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산드라 " 가 뭔말인가 가르쳐 달랬더니
인터넷 뒤져보면 다 나온다고  그런거  묻지말고
새 글이나 하나 올려보라는구만.
기다리는 민중의 눈이 많이 있단  그말이야 빈말인지 알지만서두
" 기다린다 "는 그 말 만은 눈물 고이게 고마워서
비오는 바다라도 건너가고 싶은 마음이야.

감자 송편같이 쫄깃쫄깃한 이바구 한 꼭지 풀려니
이 장마통   탁류 속에 어디가서 뭘 퍼올수가 있나, 따올수가 있나.
헐 수 없이 내 입은 조고리 고름이나 풀어야겠다.
음란소설 쓸거냐구?   그런 생각 하는 사람 너 밖에 읎어야.
내가 음전한 건 세상이 다 아는데.
  
그러니까 몇년 전인가?
서울서 초등 5학년 마친 아들을 델고 일본으로 온게
남편은  몇달 먼저 와 있었구,
사회 초년부터 외국 각지로 나돌은 남편만 같이 있어도 우선 안심이련만
여기 온 다음날 아이를 집 가까운 공립 소학교에 전학시키고
배로 오는 이삿짐이 도착도 하기 전에 미국으로 출장을 가 버렸다.
아이에겐 공부 보담두 애들과 사이좋게 잘 놀면서 빨리
말과 생활을 익히도록 독려한 것이
고3 이 된 이날까지 자신의 숙명적 과제로 알고있어 탈이지만 그럭저럭
걱정없이 제 궤도를 만들어 나가더라구
일마들(이놈아 들 - 남편의 경상도 사투리)보란듯이 공부도 잘  하라는것은
어른의 안달난 마음이고.

문제가 있다면 나.
일년 쯤 개겼어도 말이 생각처럼 쑥쑥 늘지않데.
남편은 허구헌날 외국 출장이구.
자신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으라고 한 말  나는 아직 잊지않고 있었지.
부딪치면 약진까지는 안되도 뭐가 될까 싶어서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한다고 소문을 냈네.
편하고 돈 많이 주는 웬떡인가 싶은 자리가 내 차지일리는 없다고
아예 맘 먹었지.   자국민의 실업이 심각한데
내 차례까지 올 정승같은 자리가 있을리 만무쟎아.
한국인 상대하는 가게라면 좀 쉬울까 몰라도 그런데서 얼쩡거리긴 싫었어.
우선 말이 늘지않고, 한쪽에 밀려 있으면 점점 구석으로
밀어부치는 일본인의 이지메라는 속성을 알고 있기 때문에
허우적거리더라도 본류에 휩쓸리고 싶은 배짱이 있었으니까.

그런덴 유학생들이 발이 넓어서 얼마 후 자기가 저녁에 일하는
레스토랑의 런치타임에 자리가 하나 생겼다며 소개해주까  하더라구.
말은 좀 되는지 , 얼굴은 내놓을만 한지, 면접을 보자고 연락이 왔어.
말도 잘 못하는 주제에 요구는 야무지게
월요일은 일본어 공부가 있어서 안되고,  수요일은 테니스를 쳐야 되니까 안되고
화목금  , 3일간 다섯시간씩 일하겠다고 했지.  못 먹어도 고  에 단련된 우리 아닌감.
우선 2주간만 해  보라고 한게 5년 넘어 6년되어가네.
목사의 아들인  그 유학생아이가 좋은 이미지를 심어놔서 한수 접고 들어갔어도
첨엔  쩔쩔맸지. 손님을 보면 입이 안 떨어지구, 다섯시간 꼬박 서서 일하면 집에 올땐
자전거 페달이 안 밟아진다.   그러면서 말이 조금씩 늘고,
일본 사람들의 생활문화도 익히게 되고.

이사람들은 돈 준 만큼 일도 혹독하게 시키고
또 시간제 아르바이트라도 돈 받은값을 하는덴 철저하고 정직해.
여간해서 속을 내보이지 않는 이 사람들도
오래 같이 일하다 보니 우정도 생기고
고개 조아려 아부할것도 없고 앙앙불락 할 것도 없는 우리끼리의 친분이.

긴 자루같은 일본 열도도 지금은  장마.

오늘같은날은
아구풀이(수다)나 하면 조오케다, 그지?
애 잡는 얘기, 남편 만행 깔구는 얘기,  쥐어 짠 행주 얘기도 조케지만
그 보담두  버릇처럼 한손으론 타이 끝을 돌돌 말며 하던  그 이야기,
분숫가 ,  열일곱살  끼들거리던 그 웃음
밤 늦은 교문을 나설 때의 배고픔,
무서워서  부들부들 떨면서   한번 타 본 그네 ,  오줌이 찔끔 나올 뻔했던
우리의 유치찬란했던 기억들을.

정갈한 내 모국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