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수필]  라일락과 아버지  조 회 42    

어제 퇴근 길에 버스정류장에서 라일락을 보았다.
요즈음 여기저기 라일락이 한창 피어나고 있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닌데 그 보랏빛의 라일락이 나를 어린 시절 우리집 마당으로 안내해 주었다.

아버지는 유난히도 꽃과 나무를 좋아하셨다. 내가 태어나던 해를 기념하여 마당 한 쪽에 심은 개중나무는 한여름 온 동네 사람들의 휴식처가 될 정도로 아름드리 나무로 자랐었다.
복숭아 나무도 있었는데 여름만 되면 아주 못생긴 복숭아를 제법 매달고 있어서 방학을 한 우리들의 좋은 간식거리를 마련해주곤 하였다.
그 외에도 앵두나무가 있었고 가을에는 가지각색의 국화가 마당으로 하나 가득 만발하곤 하였다.

어제 본 보랏빛의 라일락은 우리집 마당에 있던 그것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키에 가지 끝에 매달린 꽃송이들의 모습이...

아마 초등학교 1학년 때였던 것 같다. 어느 날 마당에 새로운 꽃이 눈에 띄었다.
"아버지, 저 꽃 이름은 뭐예요?" 라고 내가 묻자 아버지는
"나이론꽃이란다. 향기가 아주 아름답지."하며 내 손을 잡아 끄셨었다.
그 꽃이 나이론과 발음이 비슷한 라일락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에였다.

버스는 그 정류장을 지나쳐 달려가고 있는데 나는 어린 시절의 아버지의 기억을 따라 하염없이 가고 있었다.

1.4후퇴 때 피난 오셔서 새로운 남한생활에 적응하시느라 얼마나 고생하셨을까?
내가 이렇게 캐나다로 이민와 살아보니 살던 곳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터전을 잡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
더더욱 아버지를 힘들게 한 것은 공부 욕심이 많았던 나의 끊임없는 욕구와 현실과의 타협을 해야하는 아버지와의 사이에서 끊임없는 갈등이었을 것이다.
무능해 보이는 아버지의 그 현실이 싫어서, 그 상황에서 탈출하고 싶어서 아버지에게 상처되는 말들을 무수히도 많이 뱉어대었다.

아버지는 늘 고향 황해도 벽성군을 그리워하셨는데 약주라도 드시는 날에는 고향노래와 반달을 하모니카로 부르시곤 하였다.
음악교육을 정식으로 받아보지도 못한 분이 얼마나 구성지게 하모니커를 연주하시던지...
지금도 그 소리가 내 귓가에 맴돈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부터 인천에서 자라서인지 특별히 고향를 그리워할 일이 없었다. 아버지는 고향 이야기를 자주 하셨고 돌아가시기 전 약간의 치매 증세가 있을 때에는 실제로 가출을 감행(?)하시어 우리를 놀라게도 하셨었다.

그 당시 나는 아버지를 정말로 이해할 수 없었다.
고향이 뭐 그리 그리운 걸까?

그런데 내가 조국을 떠나 이 곳 캐나다에 살게 되면서 그 "고향"의 정체에 대하여 조금씩 깨달아 가고 있다.
휘영청 떠오른 보름달을 보거나 산길을 걷다가 피어난 들꽃을 보아도 한국의 그것들과 비교하는 습관이 생겼다.
길을 가다 한국에서 생산된 차를 보면 나도 모르게 환호성이 나오고 광고에서 한국제품을 선전하던가 뉴스에서 한국에 관련된 것이 나오면 귀가 쫑긋 서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버지는 봄철에 돌아가셨다. 그런데도 국화를 유난히 좋아하셨던 그 기억 때문에 가을에 더 많이 생각나는 분이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내가 아버지 그 분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고, 주고 싶은데 줄 수 없었던 그 아버지의 안타까운 마음을 깨달아 가고 있다.

문득 엊그제 연미사를 지내면서 우리가 그래도 이만큼 적응해서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끊임없는 아버지의 기도 덕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와 자식
늘 아쉬워하며 안타까워하다가 그리움만 남는 사이가 아닐까?


written by 신금재
2004-05-16 오전 11: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