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6.25를 기억하는 사람도 별로 없지만
50년대 후반에 태어나 전후의 폐허 속에서 유년기를 보낸 세대들은
아직도 오래 된 흉터처럼 그 가난과 고통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

내가 태어난 곳은 인천의 피난민 수용소였다.
월남 실향민들이 아무렇게나 판잣집을 짓고 살던 그 동네에 아이는 어찌 그리도 많았던지
초등학교는 교실이 부족해서 4학년 까지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했다.
한 반에 70명도 넘는 아이들이 콩나물 시루같은 교실에서
선풍기 없이 한여름을 났고, 변변히 난로조차 따뜻하게 피우지 못하고도 겨울도 이겼다.
어쩌다 미군 찌프차를 만나면 아이들이 다투어 손을 내밀고 따라다녔다.
김미 껌 오케이?
쬬꼬레또 오케이?

수도국산에서는 매일 꿀꿀이죽 배급을 주었다.
운이 좋으면 닭다리가 걸릴 수도 있고 재수 없으면 담배꽁초가 나오기도 하는 꿀꿀이죽을 얻으려고
날마다 사람들이 그릇을 들고 장사진을 쳤다.
꿀꿀이죽이란 미군부대에서 버리는 음식 찌꺼기를 한 데 모아서 끓인 것이었다.

사람들은 살아 남기 위해서 정말로 악착을 떨었다.
방직공장으로 들어가는 솜을 실은 트럭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무작정 트럭 뒤에 달라 붙어서 솜을 뜯어내 던졌다.
그렇게 모은 솜으로 이불도 만들고 두툼한 겨울옷도 만들었다.
그것도 몸이 재고 다리가 튼튼한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일이었다.

물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어서
무엇이든지 귀하고 소중했다.
아이들이 쓸 학용품도 물론 귀했다.
연필 한다스는 아이를 재벌로 만들 수 있는 재산이었다.
연필이 다 닳아서 손에 쥘 수 없으면 볼펜 깍지에 끼워서 썼다.
볼펜은 아주 귀한 것이어서 어른들이나 쓸 수 있는 것이었다.

아이들의 옷은 무조건 질긴 것이 최고였다.
그래도 뭉턱뭉턱 무릎이 나가고 팔꿈치가 헤어져 헝겊을 덧대어 기워 입었다.
새 운동화를 사면 아까워서 손에 들고 맨발로 걸어 다니기도 했다.

컴퓨터, 휴대폰은 고사하고 라디오조차 귀하던 시절에 장난감이 따로 있었으랴.
여자 애들은 소꿉놀이를 하기 위해서 병 뚜껑을 모았다.
미군부대에서 흘러 나온 콜라나 맥주 병의 뚜껑은 아주 훌륭한 그릇이 되었다.
동그란 양철 조각을 오목하게 해서 끄트머리에 주름을 잡아 놓은 뚜껑을 <땐소꼽>이라고 불렀다.
땐소꼽은 물도 담을 수 있고 깨지지도 않아서 살림하기엔 정말 최고였다.
골목에 쪼그리고 앉아서 흙으로 밥을 하고 풀 뜯어다 김치를 담았다.
고춧가루는 어렵사리 구한 벽돌 조각을 곱게 갈아서 만들었다.

재래식 화장실은 아무리 치운다고 해도 언제나 더럽고 냄새가 났다.
제 때에 퍼내지 못하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여름엔 파리가 들어가서 난장판을 벌여놓는 바람에 간이 작은 아이들은 들어갈 엄두도 못내고 울었다.

화장지도 따로 있을리가 없었다.
신문지나 공책 다 쓴 것을 손바닥 만하게 잘라서 쓰거나
누런 시멘트 종이를 마구 비벼서 부드럽게 만들어 가지고 썼다.
얇은 습자지로 된 매일 뜯어내는 달력이 최고로 좋은 것이었지만 흔치 않았다.

그 때는 자가용은커녕 도로에서 차를 보는 일도 귀했다.
경찰서 서장이나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들을 빼고는 다 걸어다녔다.
처음 시내버스가 생긴 것도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이었던 것 같다.
송림동에서 동인천역까지는 걸어다니는 것이 예사였다.

그리고 밤 12시가 되면 통행금지 사이렌이 불었다.
12시가 되면 무슨 신데렐라가 된양 차도 사람도 다 멈추어야 했다.  

모든 것이 다 넉넉지 않았기에 각박했고 치열했던 시절, 그것이 60년대 초반이었다.
나는 그 때 서림국민학교 학생이었고...


희한한 것은, 그런 속에서도 아이들은 꿈을 꾸었다.
그 때 아이들의 꿈이 있었기에
겨우 50년도 안되었지만 그 때의 일을 선사시대 사건인양
이렇게 컴퓨터 앞에 앉아서 차를 마시며 느긋하게 회상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뒤를 돌아보는 이는 늙은이라던데...
그래도 6.25가 다가오니 한번쯤은 돌아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