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건 사는게(生) 아니야 '
' 이건 사는게 아니야.'
노련한 여의사는 그냥 벅벅 소리라도 지르면서 힘을 주라고 하는데 나는 아무 말도 생각이 안나고
그말 만이 입에서 나오는지  産苦의 비명치고는 가히 철학적이었다.
분만실로 실려들어간 후 울엄마가 분만실 문틈에 귀를 대고 있어도  한참동안 아무소리가 없어
'손주 보려다 딸 잡았는갑다' 하고 주저앉고 싶을 무렵  아기 울음소리가 났다고 했지.
외동이면 저도 외롭고 성격도 이기적이라 못 쓴다고 사람마다 그러던데 그러거나 말거나
둘 낳고 셋 낳으리라고는 염두에도 두어 본 적이 없다.
부모 없는 것이 결손가정이라면 형제 없는 것도 결손이라면 결손.
나는 아들에게 '동기간' 이란 혈맥을 엮어 주지 않은 직무 유기를 했다.
제 스스로 세상에서 인간의 고리를 든든히 묶기 바랄 밖에.

다른  집이라면 금이야 옥이야 날라갈쎄라 꺼질쎄라
얼구 떨구 위해 받들어 키웠을테지만 우리아인 야무지게  홀로 서기 연습을 하며 애머슴 처럼 자랐다.
전화로 신청해 놓은 민원 서류를 동사무소에 가서 찾아 오는건  초등학교 들어가면서 부터
제가 해야 하는걸로 알았고, 안경 다리가 부러져도 당연히  제가 가서 고쳐 왔지.
아빠가 출장 가면   '가장 대리' 인 줄 알고 문단속도 챙겼고, 아빠 없을 땐 반찬도 청소도
대충한다고  얼마나 나를 닥달하던지.
초등 2학년때 포경수술를 했어.   다음날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 혼자 우산을 받아 들고가 치료를 받고 왔다.
" 혼자 왔니?"
" 예.   우리 엄만 바빠요.   치료 받고 혼자 갈 수 있어요. "
" 그래 그래 장하다.   수술은 아주 예쁘게(?) 잘 됐다."

4학년 겨울 방학에 걸어서 국토종단을 보름 동안 다녀 왔는데.
서울에 도착하여 여의도에서 해단식를 하니까 부모들 마중오라고 해서 가봤더니
추위에 얼고 눈에 타서 상거지꼴들이 되었어도 누가 시켰는지 노래까지 불러가며
깃발들고 줄지어  오는데 코끝이 시큰했지.
저도 집과 부모가 어지간히 그리웠던듯 싶고.
" 엄마는 아들 고생시키는게 취미지? "

저학년때 부터 검도를 했어.  제가 하고 싶다고 쫄라서.
언젠가 부모들 와서 대견한 자식들 모습 보라고 해서 갔었네.
그냥 구경만 하고 손뼉이나 치다 왔으면 괜찮을걸 ' 부모님들 중에 목검으로 촛불 끄기 해 보실분
나오세요 ' 그말에 내가 살그머니 일어났어.   애들 하는거 보니 금방 꺼질것 같고 재밌어 보이길래.
촛불은 건드리지 말고 목검을 위에서 내리쳐 그 바람으로 불을 끄는건데 생각 처럼 잘 안되데.
열을 세도 안 꺼지고 스믈을 세도 안꺼져서 입으로 불어서 끄고 들어오는데 무지 민망하더군.
우리 아들은 아예 못 본 척하고 있더라구.
' 아쿠 참.   엄만 아들 쪽 팔리게 하는게 그렇게 재밌어?"

민간인이 포항 해병대 훈련소에 입소하여 일주일간 훈련 받는 프로를 일본 TV에서도 소개하기에
고생은 되도 재미있겠다 싶어 ' 아들아, 너 한국에 가 보고싶지?   재미있을거 같으니  같이 가자" 했더니
이젠 안 속는다구 , 그게 그렇게 재밌어 보이면 혼자 가라고 하지만 신청해 놓으면  제가 안가고 배길까 싶어
신청을 하렸더니 벌써 마감했대.   인기가 있다더구먼.

올4월이면 만 스므살이 되는 아들애의 희망대로 독립세대로 살기로 해서
학교 가까이에 작은 아파트를 하나 얻어 주었다.
작지만 호텔 같은 아파트가 학생의 신분으론 좀 사치스럽지만 내가 맘 편히 살기 위해
과감히 일년치 사용료 150만엔을 일시불로 지불하고 신학기(4월초)부터 따로 살기로 했네.
해먹어야지, 빨아 입어야지, 아르바이트 해서 용돈 벌어야지. 공부도 만만치않게 많지.
고생 막심이겠지만 그것도 제가 선택한 세상살이
' 엄마, 새로 사놓은 샴푸가 통째로 없어졌다든지 참기름이 없어졌으면 가난한 고학생 후원한 셈치고
애 쓰고 찾지 마셔. '

부모인 우린 언젠가 한국으로 돌아가겠지만
우리앤 이나라에 남을 가능성이 아마도 크다.  '조센징' '조센징' 부르며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짓밟던 시절은
갔다 하더라도 보이게 안보이게 층하를 두고 불이익이 있는건 누구나 겪는 사실이고,  이 나라 인종들 보다
빠지지 않게 잘났어도 다수의 자국민의 힘에 떠밀려 묻어가야 할 때가 많다는것도  외국에 살아본 사람은  안다.
그럴 때 상처 받지 않고 굿굿이 제 길을 잘 가기 위해  모질게 담근질을 한다.  부모된 맘이 아리긴 해도.

초등학생때 한국을 떠나온 뒤 여기서 제 또래의 한국인을 만나 본 적도 없고 사귀어 볼 기회도 없었다.
앞으로 제 구미에 맞는 일본 여자를 아내로 맞을지도  모른다.
국민정서 란게 있고 성장문화 라는것도 간과할 게 하니라고 누누히 말 해 두지만
막상 제가 선택하고 결정하면 구태의연 뭉뚱그려진  이유로, 되니 안되니 할 명분이 없다는 것도 각오하고 있다.

누구나 꿈꾸는 대로 살아지면 참 좋으련만
세상이 어디 그렇게 몰캉 몰캉한가 말이지?
난 그냥 우리 아이가 월요일이면 싱글거리는 얼굴로 씩씩하게 세상에 나가
인간을 중히 여기는 마음 하나로 일인분 충실한 甲男으로 살면
내가 오직 한톨 씨앗을 세상에 떨군 보람이 있지않나 싶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