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에 돌아가신 시아버지의 제사가 돌아온다.
병환들어 1년여 누워 계시며 사그라질대로 사그라져 이젠 내일 밤에 돌아가신다 해도
놀랄 일이 아닐 즈음 남편과 나는 약속을 했다.
젊은 시절 40여년을 사신 부산에서 낙향하여 태을 묻은 고향에 돌아와 사시다 외롭지 않게
편히 돌아 가시는 거니까 한국에 있는 우리 친구나   知人들에겐 연락하지 않기로.

'나중에 친구들이 알면 의리 없고 우정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까?'
' 괜찮아.  장례 다 치른 후에 여차 여차해서 연락할 겨를도 없이 무사히 마치고 간다고
전화하면 되는거야.   바쁜 사람들  이 먼 곳까지 오라는 것도 무리고, 갚을 기약 없는 신세를 지는 것도
마음의 빚인데다 서로 난처하고 폐가 될 일은 삼가하는 것도 우정이고 의리인거야.

원래도  그랬는지 모르지만 내 터를 떠나 산 지 십년.
더구나 일본이란 가깝지만 먼 나라에서 살다 보니 남편이나 나나  정 어쩔 도리없는 일 아니면
' 아는 사이' 란 이유로 부탁하고, 신세지고, 사정하는 일은 안하기 주의다.

일년을 편찮으시던  아버님이 마침 내가 일주일 예정으로 한국에 가 있는  동안에 돌아가셨다.
마치 나를 마지막 보고 가시려고 안간 힘을 쓰고 실낱같은 목숨을  놓지 않고 계셨던 것 처럼.
그때 남편은 큰 지진이 나서 공항, 신칸센, 고속도로가 모두 끊겨 고립무원이 된 니카타 옆 토야마 출장지에서
만추의 저녁 무렵 부친의 부음을  듣게 되었다.
출장 간 일을 서둘러 마무리 해 놓고 끊기지 않은 나가노 (長野) 쪽 어두운 국도를 돌아 돌아 달려
집에 와서는 내가 한국가면서 '그동안 혹시' 일 지 몰라서 준비해 놓고 간 검은 양복을 입고
부산행 비행기에 오른다고 했다.

날이 밝자 검은 리본을 매단 화환이 줄줄이 진열되기 시작했지만 아무리 찾아 봐도 이 喪家의 차남인 남편을
연고로  한 화환은 하나도 없었다.   알리지 않기로 했으니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한 사람이 이 땅에서 태어나, 자라고, 학교를 다니고, 직장을 다니고, 사십년  적지 않은 인맥을 맺었건만
어쩌면 이리도 적막하게 인연의 고리가 똑 끊어져 버렸을까 하는  형용키 어려운 쓸쓸한 마음이 들고,
남편이 와서 화환의 행렬를 보면 지금 나와 같은 마음이 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미치자, 약속을 어기고
망설이고 망설이던 전화를 서울에 했다.   남편의 막역한 친구에게.
그이와 한 약속이 있기 때문에 무척 망설이다 전화한다고, 그이는 아직 오지 못하고 있는데
조그만 화환 하나 보내 주면 내 고적한 마음에 위로가 될 것 같다고.   정말로 작은  화환 하나면 된다고.
전화 통화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커다란 화환이 오고, 그날 저녁 늦게 그이의 친구들이 동부인하여 먼 길을 달려왔다.

장례를 마치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  걸은 전화에 들려온 얘기로는
먼 곳에서 온 손님을 위하여 우리가 마련해 놓은 호텔에서  편히 쉬고,  발인식 마치는 거 본 후 서울로 오는 길엔
통영  여기 저기을 구경하고,  어시장에 들려 집에 있는 가족을 위해 회를 사서 얼음 채워 싣고,
지천으로 파는 단감을 서너자루 씩  사서 싣고, 청명한 가을날 단풍구경하며 돌아 오는 길이 얼마나 좋은 가을 여행길
이었는지  돌아 가신 분께 감사했다고 했다.

두 해가 지난 지금까지도 알린 것이 잘한건지 잘못한건진  모른다.
언제일 지 몰라도 이제 한 분 남은 시어머니의 임종을 준비해야 할 때가 오면
남편과 나는 또  그런 약속을 할테지만
막상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