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벽부로 유명한 중국 북송의 시인 소동파가 황주에 유배를 갔을 때 일이다. 소동파는 황주에 도착하자마자 걱정이 태산이었다.

“돈은 부족하고 먹여 살릴 가족은 많은데 큰일이군. 절약만이 살 길이다.”

소동파는 하루 지출 금액을 150문을 넘지 않기로 결심했다. 매월 초가 되면 4,500문을 꺼내 30등분을 해 봉지에 싸서 천장에 매달아 놓았다. 매일 아침 150문이 든 봉지 하나를 꺼내 사용했다. 커다란 대나무통 한 개를 따로 준비해 쓰고 남은 돈을 통 속에 넣었다. 소동파는 그렇게 절약한 돈으로 배부르게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고민했다. 동파는 문인으로서 최고의 경지에 올랐지만 ‘음식’으로도 일가를 이뤘다. 음식을 손수 만들기 좋아하고 미식가로서 이를 소재로 한 시를 많이 남기기도 했다. 그때 동파의 머리를 스친 음식이 있었으니 바로 돼지고기 찜이다.

당시 황주의 돼지고기는 아주 쌌다. 부자들은 먹지 않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먹을 줄 몰랐기 때문이다. 동파는 돼지고기를 껍질째 두껍게 잘라 살짝 삶아 기름에 튀기듯 지져 술, 간장, 설탕, 고추, 대파, 생강으로 만든 양념장을 넣고 조린 뒤 약한 불로 푹 고아내 돼지고기 찜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음식을 주위 사람들과 나누어 먹었다. 동파는 당시 자신과 함께 호수공사에 동원된 인부들이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힘겹게 일하는 모습을 안타깝게 생각해왔던 것이다. 가난한 서민들의 건강과 영양을 위해 소동파가 개발해 낸 이 요리가 바로 중국에서 유명한 ‘동파육’이다.

얼마 안 가 황주의 돼지고기는 중국 전역에 소문이 났고 지역경제는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곳 사람들은 동파육을 비롯해 동파완자, 동파금각, 동파사자두, 동파수구 등 각종 돼지고기 요리에 동파란 이름을 붙여 이웃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과 요리솜씨를 칭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