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거기가 <세솟가>인 줄 알았다.

넓은 창 밖으로 끝없는 녹차밭과 서귀포 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제주 다원>의 주인 여자가
제주에서 가 볼만한, 아직 사람의 손을 많이 타지 않은 원시적인 느낌이 짙은 곳이라며
우리 가족에게 강력 추천하는 곳의 지명이 너무도 이상해서 도무지 단번에 받아 적을 수가 없었다.
몇 번을 고쳐 물어 본 후에 나름대로 유추해석을 하여 받아 적은 지명이 <세솟가>였다.

자동차에 부착되어 있는 네비게이션에다 아무리 검색을 해 보아도 그런 곳은 없다고 나왔다.
여자는 분명 서귀포에서 남원 쪽으로 가는 길에 있다고 했는데 네비게이션으로는 검색이 안되는 것을 보니
내가 유추해 낸 지명이 틀린것 같아서 <세속가><새솟가><새속각><새솟각>등 여러 낱말을 넣어 보았다.
여전히 결과는 <그런 곳 없음>이었다.

나랑 아들이 네비게이션과 씨름하는 사이 남편이 렌트카 회사에서 준 관광 가이드북을 뒤적이더니 드디어 찾아냈다.
- 이런...쇠소깍이네. 이름도 괴상하기 짝이 없군.


그렇게 생소한 이름을 지닌 그곳은 아마 골짜기 깊은 산등성이쯤 되겠구나 짐작을 하고
이정표를 따라 가니 골짜기 깊은 산은커녕 아주 평범하고 초라한 바닷가 마을을 끼고 돌아가는 길을 만났다.
포장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깨끗한 아스팔트 길이 너무도 인위적이어서
이런 곳을 두고 사람의 손이 타지 않은 원시적인 곳이라고 추천을 해 준 찻집 여자가 은근히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래도 이왕 온 길이니 차에서 내려 이리저리 살펴 보았다.

집도 인적도 없이 황량하기 짝이없는 길의 오른쪽에 나무로 만든 계단 입구가 보였다.
몇 계단을 내려가니 옆으로 꺾어져 계단이 연결되는 계단참이 나오는데 그만 내 입이 쩍 벌어지고 말았다.
바다가 거기 숨어 있었다 !
아니 정확하게 표현을 하자면 오목하게 들어 앉은 용소의 입구가 터져 있고
거대한 몸집의 바다가 그리로 들어오려고 안깐힘을 쓰는 것처럼 보였다.
미친듯이 파도가 치고 있는 입구와는 달리 안쪽의 물은 고요하기 그지 없었다.
얼핏 보니 병풍처럼 둘러 싸고 있는 기암괴석의 옹위를 받으며 유유자적하는 선비처럼 고요히 흐르는  
짙은 에메랄드 빛깔의 물길이 끝도 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다.
세상에....이런 풍광은 태어나서 처음 보았다.
산이 깊은 곳은 바다가 없고 파도가 치는 곳에는 계곡이 없기 마련인데 여기는 둘이 공존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계단을 다 내려가 물가에 다다랐을 때 대나무를 엮어 만든 배가 한 척 들어왔다.
관광객들을 태우고 바위 병풍이 있는 곳까지 휭 ~ 돌아 오는 미니 유람선이었다.
1인당 5000원씩 받고 태워주는데 노를 젓지 않고 물 위에 얼기설기 매어 놓은 줄을 당겨서 움직이게 해 놓았다.

"이 배는 우리 마을 청년회에서 운영을 하는건데 마침 오늘 저녁에 회합이 있어서 제가 가야하거든요."

우리가 태워달라고 하자 사공이 아주 미안한 얼굴로 길게 변명을 늘어 놓으며 거절을 했다.
한바퀴를 돌아 오는데 30분 정도 걸리는 작은 유람선을 눈 앞에서 보기만 하고 그냥 오기가 너무 서운해서
그저 타고 사진이라도 찍고싶다고 했더니 쾌히 승락을 하고는 시키지도 않은 말을 주섬주섬 하기 시작했다.

<쇠소깍>이란 이름은 위에서 내려다 보면 소가 길게 누워 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 용소가 시작되는 곳이라는 뜻으로
이 곳의 물은 한라산에서 발원한 물이 내려와 모여 있는 것이라고 했다.
용소의 입구가 틔어 있어서 만조 때는 바닷물이 들어와 용소의 수위가 올라가고 간조 때는 다시 낮아져
배를 타는 위치도 달라진다고 했다.
용소의 깊이는 대략 6m 정도로 산에서 내려온 물이 곧장 바다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고 했다.


민물과 짠물이 아무런 저항없이 만나고 섞여지기도 하는 곳.
시커먼 제주도의 바위들과는 조금 다른 회색 기암괴석이 깊은 물의 운치를 더해주는 곳.
어디선가 12선녀가 목욕을 마치고 하늘로 날아 오를 것같은 은밀한 곳.
산에서 내려 온 물이 거침없이 바다로 나아가듯이 내 품에서 자란 아들도 세상을 향해 떠나 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던 곳.
<쇠소깍>은 그런 곳이었다.

나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경관이 너무 아름다운 곳에서는 내 짧은 언어가 부끄러워서 그랬기도 하지만
가슴 깊은 곳에다 이 곳의 물을 담고 바위를 담고 파도를 담고 나의 깨달음을 담아 저장하느라고...


내가 워낙 제주를 좋아하여 어느 곳 하나 버릴 경치가 없다고 여기고 있기는 하지만
이번 휴가 길에 찾아낸 쇠소깍은 정말 우연히 캐게 된 노다지였다.
아직 많은 사람들에게 시달리지 않은 원시적인 모습이라던 찻집 여자의 말에 나도 동의 하였고....
게다가 수영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뱃전에 바짝 붙어서 수영을 하며 용소를 한바퀴 돌아 올 수도 있는
아담하고 특이한 풍광을 찾아 나는 또 제주에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