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색계>란 영화를 봤거든. 들어 봤지?
배경이나 내용으로 따지자면 마음 아픈 역사이자 패륜이지.
이쪽 저쪽이 다 무책임하기가 짝이 없고, 무엇보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불쾌한 면이 많은 영화였지.
애초에 게임이 안 되는 상황으로 설정을 해 놓아 긴장된 국면에서도 긴장이 안 될 뿐만 아니라 약간 코믹한 분위기까지 만들어지더라고.

하긴 영화의 초점이 다른 곳에 있었으니.
영화의 주제가 보는 이들과 무관하고 감독의 주관이나 취향 또는 작전이기 때문에 그런 면으로 말한다면 나도 할 말은 없지.
그런데 어쨋든 그 영화의 주제나 방향은 <속상했다>.
아이들에 대한 연민이 더 커서 그랬을 거야. 그리고 그게 가치있는 진실이라고 믿고 싶은 거고.
약해서 한 쪽이 너무나 어설퍼서 그랬을 거야.


근데 말이다.  난 또 그 영화를 보면서 불쾌해 하려고 애썼다는 느낌이 든다.
하필이면 양조위가, 그 예쁜 양조위가 나쁜 놈으로, 아주 비열하고 사악한, 하지만 너무나 우아하고 단정한 모습의 왕짭새로 나와서 더 예쁜 눈빛을 보여 주는 거야.
진짜 연기 잘하더라. 연기처럼 보이지 않던데.(한 번 봐, 교육적(???)야ㅎㅎ)

작은 남자가 아름답다  이런 거 보여주는 대표적인 배우라고 할 수 있지.
양조위는 특별하지 않은 상황도 아주 인상적이고 품격이 있는 풍경으로 만드는 것 같애.
그래서 양조위 나오는 영화를 보고 나오면 늘 마음이 아프더라구.

옛날에 <대부> 볼 때도 나쁜 놈들인데 왜 내가 가슴 아파하고 있지 이런 생각하면서 봤는데.....
마론 브란도를 연민하고, 마이클로 나왔던 알 파치노가 문을 탁 닫을 때 가슴이 찌르르하면서 미쳤나? 말도 안돼! 이랬거든.
영화이기 때문이겠지.
5기에 보면 임경선 언니가 잘 써 놓은 글이 있어.
<色  戒>는 색을 경계한다는 의미야.




며칠 전에 잡지 <한겨레 21>을 보는데 색계를 본 어떤 사람이 <글쎄 노(老), 계(戒)>라는 제목으로 짧은 칼럼을 썼는데 무척 재밌더라.

이 영화와는 전혀 관계없어.
읽어 보렴.


                                                          - 글쎄 노(老), 계(戒) -

▣ 백은하 〈매거진t〉 편집장


당신도 세월을 피해갈 수는 없었군요.
<색, 계>를 보고 극장 문을 나서는 길, 누군가는 애크러배틱에 가까운 섹스신에 감동했을 테고, 누군가는 탕웨이의 은근한 매력에 넋을 잃었겠지만, 내 머리 속은 온통 량차오웨이(양조위)의 얼굴뿐이었다.


그는 많이 늙어 있었다. 이 마흔 여섯 남자의 얼굴에 더해진 주름들과 입가에 파인 골은 그 자체로 한 배우가 살아온 삶의 등고선이었다. 하지만 늘어난 주름 위에는 공평히 그 나이에 걸맞은 품위와 연륜도 더해져 있었다.


그것은 미숙한 어린 남자들이 따라 하려야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중년 남자만의 아름다움이었다.
과거의 량차오웨이와 지금의 량차오웨이가 평행 우주에서 마주친다 해도 젊은 량차오웨이가 되레 질투 어린 시선을 보낼 정도로. 그는 이 순간 그 어느 때보다 ‘예쁘다’.


주말을 지나 노트북을 여니 외국 여행에서 돌아온 어떤 여배우에 관한 보도자료가 도착해 있다.
불혹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20대 같은 미모를 자랑하는 그녀는 10년 전 혹은 20년 전과 다름없는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었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사진 속의 여자는 여전히 길을 걷다 마주치면 목이 돌아갈 만큼 아름다웠고, 그 탄탄한 복근은 꾸준한 노력 없이는 만들어지기 힘든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쩐지 힘겨워 보였다. ‘엉뚱한 쌩얼’이라는 타이틀 아래 한껏 뺨을 부풀린 귀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얼굴은 피로해 보였다.
그녀에게는 여전한 미모와 복근이 있었지만, 그 나이에 걸맞은 품위와 생기는 없었다.
현대 의학의 혜택을 입어 주름 하나 없는 이 여배우의 얼굴엔 그녀가 힘겹게, 혹은 즐겁게 통과해왔을 지난 과거는 사라지고 없었다.


드라마 <인순이는 예쁘다>의 말대로 사람이 ‘예쁘다’는 건 그저 외모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최근 일본 여배우 아오이 유우의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 사진집을 보면서 “아 예쁘다, 너무 예쁘다”라는 말이 연방 흘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사실 한국의 미녀 배우들에 비하면 그다지 미인도 아닌 이 소녀가 왜 이렇게 예쁘게 느껴질까 생각해봤더니, 그건 그 나이가 가지는 미숙함, 풋풋함을 거부하지 않고 건강하게 드러내고 있어서였다. 일부러 어른스러운 척, 섹시한 척, 혹은 4차원인 척하지 않는 그녀의 투명한 태도가, 화장기 없는 얼굴로 잘 웃고, 잘 먹고, 잘 자는 아오이 유우의 얼굴이 지금 이 순간 너무나도 ‘예쁘다’.


물론 늙어간다는 것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하지만 “갓을 씌우지 않은 전등은 딱 질색이에요”라며, 환한 불빛 아래선 차마 늙은 얼굴을 내보이기 싫어했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블랑시처럼 점점 현재의 자신을 숨기고 값비싼 가면만을 덧대려고 한다면 그 삶은 어쩐지 서글프다.


5년 뒤에는 어떻게 변할까


62년생 량차오웨이와 85년생 아오이 유우가 가진 아름다움은 각각 다르지만 또 같다.
그것은 바로 생물학적인 나이를 거부하거나 거스르지 않고 그 안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해낼 줄 아는 현명함이다.
기회도, 행운도, 부도, 명예도 모든 것이 불공평하게 내려진 이 세상에 가장 공평한 사실 하나. 모든 인간은 늙는다는 것이다.


“5년 뒤에도 변치 않을” 얼굴을 위해 오늘을 버리기보다는, 5년 뒤에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를 생각하며 오늘을 살아내야 한다.
세월과 노화라는 거대한 파도에 대항해 지금도 많은 인간들이 안간힘을 쓰며 버티고 있지만, 사실 우리는 안다.
결국엔 인간이 지리라는 것을.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