트타임으로 주4회 하는게 주업이고,
주2회씩 받는  테니스 상급코스 레슨비(2만5천엔)마련을 위해 신문 대금 수금 일을 저녁시간에 따로 하는
알뜰한 생활인이다.

작년인가, 하코네 시세이도 휴양소에 1박2일 테니스 합숙을 갔을 때  고이즈미 前 총리가 야스쿠니 진자 참배를 했다고 해서
왜 한국에서 항의 시위를 하느냐길래  그 배경 설명을 그저 쬐금 했는데도 지루해서 하품까지 해가며,
" 몰라. 몰라. 난 과거 역사 같은거 몰라.   관심도 없어.   난 그냥 지금 한국이 좋고,한국 가수가 좋고 원빈이 좋고,
유시원이 맘에 들어.   나 하고 박상(樣)이 사이좋게  사귀는 것 처럼  두 나라가  그냥 사이좋게 지냈슴 좋겠어. "
좋아한다는 건 ' 바로 알고, 깊은 관심을 갖는 거' 라고 오금을 박아 주고 싶었지만 이제 겨우 가느다랗게 뻗어 내리는
민초 외교의 뿌리가 송두리째 뽑힐까봐 난 그냥 눌러 참았네.

지금은 마츠게타상이라 부르지만 그는 토종 한국인.
유학 중 사귄 일본 젊은이와 연애하고 결혼하여 눌러 앉았다.
'왜 하필이면 일본인이냐?' 소리를 백번 쯤 듣고.
공인회계사인 남편과 남매를 낳고, 생활도 안정되고 ,남편 역시도  돈 버느라 밖으로만 나돌던 자신의 어머니에 비해
깔끔하게 가정을 가꾸는 아내를 참 만족해 하며 십육년째 산다.
촘촘히 붙어 있는 주택가.
한여름에도 이웃이 볼쎄라, 엿들을쎄라 싸움도 소곤소곤하고 청소기도 문 닫고 돌리는 자기네 동네에서 가장 목소리
크게 떠들고 애들을 야단치고, 문을 있는 대로 열어 놓고 청소기를 돌리는 교양 없는 이는 자기 뿐 일거라나.
시어머니는 몇년전에 돌아가셨고,  시아버지가 혼자 고향에 살고 있었지만 , 그 고향이란 곳이  겨울에 눈이 엄청나게 오는
곳이라  겨울 세달간을 이 아들네 집에 와서 지낸다.
왼종일  거실를 차지하고  일본경제신문을 샅샅이 읽고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힐 지경인데
' 한국인이 대단한 민족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내집이 한국풍(이미지)에 물드는건 달갑지 않다고 복장 뒤집는 소릴 했다고
외로운 하소연을 한 적도 있다.
작년 유월에 그 달갑지않게 여기는  며느리 집과 그 근처 병원에 입. 퇴원을 거듭하는 동안 한국 며느리의 효를 마음껏
받다가  돌아 가셨다.
맏며느리로 시부모의 상을 같이 치루고 애들도 컸고. 배짱도 두둑하고  겉으로는 부러울 것 없이 행복해 보이는 그가
내게 쇼크 먹을 말을 했다.
" 난 이담에 애들 다 키워 독립하면 홀홀히 한국으로 돌아가려구 해요.   남편과  아이들  그들은 모두 이 나라 사람이니까
여기 놔 두고 나 혼자 만요.   그냥 해 보는 소리 아니예요"


1년전 내가 일하는 가게에 새로 들어 온 서른 일곱살 안도 미유키(安藤美雪)는 3년 전 급성 백혈병으로 남편과 사별했다.
남편을 여의고 2년간 친정에 같이 살며 무기력하게 쳐박혀 지냈는데 친정 엄마가 성화를 하여 다시 일을 하는데
1년 새 몰라 보게 달라져 가고 있다.
어깨를 덮은 칠흑 같은 머리며, 어깨쭉지 뒷편에 언듯 보이는 패션문신, 일이 끝나면 같이 차 한잔을 하는 자리에서
혼자서 유유히 꼬나무는 담배.
태어나 자란 홋카이도 삿포로에서 애들 적에는 꽤나 '놀던 애' 였다고 스스로 그러던데,  일년 전  처음 봤을 땐  남 이라도
가슴이 에일만큼 애가 쓰였었다.
종일 입을 꼭 다문 채 제 할일만 열심히 하지 우스개 소리를 하길 하나, 힘이 든들 도와달란 소릴하나,
우리끼린 종종 좋다고 소문난 곳을 찾아 다니기도 하는데, 어린  아이( 다섯살, 소학교5학년)가 있다고 낄 생각도 안하더니
근래 들어선 제법 애들 얘기를 재잘거리기도 하고,
지난 휴일 아이들과 남편의 묘에 가서 황사가 포얗게 앉은 묘석을 깨끗이 닦고 온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기도 했다.
언제나 보육원에 아이 데리러 가야 한다고 끝나면 부리나케 가더니 요즘은 종종 수다에 어울리기도 해.
작은 애 두살때  애 아빠가 갑자기 죽고나니 뭘 어떻게 할 줄 모르고 시가에서  얼마간 보태주는 것과  마침 엄마가
혼자 사시니까 거기 들어와 같이 살았는데 ' 애를 둘 씩이나 키우는 에미가 나태하게 손 놓고 있으면 어쩔거냐,  일 안 하면
나도 모른 체 할 수 밖에 없다' 고 친정엄마가 엄포를 놓아서  일을 시작했다는데
"애들 자라는 거 보며, 사람 틈에서 바쁘게 지내니  웃을 일도  있어서 참 좋아요.   엄마가 가끔은 작은 애 보육원에서
데려 오는 일을 해 주신다고 했으니 저도  가끔은 시간낼 수 있어요. "
" 그래.   어울려서 지내도록 해요.   자꾸 혼자 있게 되면 우울해져서 못 써요. "
" 엄마가 밝아야 애들도 밝게 자라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