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서울의 친구로  부터 메일을 받았어.
시아버님이 폐암 말기로 수술도 포기하고
항암 치료도 1차받고 2차는 컨디션이 안좋아 받지도 못하고 퇴원해
며느리 시중을 받고 계신가 보더군.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렇게라도 효도할 기회가 되니
불행중 다행이라는 말이 이럴때 쓰라고 생긴 말인가 싶게
오만 정성을 다 하는 모양이야.

머리털 검은 짐승으로 태어나 다같이 나이들어 가면서
걔와 난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거야?

작년에  돌아가신 우리 시아버지
병환들어 1년 누워계실때
죽  한번 안 쑤어 드리고
코를 싸쥐고라도 대 소변 한번 받아내 본적도 없으면서
사는 사람이나 편히 살게 빨리 돌아가시지 않는다고
맘속으로 얼마나 졸갑증을 내고,
그 뿐이 아냐
'빨리 돌아가셔야 할텐데'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어.
명분이야 좋지 . '메누리는 멀리 있고
시어머니 근력도 부치는데 애쓰시는것 딱하다고.'
있는 입으로 말이야 을매나 잘해.


작년 3월에 서울에 가야할 일이 있어서 갔다가
팽자팽자 일주일 놀면서도 시가엔 안갔어.
깔끔하기로 유명한 우리어머니가 얼마나 환자를 수시로  씻기고
갈아 입히고  했으련만
시어머니의 전화만 받아도 두엄냄새가  나는것 같은거야.

남편한테 ' 돈 100만엔만 어머니 갖다 드릴까? '라고
운을  띄어 보았더니 1분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러라고 하더군.
처가에 퍼준대도 저럴랑가
천신만고 귀 맞춰놓은 100만엔을 들고와
환전해 보내면서 전화를 했지.
'저 어제 서울 왔어요 (온지 며칠됐지만).
전세 든 사람이 이사간다고 해서 차액도 받고 계약서도  써주고 하려구요.
바빠서 내일 가야 하기 때문에 아버님 못 뵙고 가요.
구좌에 돈 좀 보냈어요. '

싸가지 없는 메누리는 돈으로나 때우고
이슬과 더불어 서울의 밤을 즐기고 놀았지.
메누리한테 또  속는 줄 알면서도
'바쁜데  뭐 할라고 와. 니 온다고 내 일이 주나(줄어드나)?
난 뺀질거리기는 해도 꽁한덴 읎어.

작년 가을에 갔을때는
이번에 가면 단 며칠이라도 어머니와 맞수잡아
씻기고 잡숴드리고 할려고 맘 먹었더니
추석 쇠고는 병원에 입원하셨더라고.
면회가서 아버님의 검불같은 손을 잡고는
귀에 대고 " 저예요. 한원에미가 왔어요" 했더니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떠지지않는 눈을 꿈쩍꿈쩍 하신게
마지막 뵌거였어.
모두가 보름은 더 사실거 같다고 했는데,


면회 갔다 온 다음날 일본에 오려고 서울 올라와
친구들 만나 저녁으로 쟁반 시켜놨는데 돌아가셨다고 연락이 온거야.
그길로 심야버스타고 가면서도
시아버지 부음의 망극지통보다 못 먹고 온 쟁반이 아쉽더라구.
그래도 날날이 같은 메누리는 냉큼 나타났는데,
효자인 아들은  그때 일본 니카타에 지진났을땐데
니카타 옆 토야마에 출장가 있었어.
신칸센 불통, 고속도로 불통, 끊기지 않은 국도로 돌아돌아 오느냐고 갠신히 도착.
충무, 거제에 시 친가,외가 친척이 득실득실하여
아들이 아직 못 왔어도 표도 안나.
울지 마라 울지 마라 힘빠지고 몸 축간다.
다정스런 시고모는 내등을 토닥이셨지만
사실은  별로 운적도 없어
무명 소복일 망정 진솔로 일습 얻어 입으니 그 기분도  괜찮더라구.

그렇게 가시고 인제 몇달됐나?
어머니는 큰 짐 벗고 날라갈것 같으실텐데 안그런가봐.
대동아전쟁 말기 열여섯 나이에 정신대 끌려가는것 면해보려고
업고 있던 막내동생 내려놓고 시집오셔서
육십년 해로하셨어.

반부처이신 우리어머니
허구헌날 앉으면 반 졸아가면서 염불을 외셔.
남은 여생 무슨 복을 더 바라시는지.

"할배요
할짓이 아닙디다
1년에 종쳤으니 망정이지 , 내가 지레 죽을 뻔 했수.
난  자던 잠에 갔스믄 젤로 폔켔지만
먼데서 오는 애들도 있고 허니
사흘만 뉘였다 퍼떡 데불고 가소."

어머니는 "죽는 복" 을 빌고 계신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