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간이 개 짖는 소리 외에는 아무 음향도 들려오지 않는 지금 이곳 시각은 자정을 넘기고 있다.… 한국 시각으로는 겨우 9시 밖에 되지 않았지만.
주3회 저녁 시간에 인천공항을 출발하는 대한항공을 타고 남으로 남으로 태평양 상공을 밤새 날아오면 드디어 찬란한 아침 햇살과 더불어 까마득히 구름 저 아래로 한없이 펼쳐지는 푸른 대양 가운데 하얀 파도를 윤곽선으로 하여 점점이 떠있는 군도를 내려다 보게 되는데, 그 신비스런 경관에 빨려들자마자 비행기는 곧 하강하면서 피지공화국의 ‘난디’ 국제 공항 활주로에 내려 앉는다.
두 개의 큰 섬을 비롯해서 3백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그래서 국토를 다 합하면 경상남북도 크기만큼 된다는 이곳 피지에는 멜라네시안과 폴리네시안의 중간이라고 할 피지 원주민 과, 150년 전에 이주한 인도인들의 후손인 인도인들이 각기 절반씩 섞여서 살아가고 있다.
수도인 ‘수바’와 국제 공항 ‘난디’가 있는 남섬에서 대한항공을 내려, 아담한 국제 공항 청사를 가로질러 국내선 쪽으로 가면, 북섬으로 가는 12인승 정도의 경비행기를 탈 수 있다.
‘난디’에서 경비행기를 타면, 눈 아래 펼쳐지는 바다와 산과 들 그 가운데 장난감들처럼 늘어선 집들을 내려다 보는 재미에 비행기의 소음 조차 잊은 채 50분의 시간은 훌쩍 지나가고 비행기는 어느덧 북섬의 중심 도회지라고 할 ‘람바사’라는 소도시에 우리를 내려 놓는다.
1990년 3월에 처음 피지에 발을 디딘 후 수도인 ‘수바’에서의 7년간의 생활과 서울에서의 1년간의 안식년 후 돌아와 1998년부터 살아온 우리 가족의 터전이 바로 여기 ‘람바사’에 있다.

인천교대를 졸업한 후 강원도에 근접한 양평 시골에 발령을 받았고, 인천으로 갑작스런 중간 발령을 받기까지 2년 4개월 동안 내 생애를 규정지을 두 개의 중대한 만남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예수님과 남편이었다.
청천동과 효성동에서 7년 여 동안 교편 생활을 하다가 1986년 7월 사직서를 쓰고 네 살짜리 딸과 함께 셋이서 조국을 떠날 때,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는 줄도 모른 채 단지 ‘별만 쳐다보고 걷는다’는 마음으로 아무런 미련도 서운함도 없이 훌훌 자리를 털고 비행기를 탔다.
그러나 3년간의 호주 생활 후에 아들까지 하나 더해진 우리 가족은 다시 조국으로 돌아 왔는데, 이는 우리를 피지 사람들 섬기라고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선교사 훈련을 받기 위함이었다.

1997년의 1차 안식년 후에 다시 2002년 겨울에 2차 안식년으로 서울에 갔는데, 그 때 말썽부리기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개구장이 만 세 살짜리 쌍둥이 녀석 둘을 우리 아들로 입양했다. 결혼과 선교에의 헌신도 전적인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한 굵직한 사건이었지만, 이 입양 역시도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선택이었기에 우린 또다시 하늘의 별만 쳐다보고 살자는 마음으로 기꺼이 받아 들였다. 이 입양을 전후한 사정이 제법 극적으로 구성되어 “쌍둥이 형제의 크리스마스”라는 제목으로 2002년 크리스마스 날 밤에 KBS 전파를 탔다.
2003년 다시 ‘람바사’로 돌아와 오늘에 이르른 지금, 은행 잔고 없는 부모를 탓하지 않고 제 힘으로 살아온 딸애는 미국으로 공부하러 갔고, 타고난 마린 보이 아들도 부산 해양대로 갔고, 지금 우리 곁엔 우리를 젊게 만들어 주는 건지 아님 더 늙게 만들어 주는 건지 정말 알 수 없는 쌍둥이 녀석 둘이서만 온 집안을 뛰어 다니고 있다.

연애 편지 조차 다 태워버렸다고 남편이 지금까지 불평을 하는데, 과연 지난 이삼십 년 동안 등 뒤의 일들은 돌아보아야 할 의미도 이유도 없다고, 그것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마다하고 애굽으로 돌아가는 일이라고 여기며 오직 앞길을 인도하는 별빛만을 주시하며 가겠다고 고집해 온 내가, 몇 안 되던 어린 시절 친구와의 관계의 끈도 모두 끊어지고 까마득한 옛날 고등학교 몇 회 졸업생이었는지를 기억하지도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숫자를 기억하는 데는 본래가 취약한데다, 지난 20년 간 몸 뿐 아니라 마음까지 동떨어진 곳에서 살아오며 굳이 기억을 해야 할 이유도 전혀 없었기에 그저 십 몇 회라는 정도로만 어렴풋이 생각날 뿐이었는데, 마침내 이삼십 년의 구각을 깨뜨려야 할 현실적 필요가 발생하고야 말았다.
제고 출신인 오빠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받고 있다는 질문, ‘그 유정옥이 네 동생 아니냐?’
LA에 있는 친구(그는 인일을 나오지 않았다)가 하는 말, ‘난 그 유정옥이 꼭 너인 것만 같애.’
그런 소릴 여러 번 들었어도 난 들은 척도 안 하고 있었다.
이곳 피지에도 인터넷이 있긴 있었지만, 모뎀을 사용하는 거북이 속도라서 ‘연결’을 클릭해 놓고는 책상에 엎드려 한참 있다 일어나보면 연결되어 있곤 했다. 인터넷 검색은 커녕 한메일 조차도 화면이 안 뜨고 한없이 정지되어 버리기가 일쑤였기 때문에 난 아예 옵션 중에서도 가장 경제적인 월3시간 짜리를 사용하여 겨우 이메일만 보내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4개월 전이던가, 이 낙후된 ‘람바사’에도 가히 혁명이라 할 변화가 생겼는데 그것은 월45불(미화 30불)에 무제한 고속 인터넷 사용이 가능해 진 것이었다.
‘무제한 고속 인터넷의 사용’이라는 혁명은, 과거라는 대양을 넘어 로빈슨 크루소처럼 살아 왔던 내게 숙제를 내주었는데, 도대체 나랑 이름도 같고 출신학교도 같고 나이도 비슷하다는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주었다는 그 ‘유정옥’을 찾아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유정옥 사모님’을 만났고 그 글들을 읽으며 나는 거기에 빠졌다. 거기에 흠뻑 빠져서, 남편 같으면 백 번도 더 했겠지만 내 성격으론 도저히 안 할 것 같은 일을 했다. 그 ‘유정옥 사모님’에게 국제 전화를 한 것이었다.
황당한 일이었다. ‘유정옥 사모님’에게 인일 몇 회인지를 묻긴 물었는데, 막상 내가 몇 회인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난 12회는 아니지 싶었다. 나보다 열 살 위인 첫째 언니가 3회라는 것은 웬일인지 기억을 하고 다녔는데, 내가 1월생으로 일곱살에 학교에 들어 간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엉뚱하게 나는 그럼 13회인가 보다….13이란 숫자가 웬지 친숙하게 느껴지는걸…. 그러는 동안 정말로 나는 내가 13회라고 믿기에 이르렀으니, 나이 탓으로 돌리기엔 좀 심한 증상이었다.
‘유정옥 사모님’이 12회라기에 그럼 나보다 한 해 선배인가 보다 했다.
그럼 그렇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내가 학교 다닐 때 나랑 같은 이름의 친구가 있었던 기억은 없거든.
‘유정옥 사모님’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이메일을 보냈고, 고맙게도 즉각적인 회신을 받았지만, ‘유정옥 사모님’도 행여나 내가 같은 층을 쓰던 동기 동창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안 한 것 같다.
학교 다닐 때 같은 반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으니까.
더구나 내가 ‘난 13회예요’라는 말까지 하니까 말이다.

‘잘한 짓인지 못한 짓인지….’라는 제목의 이메일이 둘째 언니로부터 날아온 것은 얼마 전이었다.
엠펙(mpak)-‘한국 입양 홍보회-이라는 싸이트에 우리집 입양일기 쓰는 자리가 있어서 아주 가끔씩 글을 올리곤 했는데, ‘진짜 유정옥, 가짜 유정옥’이라는 제목으로 6월에 글을 올렸었다. 그런데 언니가 나의 허락도 없이(?) 그 글을 인일동창회 게시판에 올렸다고, 그리고 네 친구들의 댓글도 있다고, 그리고 댓글을 통해 볼 때 ‘유정옥 사모님’은 너랑 동기인 것 같다고 통보해 주는 메일이었다.
인일여고 동창회? 그런 것이 있었나?
안 열어 볼 수가 없었다.
댓글을 올린 친구들의 이름이 전혀 낯설게 다가왔다. 얘들이 다 누구지? 난 도무지 모르겠는데….? 기억의 선반 위에 먼지가 얼마나 두텁게 쌓였는지 털어도 털어도 그 실체는 좀처럼 드러날 줄을 몰랐다.
친구들의 사진을 열어 보았다. 보고 또 보고 또다시 보았다.
‘평화, 평화, 평화를 주소서.’라는 귀절로 끝나는 ‘신의 어린 양’ (김 혜숙 지휘로 합창 대회 때 불렀던 곡)의 장엄한 음율을 배경으로 기억의 저 깊은 물밑에서 서서히 옛생각이 부상하기 시작하자, 내가 ‘류정옥’이었을 때, ‘유정옥’이라는 이름의 친구가 어느 반인가 있었던 것이 아주 어렴풋이 생각났다.

매일 저녁 연습에 연습을 반복한 결과 -‘Practice makes perfect.’- 세월의 분장술을 걸러내고 삼십 여년 전의 그들의 얼굴을 복원해 내는 휠터링에 점점 익숙해져 갔다.
또한 나는 다음 단계로서, 그들의 ‘과거’가 아닌 ‘현재’의 모습에 내 자신을 적응시키는 연습을 반복하고 반복했다.
왼쪽엔 삼십년 전의 얼굴을, 오른쪽엔 지금의 얼굴을 놓고 두 얼굴이 서로를 향해 다가가 마침내 오버랩 되기까지, 그들의 사진을 보며 무수히 연습했다.
그들의 얼굴은, 내가 더 이상 돌아보고자 하지 않았던 내 등 뒤의 얼굴에서,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내 앞의 얼굴로 이제 전환되기 시작했다.

나는 이 자리를 빌어 다시금 ‘유정옥 사모님’에게 감사하고 싶다.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삶에 그토록 진지하고 충직해 온 그녀의 신실함이 아니었다면, 아무도 이 유정옥에게 ‘그 유정옥을 아느냐’고 묻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내게 이 수수께끼 같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무리 고속 인터넷이 설치되었더라도 ‘그 유정옥’을 찾아 보진 않았을 것이다.
‘그 유정옥’을 찾아 봄으로 인해 충격과 도전을 받은 내가 쓴 고백의 글을 언니가 동창회 게시판에 올리지 않았다면 나는 그 싸이트에 들어가 볼 생각을 도무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일 홈페이지에서 만난 얼굴과 글들이 아니었다면 나의 자연적이며 또한 의도적이었던 기억상실은 치유될 길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캐스트 어웨이’ –내 사는 이곳에선 ‘카스터웨이’라고 말해야 남들이 알아들을 게다-라는 영화가 있었다.
국제 특급 소포 배달 회사의 간부인 톰 행크스가 비행기 사고로 바다에 떨어져 무인도에 닿게 되고, 인간이라곤 전혀 없는 그곳에서 생존하기 위해 처절한 노력을 하게 된다. 비행기에서 떨어진 배달품 윌슨 배구공을 사람의 얼굴로 친구 삼고, 고독을 못 이겨 죽으려 하나 죽기마저 포기하고, 숱한 고난 후에 뗏목을 만들어 죽기를 각오하고 험난한 대양으로 나아가 바람과 파도를 이기려 싸우고 싸우다 마침내 지쳐 혼절하나 그 죽음의 문턱에서 지나가던 화물선에 의해 구조된다.
긴 세월 후에 자기 자리로 돌아오고 보니, 결혼을 앞두고 있었던 사랑스런 약혼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 그 긴 절대 고독의 세월동안 생존에 의미를 부여해 주었던 그녀를 놓아주어야만 하는 주인공의 심정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이 영화는 실제로 이곳 피지에서 촬영되었다.
지금 내가 사는 곳이 그렇게 거친 대양이나 무인도와 같은 환경은 물론 아니다. (혹자는 우리 집 앞마당이 파도가 부서지는 모래 해변일 것으로 상상하기도 한다지만)
그리고 내가 그렇게 길고 험난한 세월을 홀로 살아온 것도 물론 아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등 뒤로 돌리고 오직 오늘을 살아내기 위해서 치열하게 씨름했던 사람이 과거의 문명 세계로 귀환했을 때 어떤 마음일 것인지를 나는 요즘 아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려움이 많았을텐데도-무엇이나 그렇듯 특히 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