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이와 유코은 나의 시코토나카마 (동료) 다.
' 아키타 미인' 이란 말이 있듯이 이목구비의 크기와 안면배치가 잘 정돈된 그는
일본의 평범한 아낙이며 나와는 동갑이다.
친구들과 가끔은 호스트바에도 놀러간다는 거침없고 활달한 성격을 가진.
아키타현에서도  산간부쪽이 고향으로 어릴적 겨울이면 1층은 전부 눈에 덮히고
아버지가 이른 새벽부터 2층에서 부터 눈을 치우고 길을 뚫어 동생들을 데리고
스키타고 학교를 다녔고 , 겨울놀이는 눈판에서 스키타고 뒹구는것 뿐이 없었다고
회상한다.   한겨울 지나고나면 지붕에 올라가 눈을 치우다가 떨어져 다쳤거나
죽기도 한 사람이 서너명씩 나왔는데 지금은 눈이 그전처럼 많이 오지도 않고
일본도 마찬가지로 시골에 노인들만 사는 집이 많아서 눈치우러 다니는
전문업자가 있다고 하더라.   (지붕에 눈을 치우지 않으면 집이 무너질 우려도
있고 지붕에서 미끄러져 내린 눈덩이에 지나가는 사람이 다칠수도 있으므로)
열여덟살 전문학교에 다니기 위해 도쿄로 나와 피도 눈물도 없는 도쿄인심에
마음고생도 많이 했지만 스물여섯에 신주쿠의 밥술이나 먹는 야마구치현출신의
남자와 결혼하여 자신 역시 피도 눈물도 없는 도쿄 인간이 되고 말았단다.

5월의 골든위크와 8월의 오봉야스미(추석)엔 네식구가 그녀의 고향 아키타엘 간다.
스므살적 일년에 한번이나 고향에 갈때는 없는 돈을 아끼고 아껴 엄마의 싸구려
부라우스라도 사가면  "역시 도쿄것은 다르다"며 좋아하더니  지금은 만엔짜리도
맘에 안차하는 엄마와  구순이 넘은 할머니가  서로 꿍시렁대고 투닥거리지만
그래도 서로 의지하고 기대면서 살고 계시단다.

지난 8월말 개학을 앞두고 아무래도 고향엘 다녀와야하겠단다.
남편이 바빠서 오봉야스미에 안갔더니 할머니가 자꾸 맘에 걸려서 개학전에
작은애만 델고 며칠 다녀와야겠대.
신칸센을 타고가다 일반열차로 갈아타 고향집 가까운 역에서 내리면 맏누이
온단 기별들은 동생이 마중나올거라더군.
사남매의 맏이인 그가 가면 고양이 맹키로 궁굴게 굽은 허리로 살금살금 움직이시는
아직은 근력이 그만한 할머니가 손녀가 어릴적 즐겨 먹던 맛난 음식을 만들고,
엄마와 딸은  묵은 수다를 떨기에 여념이 없다지.
어렸을 적에도 그랬대.
몸도 실팍치못하고 일하기도  싫어하는 엄마보다는  할머니에게 졸라야 먹을것두
입을것두 생겼대.   여름 한철 물가에서 첨벙일때 입을 옥양목 빤스를 만드는것도
할머니 몫, 운동회에 쓸 오자미를 만드는 것도 할머니의 숙제.
아흔 넘은 지금도 돗보기를 끼고서 조끼도 만들고 덧신도 만드시며.
아침 일찍 일어나 단장하고 불단(선조 신위) 앞에 향을 사르고 기도하시는
메이지 온나 (메이지시대에 태어난 여자) 친정 할머니.
주2회 순회하는 의료차(수송)가 오면 병원에 가서 또래 친구도 만나고
어리광도 치매기도 다 받아주는 젊은 오빠같은 의사선상님을 만나고만 와도
차에서 내려 걸어온는 발걸음이 사뿐사뿐하다나.
병원에서 받아오는 약을 할머니는 온 신경을 곤두세워 분류해 시간 맞춰
먹지만  사실은 그약이 그약인 소화제고 영양제이지  별 약이 아니라고 해서
모두 웃었네.   나이가 병인걸  무슨 약이 있겠어.

나에게도 친정외할머니와 시외할머니의 추억이 있다.
지금은 다 돌아가셨지만
학교 문전에도 가본적 없는 시외할머니는 무섭고 인색하고 부지런한 영감님과
평생 촌의 안팎일에 묻혀 죽어지낸 세월을 사셨다지만 그 여러권 되는 불경을
다 외우시고 사람사는 도리와 안목이 너그럽고 담대하여
내가 중간에서 엮어드려 1986년 뿌리 깊은 나무(샘이 깊은 물인가)에
구술 수기가 실린적도 있어서 돌아가실 때까지 볼때마다 내게 고맙다고 하셨지.
자신의 살아 온 기가 막힌 인생살이를 한번  쯤 털어놓을 기회을 준 것이 고마운것인지,
무지랭이 촌노인의 이야기에  젊은세대가 고개 끄덕여 준것이 고마우셨을까.
어느핸가 여름에 거제도 시외가에 갔더니 뭣인가 두 뭉태기를 우리가방에
재빨리 넣으시더라.   와서보니 금방 빻아다 풀어놓은 미숫가루와 참깨였어.
며느리가 본들 뭐라고야 하랴마는 며느리는 제자식 먼저 주고 싶으셨을게고,
할머니는 멀리서 외할머니 보자고 온 외손자 주고 싶으셨겠지.

내 친정 외할머니
갑오경장 나던 해 서울 초동 대대로 벼슬을 지낸 반가의 고명딸로 태어나,
일본에 다녀오신 부친이 딸도 학교를 보내야 한다는 주장과
"여식을 어디 밖으로 "하는 완고한 할아버지
부자가 사흘간 싸우신 후에 숙명여학교(전 명신여학교 1913년 4회졸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주시경 선생이 조선어선생이었고 이정숙교장선생과
일본인선생들도 여럿 있었는데 다 좋았다고 여러차례 들었다.
동경제국대학을 나온 외할아버지와 그 시절에는 만혼인 스므살에 혼인하셔서
4남매를 두시고 평생 곱게만 사실줄 아셨는데 육이오때 박물관과 다름없던 집이
홀랑 다 타고 그 홧병 일까  육이오지내곤 외할아버지도 돌아가셨대.
막내딸인 울엄마가 시집가 연년생이다시피 다섯을 낳아  모유도 없이 우유로
기르니까 보기 딱해서 늘 우리집에 오셔서 외손주 다 키우셨지.
어린 우리가 밥 먹다 흘리는거 다 줏어담으시며 " 너희들은 턱이 새느냐? " 하셨어.
모두 커서도 우리집에 오셨다 가실때는 우리가 가방을 감추고 신발을 감추고
못가시게 하는 통에 며칠이고 늦어지곤 했던 우리외할머니.


쿠로이와상이 고향에 갔다오면 얼마동안은 향수병을 앓는다.
남편들을 먼저 보낸 고부간이 적적하게 지내는 것도 ,
언제 또 오느냐고 쪼글쪼글 주름진 얼굴에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현관에서
배웅하던 할머니의 모습이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아서.
내년 5월에 오마 고  했지만 아흔 넘은 할머니가 언제까지
아키타 고향집에 기다려주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