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지금 ! ~ 법정 스님~

삶의 질이란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따뜻한 가슴에 있다.
진정한 삶의 질을 누리려면 가슴이
따뜻해야 한다.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마음써야 할 것은  만나는 이웃에게 좀더
친절해지는 것이다. 내가 오늘 어떤 사람을
만났다면 그 사람을 통해서 내 안의 따뜻한
가슴이 전해져야 한다.그래야 만나는 것이다.
따뜻한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친절이야말로  
모든 삶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우리가 보다
더 친절하고 사랑한다면 우주는 그만큼
선한 기운으로 채워질 것이다. 우주는
한정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닫고 옹졸하게 산다면 그만큼
비좁아지고 옹색해진다.마음을
활짝 열고 누군가에게 친절
하고 사랑한다면 그만큼
자기 자신이 선한 기운
으로 활짝 열리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를
기쁘게 해주면
내 자신이 기뻐지고,
누군가를 언짢게 하거나
괴롭히면 내 자신이 괴로워진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메아리이다.  
마음의 뿌리는 하나이기 때문에 그렇다.

행복의 조건은
무엇인가.아름다운
살뜰함과 사랑스러움과
고마움에 있다.나는 향기로운
차 한 잔을 통해서 행복을 느낄 때가 있다.
내 삶의 고마움을 느낄 때가 많다.산길을
지나다가 무심히 피어 있는 한 송이
제비꽃 앞에서도얼마든지 나는
행복할 수 있다.그 꽃을
통해서 하루의 일용할
식을 얻을 수 있다.
또 다정한 친구로
부터 들려오는
목소리,전화
한 통화를
통해서도
나는 행복해진다.
행복은 이처럼 일상적이고
사소한 데 있는 것이지 크고 많은 데
있지 않다.일상적인 경험을 통해서
늘 확인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지구촌에는
나눠 가져야 할 이웃들이 너무도 많다.
절제된 미덕인 청빈은 그 뜻이 나눠
갖는다는 뜻이다.청빈은 그저 맑은
가난이 아니라,그 원뜻은 나눠
가진다는 뜻이다.청빈의 상대
개념은 부가 아니라 탐욕이다.
한자로'탐貪'자는 조개'패'
위에 이제'금' 자이고,
가난할 '빈貧'자는
조개 패 위에
나눌 '분'자이다.
탐욕은 화폐를 거머쥐고
있는 것이고, 가난함은 그것을
나눈다는 뜻이다. 따라서 청빈이란
뜻은 나눠 갖는다는 뜻이다.사람들에게
만일 가난이 없었다면 나눠 가질 줄도
몰랐을 것이다.내가 가난해 봄으로써
우리 이웃의 가난, 어려움에 눈을 돌리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으라.
나는 누구인가.
자신의 속 얼굴이 드러나
보일 때까지 묻고 물어야 한다.
건성으로 묻지 말고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귀 속의 귀에 대고 간절하게
물어야 한다. 해답은 그 물음 속에 들어 있다.
그??묻지 않고는 그 해답을 이끌어낼 수 없다.
나는 누구인가. 거듭거듭 물어야 한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궁색한 빈털터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무소유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때
우리는 보다 홀가분한 삶을 이룰 수가 있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넘치는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이것은
소극적인 생활 태도가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인간은
강물처럼
흐르는 존재이다.
우리들은 지금 이렇게
이 자리에 앉아 있지만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다.늘 변하고 있는 것이다.
날마다 똑같은 사람일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남을
판단할 수 없고 심판할
수가 없다.우리가
누군가에 대해서  
비난을 하고
판단을 한다는
것은 어떤 낡은 자로써,
한 달 전이나 두 달 전 또는
며칠 전의 낡은 자로써 현재의
그 사람을 재려고 하는 것과 같다.
그 사람의 내부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비난은 늘 잘못된 것이기
일쑤이다.우리가 어떤
판단을 내렸을 때
그는 이미
딴사람이
되어 있을 수 있다.
말로 비난하는 버릇을
버려야 우리 안에서 사랑의
능력이 자란다.이 사랑의 능력을
통해 생명과 행복의 싹이 움트게 된다.

화엄경의 『
보살명난품』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듣는 것만으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 수 없다.행하는 것,그것이 도를 구하는,
진리를 구하는 진실한 모습이다.'

듣는 것만으로 이룰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충분히 들었다.이 절 저 절을
다니면서, 또는 이 교회 저 성당을
기웃거리면서  많은 것을 들었다.
그러나 그걸 갖고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듣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그것은 신문이나 잡지
보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문사수 聞思修. 들을`문',생각'
사', 닦을'수'.들었으면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자기 것을
만들어야 한다.스스로
생각하라는 것은
자기를 여과
시키라는 뜻이다.
자신의 체로 걸러 받음이다.
그리고 나서 행하라는 것이다.
그것을 일상에 옮기라는 것이다.

나 자신도
많이 반성하지만,  
신앙인들은 많이 알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그렇게 되면
자기 안이 시끄러워질 뿐이다. 자기
본심대로 사는 것이 최선의 삶이다.
본심.우리의 근본 바탕은 똑같다.  
부처나 보살이나 내 자신이나
똑같다.불성은 똑같은 것이다.  
그러니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말고,듣는 것에 너무 팔리지
말고,자기 본성대로
살아야 한다. 본래
천진한
그 마음을
지키는 것이
으뜸가는 정진이다.금강경에 보면

'법도 오히려 버려야 하는데
하물며 법 아닌 것이랴!'

라는 구절이 있다.
진리도 버려야 할 것인데
하물며 진리 아닌 것이랴!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너무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설령 부처의 말이라 해도, 그건 그
상황에서 그렇게 얘기된 것이다.
오늘 내가 그 얘기를 들었다면
오늘 상황에 맞도록 그와
같이 살라는 것이다.
그 가르침을 통해
오늘의 현실을
살아야 한다.

작은 선이라도
좋으니 하루 한
가지씩 행해야 한다.
작고 미미한 것일지라도.
남이 알아 주지 않을지라도,
그것을 행해야 한다.그것이
내 삶의 질서이다. 하루 한 가지씩
작은 선이라도 행해야 한다. 그 일상적인
행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거듭거듭
일으켜 세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늘 넘어진다. 그것은 이웃을 향한
행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지.  
경전을 많이 봤다고 해서.
법문을 많이 들었다고
해서 행해지는 것은
아니다.우리가
세상을 살아
가면서
하룻동안에
한 가지 착한 일을
듣거나 행할 수 있다면
그날 하루는 헛되이 살지
않고 잘 산 것이다. 참으로
사람의 도리를 다했는가, 하루
한 가지라도 이웃에게 덕이 되는
행동을 했는가 안했는가에 의해서  
그날 하루를 잘 살았는가 못 살았는가를
판가름할 수 있다.여기에서 삶의 의미와
가치가 결정된다. 거듭 말하거니와
작은 선이라도 좋으니 하루 한
가지씩 행해야 한다.그 실행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거듭거듭
일으켜 세워야 한다.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룻동안에 한
지라도 착한
일을 듣거나
행할 수 있다면
그날 하루는 결코
헛되이 살지 않고 잘 산 것이다.
이말을 거듭 명심해야 한다.
진정으로불교를 알려면
불교로부터도 자유
로워져야 한다.

불교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면
진정한 불교를 알 수 없다.
부처에 얽매이면 참부처를 볼수 없고,
보살에 얽매이면 진짜 보살행을 할
수 없다. 참선하는 사람은 오로지
참선만이 전부이고 염불해서는
깨닫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또 염불하는 사람은 염불
만이 오로지 지름길
이며 참선해서는
구제 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자기가 하는 일에
확고한 신념을 갖는 건 좋다.
또 그래야만 한다. 하지만
그것만이 오직 전부라고
고집한다면 전체를
보지 못한다.

인도 고전인
리그 베다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진리는 하나인데
현자들은 여러가지로 말한다.'

기독교적인
사랑과 불교적인
자비는 사실 똑같은
것이다. 사랑은 가볍고
자비는 무거운 것이 아니다.
다만 그 문화적인 배경과 지역적인
특수성에서 다른 표현이 생겨난 것일
뿐이다. 그 말을 통해서 우리의
삶으로 바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지. 말 자체에 집착
하게 되면 뜻은 놓치고
모순에 빠진다.
『열반경』에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말을 따르지 말고 뜻을 따르라.'

우리가 몸으로
움직이는 동작과
입으로 하는 말과 마음으로
하는 생각 모두가 업이 된다.
업이라는 것은 하나의 행위이다.
좋은 업을 쌓으면, 곧 좋은 행동과
좋은 말씨와 좋은 생각을 가지면 좋은
결과가 얻어진다.  좋지 않은 행동이나
말이나 생각을 지니면 어두운 업을 짓게 된다.
이것은 자주 되풀이되다 보면 거기에 힘이
생긴다. 그것을 업력業力 이라고 한다.
또는 업장業障이 되는 것이다.업력이
커지면 이성의 힘으로써 도저히
억제할 수 없는 그런 관성법칙
같은 것이 생겨난다.내 힘으로
어떻게 억제할 수 없는,
자제할 수 없는 그런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업력이라는 것,
업장이라는 것이 그렇다.
우리가 수도하고 또는 수행하는
것은 무엇인가.  업을 맑히는 일이다.

흔히 번뇌를
끊는다거나 욕망을
끊는다고 말한다. 그것은
끊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욕망을 끊는다, 번뇌를 끊는다, 말로는
끊을 것 같지만 끊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단지 질적인 변화가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에너지의
전환이다.  업의 전환이다.
탐욕으로 흐르는 일을
베푸는 일로 전환하는
것이다.또 남을 미워
하고 화내는
에너지는
연민의 정과
자비심으로 전환될
수 있다. 어리석음은
한 생각을 돌이킴으로써
지혜로 전환될 수 있다.내
마음이 지극히 맑고 청순하고
평온할 때 중심이 잡힌다.
내 중심이 잡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온전한 내
마음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중심이
잡히지 않을
때는 늘 흔들린다.
정서가 불안정하다는
것은  중심이 잡히지 않는
것이다.  어느 쪽으로 기울고
있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에 없는 일도 저지
르게 되고불쑥불쑥
한 생각이 천당도
만들고 지옥도
만든다. 따라서
한 생각을 어떻게 갖는가
이것이 갈림길이다.

우리 생애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가장 중요한 것은우리가
이웃에 대해서 따뜻한 마음을
얼마나 가졌는가,또 그 따뜻한 마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아는 일이다.
우리가 이웃에 대해서 한 생애
동안 따뜻한 마음을 얼마나
지녔는가,얼마나 친절히
대했는가, 또한 그
따뜻한 마음의
본질이 무엇
인가를 아는 일이다.
친절과 사랑은 우러나는 것이다.
우리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사랑은 친절과 사랑 안에서 성장한다.
자비를 베풀라. 사랑해라, 여러 말이 있지만
친절하다는 것, 이것이 인간의 미덕이다.
이웃을 기쁘게 해주면 내 자신이 기뻐진다.

이웃을 괴롭히면
내 자신이 괴롭다.
이것이 마음의 메아리이다. 사
랑이 무엇인가. 남녀간의 그렇고
그런 것만이 사랑이 아니다. 동정과
이해심을 지니는 것이다. 나 아닌
타인에게, 내 가족이든 친구이든
남모르는 사람에게까지 동정과
이해심을 지니는 것이다.자연
스럽게 이웃을 돕는 일이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서
거드는 일이다.사랑을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
지극히 일상적이고
사소한 마음씀이다.
낯선 이웃에게
너그러워지는
일이다. 낮선
이웃에게도
우리가 너그럽게
대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따뜻한 미소는 보내는 것, 이것도
사랑이다. 부드럽고 정다운 말씨를
쓰는 것, 이것도 사랑이다. 우리의
마음만 열리면 늘 그렇게 살 수가 있다.

마음이 겹겹으로
닫혀 있기 때문에
그런 씨앗을 내 자신이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걸 펼쳐
보이지 못하는 것이다.너는 너,
나는 나, 그렇게 단절되어서 살고 있다.
바로 이런 일상적인 실천들이 사랑이며
친절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으로서
그 도리를 다하는 것이 친절이고
사랑이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자칫 파괴수단으로 전락한다.
그래서 그 자신까지도
파멸시키고 만다.
명상을 왜 하는가.
본래의 청정한 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선가귀감>은 말하고 있다.

'바른 법을 찾는 것이 곧 바르지 못한 일이다.'

이것을 깊이
새겨둬야 한다.
무엇인가 인위적으로,
억지로 바른 법을 찾느라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바른 법에서
멀어지는 일이라는 것이다.또한 같은
경전은 말하고 있다.

'중생의 마음을
버리려고 할 것 없이
다만 제 성품을 더럽히지 말라.'

억지로
바른 법을
찾으려 하는 것
자체가 이미 바르지 못한 일이다.
오히려 본래의 진실한 마음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따로
부처를 구한다고 해서
그것이 얻어지는
게 아니다.본래
청정한 마음,
진실한 마음을 지키는 것,
이것이 최고의 정진이다.
정진이라는 것이 밤잠을
안 자고 탐구하는 그것이
아니고,본래 청정한 그 마음을
지키는 것,본래 때묻지 않은 맑은
마음을 지키는 것이라고
서산대사는 말하고 있다.

명상은
조용히 지켜보는
일이다.사물의 실상을
조용히 지켜보고 내 내면의
흐름을,내 생각의 실상을 조용히
지켜보는 일이다.안팎으로 지켜
보는 일이다.보리달마는  
'관심일법觀心一法
총섭제행總攝諸行'
이라고 말했다.
'마음을
살피는 이
한 가지 일이
모든 현상을 거둬
들인다.'는 뜻이다.
지식은 기억으로부터 온다.
그러나 지혜는 명상으로부터 온다.
지식은 밖에서 오지만 지혜는
안에서 움튼다.안으로 마음의
흐름을 살피는 일, 우리는
이것을 일과 삼아서
해야 한다.모든 것이
최초의 한 생각에서
싹튼다. 이 최초의
한 생각을
지켜보는 것이 바로 명상이다.
까비르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꽃을 보러
정원으로 가지 말라.
그대 몸 안에 꽃이 만발한
정원이 있다. 거기 연꽃
한 송이가 수천 개의
꽃잎을 안고 있다.
그 수천 개의
꽃잎 위에
앉으라.
수천 개의
그 꽃잎 위에
앉아서정원 안팎으로
가득 피어 있는 아름다움을
보라.'그 아름다움을 묵묵히
지켜보라는 뜻이다.

명상은 안으로
충만해지는 일이다.
안으로 충만해지려면 맑고
투명한 자신의 내면을 무심히
들여다보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다시 말하면, 명상은 본래의 자기로
돌아가는 훈련이다.명상은 절에서,
선방에서만 하는 게 아니다.
마음을 활짝 열기 위해서
겹겹으로 둘러싸인,겹겹
으로 얽혀있는 내
마음을 활짝
열기 위해서
무심히 주시하는 일이다.
과일에 씨앗이 들어 있듯이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하나의
씨앗을 지니고 나온다. 그것을 불성
또는 영성이라고 이름한다. 그 씨앗을
움트게 하고 꽃피우는 것이삶의 의미이고
보람이다. 영성과 불성의 씨앗을 움트게
하고 꽃피우려면먼저 우리의 마음을
맑히는 일이 전제되어야 한다.
흔히 마음을 맑혀라,마음을
비우라는 말을 절에서
많이 한다.
원래 종교적인
세계에서는 지극히
관념적인 그런 말들을 많이 한다.
자기 마음을 맑히라니 어떻게 맑힐 것인가.
마음을 비우라니 어떻게 비울 것인가.
열심히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보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옹졸하고
막혀 있어더 배울 것이 없는
경우가 많다. 관념적인
것을 갖고는 마음이
맑아지지 않는다.
물론 참선이나
염불이나
기도를 지극히
해서 마음을 맑힐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쪽에 불과하다.
자칫하면 관념화되기 쉽다.
현실적으로 선행을 깨야 한다.

선행을
함으로써
저절로 우리들
마음이 열리고 맑아진다.
마치 시절 인연이 와서 연꽃이
피어나듯이 그렇게 맑아진다.
불교에서는 말한다.

'나쁜 짓 하지 말고
착한 일을 두루 하라.
그러면 저절로 그 마음이
맑아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부처들의 가르침이다.법구경에도
나오고 여러 문헌에도 나온다.
그러므로 마음을 맑힌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선을
행한다는 것이다.
내 마음 따로
있고 네 마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은 하나이다.
한 뿌리에서 파생된 가지가
내 마음이고 당신의 마음이다.
불우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가 눈물짓는 것도 그 때문이다.
왜냐하면 같은 뿌리에서 나누어진
한쪽 가지가 그렇게 아파하기
때문에 함께 아파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마음의 메아리이다.  
마음이 맑고 투명
해야 평온과
안정을 갖는다.
마음의 평화로움과
안정이야말로 행복과
자유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나눔이란 무엇인가. 이미 받은
것에 대해 당연히 지불해야 할
보상의 행위이고 감사의 표현이다.

나눔으로써
이 세상을 제대로
건널 수 있다. 육바라밀
가운데 보시 바라밀을 첫째
가는 바라밀이라고 하지 않는가.
바라밀이라는 것은 세상을 사는 일이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는 일.
도달하는 일. 나루는 건너는 일
이다. 다시 말하면 세상을 사는
문제이다.그 중에서도 첫째
가는 것이 나눠 갖는 일.
보시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기쁨을
나누면 그
기쁨은 몇
곱으로 늘어난다.
반대로 괴로움과 슬픔을
나눠 가질 때, 그 괴로움과
슬픔은 몇 곱으로 줄어든다.
나눔에는 이렇듯 미묘한 율동이
따른다.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다.
서로 주고받으면서 이루어진다.
또한 그런관계가 우리들 자신을
만들어간다.

꽂들은 자기
자신과 남을 비교하지 않는다.
매화는 매화의 특성을 지니고 있고,
진달래는 진달래다운 특성을
지니고 있다. 저마다 최선을
다해 피어날 뿐 어느
꽃에게도 비교하지
않는다.비교는
시샘과
열등감을 낳는다.
비교하지 않고 자신답게
자신의 삶에 충실할 때 그는
순수하게 존재할 수 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자기 나름의
삶의 질서가 필요하다.
물건을 사들여 한동안
간직하고 쓰다가 시들해지면
내다 버리고 다시 새것으로 사들이는
이런 소모의 악순환에 사로잡혀 있는
한 내적인 평온이나 맑은 기쁨은 결코
얻을 수 없다.

깨달음에
이르는 데는
오직 두 길이 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을
속속들이 지켜보면서
삶을 거듭거듭 개선하고
심화시켜 가는 명상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다.명상이라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삶을 스스로 늘
지켜보는 일이다.
그 다음은
사랑의 실천이다.
하나는 지혜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자비의 길이다.

이 지혜와
자비의 길을 통해서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지녀온 그 씨앗이,
불성과 영성의 씨앗이 맑고
향기롭게 꽃피어난다. 본래
청정한 우리 마음을  명상과
나눔으로 맑혀야 한다.그래서
우리가 몸담아 사는 세상을,  
그리고 마음을, 그 속에서
의지해 살다가 언젠가는
그 품으로 돌아가  
영원히 안길
자연을 향기롭게 가꿔야 한다.
속박의 굴레에서 우리는
벗어나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명이
요구하는 필수적인
과제이기 때문이다.
타성의 늪에서 떨치고
일어서는 결단이 필요하다.
승려가 아니고, 신부나 수녀가
아닌 사람일지라도 저마다
자기의 일상생활이 있다.
자기의 세계가 있다.
그 일상의 삶으로
터 거듭거듭
떨쳐 버리는
출가의 정신이 필요하다.
머리를 깎고 산이나 절로 가라는
것이 아니라, 비본질적인 것들을
거듭거듭 버리고 떠나는 정신이
소중하다.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출가는
몇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탐욕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자기 그릇 밖의 욕망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둘째는 미움에서 벗어나는
일이다.후세 역사가들이 오늘의
시대를 뭐라고 표현할 것인가.
아마도 증오의 시대라고
기록할 것이다.
서로 믿지
못하고 서로
미워하지 않는가.
어떤 것이 진정한 인간의
조건인가. 그것은 증오가
아니라 사랑이다. 사랑이
충만할 때 그는 비로소 사람이며,
사랑이 메마르고 증오로 가득찰
때는 그는 사람이 아니다.
사랑과 고통은 함께 있다.  
막달라 마리아는 사랑과
고통이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예수가
죽은 날 비로소
알았다고 한다.
사랑과 고통이 포개어져
있음을 비로소 체험한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 역시 포근하고
따뜻한 것인 동시에 그 속에는
아픔이 깃들어 있다.

그것이
자비慈悲 이다.
자애로움과 슬픔이
함께 있는 것이다. 셋째는
무지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를  
불교적인 용어로 바꾸면
무명이다. 밝음이 없다는 뜻이다.

어떤 이유와
인연으로 출가한
구도자가 되었든, 가장
중요한 것은 순간 순간을
사는 일이다.현재의 이 순간
속에서 자신을 불태우는 것,
그것이 곧 출가자의 자세이다.
사람이 불행하다는 것은 다른
의미가 아니다. 마지못한 삶.
순간 순간을 무의미하게
흘려 버리는 삶,
그것이 불행한
삶이다.꽃처럼
거듭거듭 피어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늘
새롭게 피어날 수 있어야 한다.
즐겁게 살되 아무렇게나 살지 말아야
한다. 한 개인의 삶은 그 자신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다산이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다.
'남자는 모름지기 사나운
새나 짐승처럼 사납고 전투적인
기상이 있고 나서,그것을 부드럽게
안으로 다스려  법도에 알맞게 행하면
유용한 인재가 될 수있다.'먼저 사납고
전투적인기상을 갖고 나서,그 다음에
그것을 안으로 부드럽게 다스리라고
충고하고 있는 것이다.또한 다산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사나이의
가슴 속에는 가을 매가 하늘
높이 치솟아오르는 듯한
기상을 품고, 천지를
조그맣게 보고,
우주를 가볍게
손으로 요리할수
있다는 생각을 지녀야 한다.'
무릇 이런 기상을 지니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거죽의 세계에서,
껍데기에서 다 벗어나라.
왜 남에게 의지하고, 타인의
졸개가 되려 하는가.부처라 하더라도,  
성인이라 하더라도 그는 타인일 뿐이다.
그 가르침을 통해서, 그 자취를 통해서
오직 내 길을 갈 수 있어야 한다.
불교는 부처를 믿는 종교가
아니다. 스스로 부처가
되는 길이다.

새로운 부처,
새로운 예수가
필요한 것이지 이
인류에게 똑같은 존재는 필요없다.
임제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수저착주 입처개진 隨處作主
立處皆眞. 언제 어디서나
주체적일 수 있다면,
그 서 있는 곳이
모두 참된
곳이다.'
어디서나
주인 노릇을
하라는 것이다.
소도구로서, 부속품으로서
처신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디서든지 주체적일
수 있다면 그곳이
곧 진리의 세계
라는 뜻이다.
나를 필요로
하는 내삶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내가 몸담고 있고 그 공간에
살아 있기 때문에 내 자신이
주인이 되어야 한다.

그곳이 극락이고
천당이다. 어디서든
당당하게 주인 노릇을
할 수 있어야 한다.타인이
아닌 바로 내 자신이 내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모든 가르침은
약의 처방에 불과하다.
약의 처방은 진정한 약이 아니다.
약의 처방은 병을 낫게 하는
임시 방편일 뿐이다.
약중의 약은 본래의
건강에 눈 뜨는
일이다.생활
습관과 음식
조절, 적절한
침묵 등을 통해서만이
근원적이 치료가 가능하다.
그렇듯 스스로 자기의 삶을
되돌아보면 스스로 알게 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본래 청정.
본래 성불이란 말이 그 뜻이다.
본래의 자기 의식으로 돌아가면
이미 완전한 존재라는 뜻이다.

임제 선사는 또 말한다.

'자로 지금이지  
다시 시절은 없다.
卽是現今 更無時節'
지금이 바로 그때이지  
다른 시절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의 삶과 죽음이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전개되고 있다.
어떤 사람이 불안과 슬픔에 빠져
있다면,그는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시간에 아직도 매달려
있는 것이다. 또 누가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잠 못 이룬
다면,그는 아직 오지도
않은 시간을 가불해서
쓰고 있는 것이다.
과거는 강물처럼
이미 지나가
버렸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과거나 미래 쪽에 한눈을
팔면 현재의 삶이 소멸해 버린다.  
보다 직설적으로 표현하면,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항상 현재일 뿐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다면,
여기에는 삶과 죽음의
두려움도 발 붙일 수
없다.저마다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자기 자신답게 살라!
누구든 자신의 길을 가야 한다.
좋은 제자란 스승을 뛰어넘어야 한다.
그래야 스승에 대한 은혜 갚음이 된다.

여기 한 가지
일화가 있다. 배휴裵休라는 이름의
지방 장관이 새로 부임해 절을
찾아갔다.배휴가 절을 안내
하던 원주에게 어느 영정을
가리키며 물었다.'이
분은 누구십니까?'
원주가 대답했다.
'이 절에서 살다가
돌아가신 큰스님입니다.'
배휴가 말했다.'얼굴은 그
럴듯하군. 그럼 이 큰스님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원주는
대답을 못하고 그 절의 노승인
황벽 선사를 소개했다. 조금전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황벽 선사는
배휴에게 처음부터 다시 물으
라고 말했다.그래서 배휴가
다시 물었다.'얼굴이 그럴
듯한 이 큰스님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이때
황벽 선사가
큰 소리로
'배 장관!'하고
부르자, 배휴는
깜짝놀라 '예!'하고
대답했다. 황벽은 다그쳐 물었다.
'어디 있는가?'과거 사람의 자취를
찾아 물을 것 없이 현재의 너는 지금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이 말 끝에
배휴는 눈이 번쩍 뜨였다.배휴는
이 인연으로 제자가 되어,훗날
황벽 선사의 어록인<전심법요
傳心法要>를 편찬하고
서문을 지었다.그건
그렇고, 이 자리의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지금 내 말을
듣고 있는
그대는 어디 있는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지금이지 그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