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수 2,306
지금은 6.25를 기억하는 사람도 별로 없지만
50년대 후반에 태어나 전후의 폐허 속에서 유년기를 보낸 세대들은
아직도 오래 된 흉터처럼 그 가난과 고통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
내가 태어난 곳은 인천의 피난민 수용소였다.
월남 실향민들이 아무렇게나 판잣집을 짓고 살던 그 동네에 아이는 어찌 그리도 많았던지
초등학교는 교실이 부족해서 4학년 까지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했다.
한 반에 70명도 넘는 아이들이 콩나물 시루같은 교실에서
선풍기 없이 한여름을 났고, 변변히 난로조차 따뜻하게 피우지 못하고도 겨울도 이겼다.
어쩌다 미군 찌프차를 만나면 아이들이 다투어 손을 내밀고 따라다녔다.
김미 껌 오케이?
쬬꼬레또 오케이?
수도국산에서는 매일 꿀꿀이죽 배급을 주었다.
운이 좋으면 닭다리가 걸릴 수도 있고 재수 없으면 담배꽁초가 나오기도 하는 꿀꿀이죽을 얻으려고
날마다 사람들이 그릇을 들고 장사진을 쳤다.
꿀꿀이죽이란 미군부대에서 버리는 음식 찌꺼기를 한 데 모아서 끓인 것이었다.
사람들은 살아 남기 위해서 정말로 악착을 떨었다.
방직공장으로 들어가는 솜을 실은 트럭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무작정 트럭 뒤에 달라 붙어서 솜을 뜯어내 던졌다.
그렇게 모은 솜으로 이불도 만들고 두툼한 겨울옷도 만들었다.
그것도 몸이 재고 다리가 튼튼한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일이었다.
물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어서
무엇이든지 귀하고 소중했다.
아이들이 쓸 학용품도 물론 귀했다.
연필 한다스는 아이를 재벌로 만들 수 있는 재산이었다.
연필이 다 닳아서 손에 쥘 수 없으면 볼펜 깍지에 끼워서 썼다.
볼펜은 아주 귀한 것이어서 어른들이나 쓸 수 있는 것이었다.
아이들의 옷은 무조건 질긴 것이 최고였다.
그래도 뭉턱뭉턱 무릎이 나가고 팔꿈치가 헤어져 헝겊을 덧대어 기워 입었다.
새 운동화를 사면 아까워서 손에 들고 맨발로 걸어 다니기도 했다.
컴퓨터, 휴대폰은 고사하고 라디오조차 귀하던 시절에 장난감이 따로 있었으랴.
여자 애들은 소꿉놀이를 하기 위해서 병 뚜껑을 모았다.
미군부대에서 흘러 나온 콜라나 맥주 병의 뚜껑은 아주 훌륭한 그릇이 되었다.
동그란 양철 조각을 오목하게 해서 끄트머리에 주름을 잡아 놓은 뚜껑을 <땐소꼽>이라고 불렀다.
땐소꼽은 물도 담을 수 있고 깨지지도 않아서 살림하기엔 정말 최고였다.
골목에 쪼그리고 앉아서 흙으로 밥을 하고 풀 뜯어다 김치를 담았다.
고춧가루는 어렵사리 구한 벽돌 조각을 곱게 갈아서 만들었다.
재래식 화장실은 아무리 치운다고 해도 언제나 더럽고 냄새가 났다.
제 때에 퍼내지 못하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여름엔 파리가 들어가서 난장판을 벌여놓는 바람에 간이 작은 아이들은 들어갈 엄두도 못내고 울었다.
화장지도 따로 있을리가 없었다.
신문지나 공책 다 쓴 것을 손바닥 만하게 잘라서 쓰거나
누런 시멘트 종이를 마구 비벼서 부드럽게 만들어 가지고 썼다.
얇은 습자지로 된 매일 뜯어내는 달력이 최고로 좋은 것이었지만 흔치 않았다.
그 때는 자가용은커녕 도로에서 차를 보는 일도 귀했다.
경찰서 서장이나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들을 빼고는 다 걸어다녔다.
처음 시내버스가 생긴 것도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이었던 것 같다.
송림동에서 동인천역까지는 걸어다니는 것이 예사였다.
그리고 밤 12시가 되면 통행금지 사이렌이 불었다.
12시가 되면 무슨 신데렐라가 된양 차도 사람도 다 멈추어야 했다.
모든 것이 다 넉넉지 않았기에 각박했고 치열했던 시절, 그것이 60년대 초반이었다.
나는 그 때 서림국민학교 학생이었고...
희한한 것은, 그런 속에서도 아이들은 꿈을 꾸었다.
그 때 아이들의 꿈이 있었기에
겨우 50년도 안되었지만 그 때의 일을 선사시대 사건인양
이렇게 컴퓨터 앞에 앉아서 차를 마시며 느긋하게 회상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뒤를 돌아보는 이는 늙은이라던데...
그래도 6.25가 다가오니 한번쯤은 돌아보고 싶었다.
50년대 후반에 태어나 전후의 폐허 속에서 유년기를 보낸 세대들은
아직도 오래 된 흉터처럼 그 가난과 고통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
내가 태어난 곳은 인천의 피난민 수용소였다.
월남 실향민들이 아무렇게나 판잣집을 짓고 살던 그 동네에 아이는 어찌 그리도 많았던지
초등학교는 교실이 부족해서 4학년 까지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했다.
한 반에 70명도 넘는 아이들이 콩나물 시루같은 교실에서
선풍기 없이 한여름을 났고, 변변히 난로조차 따뜻하게 피우지 못하고도 겨울도 이겼다.
어쩌다 미군 찌프차를 만나면 아이들이 다투어 손을 내밀고 따라다녔다.
김미 껌 오케이?
쬬꼬레또 오케이?
수도국산에서는 매일 꿀꿀이죽 배급을 주었다.
운이 좋으면 닭다리가 걸릴 수도 있고 재수 없으면 담배꽁초가 나오기도 하는 꿀꿀이죽을 얻으려고
날마다 사람들이 그릇을 들고 장사진을 쳤다.
꿀꿀이죽이란 미군부대에서 버리는 음식 찌꺼기를 한 데 모아서 끓인 것이었다.
사람들은 살아 남기 위해서 정말로 악착을 떨었다.
방직공장으로 들어가는 솜을 실은 트럭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무작정 트럭 뒤에 달라 붙어서 솜을 뜯어내 던졌다.
그렇게 모은 솜으로 이불도 만들고 두툼한 겨울옷도 만들었다.
그것도 몸이 재고 다리가 튼튼한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일이었다.
물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어서
무엇이든지 귀하고 소중했다.
아이들이 쓸 학용품도 물론 귀했다.
연필 한다스는 아이를 재벌로 만들 수 있는 재산이었다.
연필이 다 닳아서 손에 쥘 수 없으면 볼펜 깍지에 끼워서 썼다.
볼펜은 아주 귀한 것이어서 어른들이나 쓸 수 있는 것이었다.
아이들의 옷은 무조건 질긴 것이 최고였다.
그래도 뭉턱뭉턱 무릎이 나가고 팔꿈치가 헤어져 헝겊을 덧대어 기워 입었다.
새 운동화를 사면 아까워서 손에 들고 맨발로 걸어 다니기도 했다.
컴퓨터, 휴대폰은 고사하고 라디오조차 귀하던 시절에 장난감이 따로 있었으랴.
여자 애들은 소꿉놀이를 하기 위해서 병 뚜껑을 모았다.
미군부대에서 흘러 나온 콜라나 맥주 병의 뚜껑은 아주 훌륭한 그릇이 되었다.
동그란 양철 조각을 오목하게 해서 끄트머리에 주름을 잡아 놓은 뚜껑을 <땐소꼽>이라고 불렀다.
땐소꼽은 물도 담을 수 있고 깨지지도 않아서 살림하기엔 정말 최고였다.
골목에 쪼그리고 앉아서 흙으로 밥을 하고 풀 뜯어다 김치를 담았다.
고춧가루는 어렵사리 구한 벽돌 조각을 곱게 갈아서 만들었다.
재래식 화장실은 아무리 치운다고 해도 언제나 더럽고 냄새가 났다.
제 때에 퍼내지 못하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여름엔 파리가 들어가서 난장판을 벌여놓는 바람에 간이 작은 아이들은 들어갈 엄두도 못내고 울었다.
화장지도 따로 있을리가 없었다.
신문지나 공책 다 쓴 것을 손바닥 만하게 잘라서 쓰거나
누런 시멘트 종이를 마구 비벼서 부드럽게 만들어 가지고 썼다.
얇은 습자지로 된 매일 뜯어내는 달력이 최고로 좋은 것이었지만 흔치 않았다.
그 때는 자가용은커녕 도로에서 차를 보는 일도 귀했다.
경찰서 서장이나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들을 빼고는 다 걸어다녔다.
처음 시내버스가 생긴 것도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이었던 것 같다.
송림동에서 동인천역까지는 걸어다니는 것이 예사였다.
그리고 밤 12시가 되면 통행금지 사이렌이 불었다.
12시가 되면 무슨 신데렐라가 된양 차도 사람도 다 멈추어야 했다.
모든 것이 다 넉넉지 않았기에 각박했고 치열했던 시절, 그것이 60년대 초반이었다.
나는 그 때 서림국민학교 학생이었고...
희한한 것은, 그런 속에서도 아이들은 꿈을 꾸었다.
그 때 아이들의 꿈이 있었기에
겨우 50년도 안되었지만 그 때의 일을 선사시대 사건인양
이렇게 컴퓨터 앞에 앉아서 차를 마시며 느긋하게 회상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뒤를 돌아보는 이는 늙은이라던데...
그래도 6.25가 다가오니 한번쯤은 돌아보고 싶었다.
2006.06.19 18:14:58 (*.234.131.250)
찬정아 ~
내가 원래 좀 잔망스런 계집애였잖니.
내 기억의 상당부분은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의 것이야.
멀찌감치서 눈만 빼꼼히 뜨고 바라보았던 것들...
내가 원래 좀 잔망스런 계집애였잖니.
내 기억의 상당부분은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의 것이야.
멀찌감치서 눈만 빼꼼히 뜨고 바라보았던 것들...
2006.06.19 19:09:21 (*.183.209.241)
<가난도 지나도 보니 추억이 되네 ....>
지나고 보니 아녀?::p ㅋㅋ
어린것들이 뭘 그렇게 가난했다고....
난 아무 생각도 안나는구만,
고저 울엄니 풀빵 굽던 생각만 나두만
신흥학교 근처에선 그런것 한번두 못본것 같어.
빨강색 사루마다 입고 총채들고 울동네를 휩쓸던 생각만 나네...ㅋㅋㅋ ;:)
지나고 보니 아녀?::p ㅋㅋ
어린것들이 뭘 그렇게 가난했다고....
난 아무 생각도 안나는구만,
고저 울엄니 풀빵 굽던 생각만 나두만
신흥학교 근처에선 그런것 한번두 못본것 같어.
빨강색 사루마다 입고 총채들고 울동네를 휩쓸던 생각만 나네...ㅋㅋㅋ ;:)
2006.06.19 20:27:40 (*.82.100.36)
순호언니 나도 언니 같애요
그때는 그것이 가난인줄 몰랐는데....
춘선이가 말한것 반쯤 기억이 나나?
그런데 미군 얘기 하는 부분..
저는 부평에서 살았는데
말하자면 기지촌
길에 나가면 반은 미군이었고
또 여자들의 반은 양색시였고
아버지들의 직업은 대부분
미군부대에서 근무하는 그런 동네였는데
내 기억으론 미군들에게 손을 벌리는
그런 친구들이 없엇다는거...
다 잊어 버렸나?
실제로 영화에 자주 나오는 그런 장면 못 봤는데...
그때는 그것이 가난인줄 몰랐는데....
춘선이가 말한것 반쯤 기억이 나나?
그런데 미군 얘기 하는 부분..
저는 부평에서 살았는데
말하자면 기지촌
길에 나가면 반은 미군이었고
또 여자들의 반은 양색시였고
아버지들의 직업은 대부분
미군부대에서 근무하는 그런 동네였는데
내 기억으론 미군들에게 손을 벌리는
그런 친구들이 없엇다는거...
다 잊어 버렸나?
실제로 영화에 자주 나오는 그런 장면 못 봤는데...
2006.06.19 21:17:24 (*.44.112.94)
온니, 전 누구보다 힘들게 지냈을 것이구먼
춘선이가 얘길하니 아 그랬었나?
하는 심보는 뭘까요?
잊어버리고 싶은 맘이 더 커서일까,
아님 부모님이 모든 희생을 감내하시며 절대로 내색을 하시지 않으셔서 일까요?
우찌 됐든 우리의 춘선양 대단하십니다.
춘선아 니는 책한권 얼릉 내라
이 온니가 판매책 쫄따구 할테니끼니.
춘선이가 얘길하니 아 그랬었나?
하는 심보는 뭘까요?
잊어버리고 싶은 맘이 더 커서일까,
아님 부모님이 모든 희생을 감내하시며 절대로 내색을 하시지 않으셔서 일까요?
우찌 됐든 우리의 춘선양 대단하십니다.
춘선아 니는 책한권 얼릉 내라
이 온니가 판매책 쫄따구 할테니끼니.
2006.06.19 21:19:57 (*.234.131.250)
글쎄 말야.
나는 우째 그런 것들 생각이 나는거지?
하긴...
쪼께 뻘쭘하지만 이런 것도 생각이 난다.
창호지 사이로 햇빛이 들어오는 방에서 창을 지고 앉아서
엄마가 씹어서 먹여주는 밥을 받아 먹는 장면.
내심 못마땅한데도 거부하지 못하고...
그건 겨우 돐이나 되었을 무렵의 일일텐데 너무도 선명하게 기억이 나는거 있지.
실제로 엄마한테 물어보니 내가 어렸을 적에 하도 골골해서
밥을 늘 씹어서 먹였다는구나 글쎄... 에구...
수노온니 ~
은범이 어리다고 함부로 뭐라 하지 마세요.
다 기억했다가 말 문 터지고 나서 따지면 우떠케요? 케케케 ~ (x7)
나는 우째 그런 것들 생각이 나는거지?
하긴...
쪼께 뻘쭘하지만 이런 것도 생각이 난다.
창호지 사이로 햇빛이 들어오는 방에서 창을 지고 앉아서
엄마가 씹어서 먹여주는 밥을 받아 먹는 장면.
내심 못마땅한데도 거부하지 못하고...
그건 겨우 돐이나 되었을 무렵의 일일텐데 너무도 선명하게 기억이 나는거 있지.
실제로 엄마한테 물어보니 내가 어렸을 적에 하도 골골해서
밥을 늘 씹어서 먹였다는구나 글쎄... 에구...
수노온니 ~
은범이 어리다고 함부로 뭐라 하지 마세요.
다 기억했다가 말 문 터지고 나서 따지면 우떠케요? 케케케 ~ (x7)
2006.06.19 22:04:48 (*.204.131.14)
춘선아!
별걸 다 ~아 기억하는 여자
난 부유하진 않았지만 가난하지도 않게 그저 평범하게 살았어
영화에서 나오는 그런 장면도 살면서 본 기억이 없네
올해 육이오도 휴일이구나
지금 애들은 우리가 초등학교 다닐때처럼
반공 방첩에관한 교육이 심하진 않을꺼야 평양도 오가고하니 말이지
우리땐 북한 사람은 빨갛게 생긴줄로 알고 자랐잖니?
참! 다 옛날얘기가 되어버렸네..................
별걸 다 ~아 기억하는 여자
난 부유하진 않았지만 가난하지도 않게 그저 평범하게 살았어
영화에서 나오는 그런 장면도 살면서 본 기억이 없네
올해 육이오도 휴일이구나
지금 애들은 우리가 초등학교 다닐때처럼
반공 방첩에관한 교육이 심하진 않을꺼야 평양도 오가고하니 말이지
우리땐 북한 사람은 빨갛게 생긴줄로 알고 자랐잖니?
참! 다 옛날얘기가 되어버렸네..................
2006.06.19 23:49:35 (*.180.57.133)
춘선아,
혹시..민우 생각하며 마구마구 쳐지는 거야? 그런거니?
민우, 잘 해 가고 있을꺼야 내가 오바한거면 미안하구 ㅎㅎㅎ
노래도 마냥 쳐지구...
씩씩하고 애잔한 예술 군가도 많더라, 부탁해요 ㅎㅎㅎ
춘선아, 6월24-25일 철원-휴전선 걷기 있는데, 고생하러 함께 갈래?
6.25 기념 걷기야ㅎㅎㅎㅎ
힘들어도 슬퍼도 나는 안울어,
힘 내라 힘, 젖먹던 힘까지.
혹시..민우 생각하며 마구마구 쳐지는 거야? 그런거니?
민우, 잘 해 가고 있을꺼야 내가 오바한거면 미안하구 ㅎㅎㅎ
노래도 마냥 쳐지구...
씩씩하고 애잔한 예술 군가도 많더라, 부탁해요 ㅎㅎㅎ
춘선아, 6월24-25일 철원-휴전선 걷기 있는데, 고생하러 함께 갈래?
6.25 기념 걷기야ㅎㅎㅎㅎ
힘들어도 슬퍼도 나는 안울어,
힘 내라 힘, 젖먹던 힘까지.
2006.06.20 00:02:13 (*.234.131.250)
민우?
민우는 지금 무지 잘있대.
훈련소 생활이 공부하는 것보다 훨씬 수월하고 편하대.
요즘은 얼마나 세상이 좋아졌는지
매일 훈련소 홈피 게시판에다 편지를 쓸 수도 있단다.
아들의 댓글도 그 밑에 달리고...
내가 이 글을 왜 썼는고 하니 말야.
교회 주보에 6.25와 관련된 가난했던 시절 이야기를 신앙 칼럼으로 써야 하거든.
원고 마감이 수요일이야.
그래서 우선 여기서 초고 작업을 한거야.
우선 브레인 스토밍을 해야 원고가 나오겠기에....
너무 쳐지는 노래 올려서 근심되니?
원고만 다 쓰고 나면 다시 바꿀게.
너희는 이산가족이 아닌 모양이구나.
같은 시대를 살았으면서도 공유한 추억의 모양은 상당히 다를 수 있어.
선오기 ~
우리의 걷기 대장.
꿈을 꿀 줄 아는 은밀한 자유인.
내가 본 네 모습이야.
민우는 지금 무지 잘있대.
훈련소 생활이 공부하는 것보다 훨씬 수월하고 편하대.
요즘은 얼마나 세상이 좋아졌는지
매일 훈련소 홈피 게시판에다 편지를 쓸 수도 있단다.
아들의 댓글도 그 밑에 달리고...
내가 이 글을 왜 썼는고 하니 말야.
교회 주보에 6.25와 관련된 가난했던 시절 이야기를 신앙 칼럼으로 써야 하거든.
원고 마감이 수요일이야.
그래서 우선 여기서 초고 작업을 한거야.
우선 브레인 스토밍을 해야 원고가 나오겠기에....
너무 쳐지는 노래 올려서 근심되니?
원고만 다 쓰고 나면 다시 바꿀게.
너희는 이산가족이 아닌 모양이구나.
같은 시대를 살았으면서도 공유한 추억의 모양은 상당히 다를 수 있어.
선오기 ~
우리의 걷기 대장.
꿈을 꿀 줄 아는 은밀한 자유인.
내가 본 네 모습이야.
2006.06.20 00:51:44 (*.180.57.133)
그랬구나..
난 네가 혹여 맘 울적한가 보아 신경이 쓰였구나.. 다행...
민우 훈련소 게시판에 편지도 쓰고 댓글도??????
우와~~~~~~~~
국방부도 많이 진화했네ㅋㅋㅋ, 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 글은 그런 시츄에이션 이었구나ㅎㅎㅎ
도움 안되어서 미안하다, 판이나 깨구 ㅋㅋㅋㅋ
좋은 글 쓰셔요.
꿈은 희망이지, 품지 않으면 더이상 일상의 기쁨도 없어
어릴적엔 애쓰지 않아도 온통 희망 뿐이었고
이젠,
꿈이라기 보담은 사랑이라 해야 할...
자연의 모든것을 사랑하고, 자연 허락하신 주님을 따르고...
귀한 크신 사랑, 공들여 맞지 않으면
우리 삶, 보잘것 없어, 회색만 짙어갈뿐.
친구야, 민우 잘 지낸다는 소식, 참 좋네
잘 자...나두 잘께...
난 네가 혹여 맘 울적한가 보아 신경이 쓰였구나.. 다행...
민우 훈련소 게시판에 편지도 쓰고 댓글도??????
우와~~~~~~~~
국방부도 많이 진화했네ㅋㅋㅋ, 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 글은 그런 시츄에이션 이었구나ㅎㅎㅎ
도움 안되어서 미안하다, 판이나 깨구 ㅋㅋㅋㅋ
좋은 글 쓰셔요.
꿈은 희망이지, 품지 않으면 더이상 일상의 기쁨도 없어
어릴적엔 애쓰지 않아도 온통 희망 뿐이었고
이젠,
꿈이라기 보담은 사랑이라 해야 할...
자연의 모든것을 사랑하고, 자연 허락하신 주님을 따르고...
귀한 크신 사랑, 공들여 맞지 않으면
우리 삶, 보잘것 없어, 회색만 짙어갈뿐.
친구야, 민우 잘 지낸다는 소식, 참 좋네
잘 자...나두 잘께...
2006.06.20 08:45:50 (*.241.95.114)
학용품이 귀했던건 기억이 나요.
양철 받침, 양철 필통 ,심이 잘 부러지던 연필, 잘 지워지지 않는 지우개로 박박 지우면 시커먹게 되던가 아니면 공책이 찢어어버리던가.....
제가 중학교 1학년때 MonAmi인가에서 샤프가 처음 나왔어요.
얼매나 신기한지 .....
엄마를 졸라서 샤프 값을 탔는데 그 다음 아침까지 기다릴수 없어
그 밤에 숭의동에서 창영동까지 단숨에 달려가서 소중하게 가져온 기억이 납니다
- 제가 영화여중을 나왔는데요 , 학교 옆에 문화문방구가 있었어요
그 문방구는 다른 곳엔 없는 색깔있는 노트(아주 연한 미색 or 아주 연한 연두색)도 있었구요,
샤프도 있었거든요 ㅋㅋㅋ-
지금은 뭐든 다 흔하고 흔해서
교실바닥에 떨어진 샤프 볼펜 지우개 자 웬만한거는 줍지도 찾지도 않아요.
청소 시간에 심심치않게 주워 와 잘 쓴답니다.
근디
순호온니 ~~~
빨강색 사루마다 입고 총채들고 동네를 휩쓸던 모습이 왜 본것 처럼 선명하게 떠오를까용?
거기다가 온니의 그 ( )한 이마까정 (x7)(x10)(x8)
아침부터 선배온니 놀려 먹는다고 경치것네 .
튀자~~~~~~~~후다닥닥닥닥 (x7)
양철 받침, 양철 필통 ,심이 잘 부러지던 연필, 잘 지워지지 않는 지우개로 박박 지우면 시커먹게 되던가 아니면 공책이 찢어어버리던가.....
제가 중학교 1학년때 MonAmi인가에서 샤프가 처음 나왔어요.
얼매나 신기한지 .....
엄마를 졸라서 샤프 값을 탔는데 그 다음 아침까지 기다릴수 없어
그 밤에 숭의동에서 창영동까지 단숨에 달려가서 소중하게 가져온 기억이 납니다
- 제가 영화여중을 나왔는데요 , 학교 옆에 문화문방구가 있었어요
그 문방구는 다른 곳엔 없는 색깔있는 노트(아주 연한 미색 or 아주 연한 연두색)도 있었구요,
샤프도 있었거든요 ㅋㅋㅋ-
지금은 뭐든 다 흔하고 흔해서
교실바닥에 떨어진 샤프 볼펜 지우개 자 웬만한거는 줍지도 찾지도 않아요.
청소 시간에 심심치않게 주워 와 잘 쓴답니다.
근디
순호온니 ~~~
빨강색 사루마다 입고 총채들고 동네를 휩쓸던 모습이 왜 본것 처럼 선명하게 떠오를까용?
거기다가 온니의 그 ( )한 이마까정 (x7)(x10)(x8)
아침부터 선배온니 놀려 먹는다고 경치것네 .
튀자~~~~~~~~후다닥닥닥닥 (x7)
2006.06.20 08:48:26 (*.241.95.114)
쪼기 우에 있는
( )는 온니들 상상에 맡길께용
증말로
튀자~~~~~~~~후다닥닥닥닥 ::p::p::p::p::p
(:l)(:k)(:l)
( )는 온니들 상상에 맡길께용
증말로
튀자~~~~~~~~후다닥닥닥닥 ::p::p::p::p::p
(:l)(:k)(:l)
2006.06.20 12:11:20 (*.126.229.172)
춘선이 기억력 대단하다.
며칠전 마트 문구코너에서 우리 어릴때 ,귀하게 쓰던 미제 노랑 연필을 보고 반가웠는데...
(연필심 진하기가 1,2,3 번호이던)
그런데 예전엔 우리집이나 앞집이나, 다 고만고만 아니었나?
먹고살고 아이들이나 공부시키고...
초등학교때 2학년땐가, 진해에서 전학온 나에게 제일 먼저 친해지자고 .
다가온 친구집에 놀러갔는데 그아이 엄마가 -브랜다 리-공연을 보러 서울로 가시더라.
내가 브랜다리가 누구냐고 묻는 내게 그친구는 영어로 노랠 부르더라. 브랜다리 노래라고..
그때 얼마나 벙 떴는지.
그여가수 이름을 내가 아직도 기억하잖니.
사실은
요즘이 더 문제지.
아직도 전쟁직후 수준의 생활을 사는 사람들이 있더라.
아이들 학교급식비조차 걱정을 해야하고.
단지 그때랑 좀 다른 건 그런집에도 냉장고랑 텔레비젼은 다 있다는것...
상대적 빈곤감이 우리 어릴땐 그적 많지 않았는데.
요즈음은 얼마나 크니?
생각만 가득하고 게으름으로 이웃에 대한 실천은 못하고있으니....
며칠전 마트 문구코너에서 우리 어릴때 ,귀하게 쓰던 미제 노랑 연필을 보고 반가웠는데...
(연필심 진하기가 1,2,3 번호이던)
그런데 예전엔 우리집이나 앞집이나, 다 고만고만 아니었나?
먹고살고 아이들이나 공부시키고...
초등학교때 2학년땐가, 진해에서 전학온 나에게 제일 먼저 친해지자고 .
다가온 친구집에 놀러갔는데 그아이 엄마가 -브랜다 리-공연을 보러 서울로 가시더라.
내가 브랜다리가 누구냐고 묻는 내게 그친구는 영어로 노랠 부르더라. 브랜다리 노래라고..
그때 얼마나 벙 떴는지.
그여가수 이름을 내가 아직도 기억하잖니.
사실은
요즘이 더 문제지.
아직도 전쟁직후 수준의 생활을 사는 사람들이 있더라.
아이들 학교급식비조차 걱정을 해야하고.
단지 그때랑 좀 다른 건 그런집에도 냉장고랑 텔레비젼은 다 있다는것...
상대적 빈곤감이 우리 어릴땐 그적 많지 않았는데.
요즈음은 얼마나 크니?
생각만 가득하고 게으름으로 이웃에 대한 실천은 못하고있으니....
2006.06.20 12:35:33 (*.1.33.2)
춘선이 글의 절반쯤은 기억도 나고 공감도 하고...
특히 화장실
학교화장실이 얼마나 무섭고 불편하고 괴롭던지(소문에는 6.25때 시체를 묻었다나 뭐라나)
방과후 집에 오는 길은 언제나 초인간적인 극기의 시간
집에 도착해 "엄마 문열어 줘"와 함께
멜방 바지 단추 끄르고 책가방을 내리면서 동시에 쏜살같이 화장실로.
가끔은 화장실에 안착하기 전에 시작되기도 했었던 것 같다.
중학교 2학년때 청소 담당구역이 교사화장실
지금 생각하면 별천지도 아니건만
그때 타일이 붙어있고 유관순이 고문당했을 것 같이 생긴
큰 솥같은 욕조가 있는 어두컴컴한 교사용화장실이 얼마나 근사해보였던지
그때 나는 내 인생의 진로를 결심하였다.
이런 화장실을 마음대로 쓸수있는 선생님이 되리라.
지금도 누가 어떤 동기로 교사가 되었나요?
하고 물으면 진담반 농담반
그때 근사한 화장실을 마음놓고 쓸 수있는 선생님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니가?
피카소가 말했다던가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은 직업을 선택하는것.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우연히 이루어진다"고
지금 생각해보니 나 참 불쌍하다.
내 인생이 화장실때문에 결정되다니...
가난하고 불편했던 시절이 가져다준 선물(?)
특히 화장실
학교화장실이 얼마나 무섭고 불편하고 괴롭던지(소문에는 6.25때 시체를 묻었다나 뭐라나)
방과후 집에 오는 길은 언제나 초인간적인 극기의 시간
집에 도착해 "엄마 문열어 줘"와 함께
멜방 바지 단추 끄르고 책가방을 내리면서 동시에 쏜살같이 화장실로.
가끔은 화장실에 안착하기 전에 시작되기도 했었던 것 같다.
중학교 2학년때 청소 담당구역이 교사화장실
지금 생각하면 별천지도 아니건만
그때 타일이 붙어있고 유관순이 고문당했을 것 같이 생긴
큰 솥같은 욕조가 있는 어두컴컴한 교사용화장실이 얼마나 근사해보였던지
그때 나는 내 인생의 진로를 결심하였다.
이런 화장실을 마음대로 쓸수있는 선생님이 되리라.
지금도 누가 어떤 동기로 교사가 되었나요?
하고 물으면 진담반 농담반
그때 근사한 화장실을 마음놓고 쓸 수있는 선생님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니가?
피카소가 말했다던가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은 직업을 선택하는것.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우연히 이루어진다"고
지금 생각해보니 나 참 불쌍하다.
내 인생이 화장실때문에 결정되다니...
가난하고 불편했던 시절이 가져다준 선물(?)
2006.06.20 12:48:22 (*.246.204.254)
이현자, 반가워
고1땐가
쫌 도톰한 색상도화지 오려서 반달모양 내고
그 진홍색 반달모양에
이쁜 스티커 부쳐서 책갈피 꽂이로 주고 받았던 기억...
책상에 머리 맞대고 붙이고 오리던 기억, 어제같다.
죽지 않고 살다 보면
널 볼 날도 있겠지 ㅎㅎㅎㅎ
행복한 하루하루 지내길 바라는 마음..
고1땐가
쫌 도톰한 색상도화지 오려서 반달모양 내고
그 진홍색 반달모양에
이쁜 스티커 부쳐서 책갈피 꽂이로 주고 받았던 기억...
책상에 머리 맞대고 붙이고 오리던 기억, 어제같다.
죽지 않고 살다 보면
널 볼 날도 있겠지 ㅎㅎㅎㅎ
행복한 하루하루 지내길 바라는 마음..
2006.06.20 13:07:06 (*.1.33.2)
선옥아, 네 글을 읽을때 마다
한점 세월에 뺏기지 않고 간직하고 있는 너의 그 맑고 깨끗한 감성에
가슴속에 깊이 묻어둔 보석상자를 열어보는 듯하구나.
좋은 글 고맙고
바쁘다는 핑계로
글도 안올리는 나를 용서하그라...
언니선생님도 안녕하시고?
한점 세월에 뺏기지 않고 간직하고 있는 너의 그 맑고 깨끗한 감성에
가슴속에 깊이 묻어둔 보석상자를 열어보는 듯하구나.
좋은 글 고맙고
바쁘다는 핑계로
글도 안올리는 나를 용서하그라...
언니선생님도 안녕하시고?
2006.06.21 13:45:10 (*.167.227.37)
춘선이 글을 읽으면서 "쪼그만 게 무신 6.25가 어떻고 저떻고 해?"하고
생각하다보니 춘선이도 50이네.
내가 56세이니........
정말 많이 공감해.
우리 그 때 모~두 가난했지.
난 1950년 4월 14일에 춘천에서 태어났지.
할아버지를 따라 온 가족이 황해도에서 1948년도에 공산군에게 쫒겨나서
강원도 원주로 오셔서 우리오빠를 낳았고 그래서 우리 오빠 이름이 원직이야.
춘천으로 이사오셔서 나를 낳아서 이름이 춘자가 되었지.
춘천서 났다고 할아버지께서 이름을 그렇게 지으셨대.
태어난 지 2개월만에 6.25가 터 져서 남으로 피난 가면서
정말 고생 수~타 했시요.
배고픈 데 젖은 안 주지요, 아랫도리는 끈끈한데 기저귀는 안 갈아 주지요.
어카가시요, 거저 싸 대고 울어대고 그캐시요.
그 때 얼마나 울었는 지 그 덕에 내가 노래를 좀 한다는 거 아닙네까?
남으로 피난갈 때, 내 기억속에 무슨 시꺼먼 것이 큰 소리를 내면서
"빽~~~"하던 소리에 놀래 내가 막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기차기적소리를 들으면 놀래고 겁이 납니다.
그 기억이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 된 기억인데
우리 엄마말씀이 그 때가 내가 채 한 살이 안 되었을 때라는 데.........
우리는 진해에서도 한 2-3년 살았다는 데, 그 때 식모언니가
늘 나를 업고 다녔는 데, 그 때 그 언니가 기억에 나기도 해.
춘선이하고 나하고 기억력이 막상막하일 것 같네.
가난이 추억이라고 했나?
그래, 우리 모두 6.25이후 모두들 참 가난했었어.
나는 서울서 "이태원 국민하교"를 나왔는 데, 용산 미 팔군과 가까운 곳에
학교가 있어 학교 앞에서 구루마에서 미군부대에서 식당에서 남은 식빵을
구어서 노란 치~즈를 삼각형 모양으로 반 짤라서 식빵 속에 넣어서
팔았는데 그거이 얼마나 맛 있었는 지 그 때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어.
생각해 보면 미군부대 식당에서 하루 지나면 버리는 것을 주어다 팔았던 것인데....
그 때는 간식이 별로 없으니 깜마중 따서 먹던생각, 남산에서 벚지(Cherry)따서
먹던 생각, 하루종일 입에 물고 있어도 안 녹는 왕 눈깔사탕, 뻥튀기, 뽑기등등....
지금은 너무 먹을 것들이 풍성하고 영양이 오버하여 다이어트라 뭐라 하지만
정말 우리 어렸을 적엔 소고기국은 생일날이나 먹었나?
그래도 우리집은 할아버지께서 고등학교 교장선생님 댁이라고
선생님들이 가끔 몽불랑 케잌도 사 오곤 했는 데 서로 많이 먹으려고
고모들 삼촌들 우리 오빠 나 달려들어 크림까지 다~ 핥아 먹었던 일.......
나도 때론 그 때가 그리울 적이 있어.
쓰다보니 너무 말이 길다.
나이 먹으면 이게 잘 조절이 안 되는 것 같애.
미안하네, 후배들~~~
생각하다보니 춘선이도 50이네.
내가 56세이니........
정말 많이 공감해.
우리 그 때 모~두 가난했지.
난 1950년 4월 14일에 춘천에서 태어났지.
할아버지를 따라 온 가족이 황해도에서 1948년도에 공산군에게 쫒겨나서
강원도 원주로 오셔서 우리오빠를 낳았고 그래서 우리 오빠 이름이 원직이야.
춘천으로 이사오셔서 나를 낳아서 이름이 춘자가 되었지.
춘천서 났다고 할아버지께서 이름을 그렇게 지으셨대.
태어난 지 2개월만에 6.25가 터 져서 남으로 피난 가면서
정말 고생 수~타 했시요.
배고픈 데 젖은 안 주지요, 아랫도리는 끈끈한데 기저귀는 안 갈아 주지요.
어카가시요, 거저 싸 대고 울어대고 그캐시요.
그 때 얼마나 울었는 지 그 덕에 내가 노래를 좀 한다는 거 아닙네까?
남으로 피난갈 때, 내 기억속에 무슨 시꺼먼 것이 큰 소리를 내면서
"빽~~~"하던 소리에 놀래 내가 막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기차기적소리를 들으면 놀래고 겁이 납니다.
그 기억이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 된 기억인데
우리 엄마말씀이 그 때가 내가 채 한 살이 안 되었을 때라는 데.........
우리는 진해에서도 한 2-3년 살았다는 데, 그 때 식모언니가
늘 나를 업고 다녔는 데, 그 때 그 언니가 기억에 나기도 해.
춘선이하고 나하고 기억력이 막상막하일 것 같네.
가난이 추억이라고 했나?
그래, 우리 모두 6.25이후 모두들 참 가난했었어.
나는 서울서 "이태원 국민하교"를 나왔는 데, 용산 미 팔군과 가까운 곳에
학교가 있어 학교 앞에서 구루마에서 미군부대에서 식당에서 남은 식빵을
구어서 노란 치~즈를 삼각형 모양으로 반 짤라서 식빵 속에 넣어서
팔았는데 그거이 얼마나 맛 있었는 지 그 때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어.
생각해 보면 미군부대 식당에서 하루 지나면 버리는 것을 주어다 팔았던 것인데....
그 때는 간식이 별로 없으니 깜마중 따서 먹던생각, 남산에서 벚지(Cherry)따서
먹던 생각, 하루종일 입에 물고 있어도 안 녹는 왕 눈깔사탕, 뻥튀기, 뽑기등등....
지금은 너무 먹을 것들이 풍성하고 영양이 오버하여 다이어트라 뭐라 하지만
정말 우리 어렸을 적엔 소고기국은 생일날이나 먹었나?
그래도 우리집은 할아버지께서 고등학교 교장선생님 댁이라고
선생님들이 가끔 몽불랑 케잌도 사 오곤 했는 데 서로 많이 먹으려고
고모들 삼촌들 우리 오빠 나 달려들어 크림까지 다~ 핥아 먹었던 일.......
나도 때론 그 때가 그리울 적이 있어.
쓰다보니 너무 말이 길다.
나이 먹으면 이게 잘 조절이 안 되는 것 같애.
미안하네, 후배들~~~
2006.06.21 13:49:48 (*.234.131.250)
현자야 ~
세월로 포장을 하면
모든 것이 다 그럴듯 하게 보이는 거 말야.
그것도 일종의 최면이고 착시현상일까?
암튼,
우리들 속에 잠재되어 있던 기억을
하나씩 둘씩 끄집어 낼 수 있는
이런 공간이 있는것이 정말 감사하지 않니?
현자는 화장실에 반해서 선생님이 되었구나.... ㅎㅎㅎ
여기는 우리들이 저고리 앞섶을 풀어헤치고 놀아도 부끄럽지 않은 곳,
우리들의 놀이터가 맞지?
예쁜 글, 고운 생각을 전해주는 선옥이,
정말로 기성작가보다 더 글을 잘 쓰는 정화,
고맙고 고마우이.
놀이터를 오붓하게 잘 채워 주어서....
오늘 날씨가 무지 꾸물거리네.
모여서 커피라도 마시면서 놀면 더 좋겠다.
현자랑 선옥이랑 양순이랑 연희랑 선경이랑 신영이랑 영희랑 여노기랑 은경이랑 효은이랑 혜수기랑 경숙이랑 정숙이랑 경래랑 옥규랑 승숙이랑 선희랑 규랑 업순이랑 정화랑 은혜랑 경희랑 춘서니랑 수노온니랑 찬정이랑 혜경이랑......
(:c)(:c)(:c)(:c)(:c)(:c)(:c)(:c)(:c)(:c)(:c)(:c)(:c)(:c)(:c)(:c)(:c)(:c)(:c)(:c)(:c)(:c)(:c)
세월로 포장을 하면
모든 것이 다 그럴듯 하게 보이는 거 말야.
그것도 일종의 최면이고 착시현상일까?
암튼,
우리들 속에 잠재되어 있던 기억을
하나씩 둘씩 끄집어 낼 수 있는
이런 공간이 있는것이 정말 감사하지 않니?
현자는 화장실에 반해서 선생님이 되었구나.... ㅎㅎㅎ
여기는 우리들이 저고리 앞섶을 풀어헤치고 놀아도 부끄럽지 않은 곳,
우리들의 놀이터가 맞지?
예쁜 글, 고운 생각을 전해주는 선옥이,
정말로 기성작가보다 더 글을 잘 쓰는 정화,
고맙고 고마우이.
놀이터를 오붓하게 잘 채워 주어서....
오늘 날씨가 무지 꾸물거리네.
모여서 커피라도 마시면서 놀면 더 좋겠다.
현자랑 선옥이랑 양순이랑 연희랑 선경이랑 신영이랑 영희랑 여노기랑 은경이랑 효은이랑 혜수기랑 경숙이랑 정숙이랑 경래랑 옥규랑 승숙이랑 선희랑 규랑 업순이랑 정화랑 은혜랑 경희랑 춘서니랑 수노온니랑 찬정이랑 혜경이랑......
(:c)(:c)(:c)(:c)(:c)(:c)(:c)(:c)(:c)(:c)(:c)(:c)(:c)(:c)(:c)(:c)(:c)(:c)(:c)(:c)(:c)(:c)(:c)
2006.06.21 14:04:23 (*.234.131.250)
춘자언니 ~
저랑 비슷한 사람이 또 있구나 싶으니까 너무 좋네요.
언니의 말씀이 구구절절 공감이 가요.
언니도 고향이 이북이시군요.
우리 아버지 고향도 황해도라 늘 북녘을 그리며 사시다가 가셨어요.
아주 전형적인 이산가족의 아픔을 뼈에 새기신 거죠.
지금은 고향 하늘을 바라보며 꺼이꺼이 우시던
아버지의 모습까지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세월이 많이 지난 덕분이겠지요.
춘자 언니 ~
우리가 살았던 많은 날들도 이미 추억으로 미화가 되기 시작했지요?
그렇지요? (:aa)
저랑 비슷한 사람이 또 있구나 싶으니까 너무 좋네요.
언니의 말씀이 구구절절 공감이 가요.
언니도 고향이 이북이시군요.
우리 아버지 고향도 황해도라 늘 북녘을 그리며 사시다가 가셨어요.
아주 전형적인 이산가족의 아픔을 뼈에 새기신 거죠.
지금은 고향 하늘을 바라보며 꺼이꺼이 우시던
아버지의 모습까지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세월이 많이 지난 덕분이겠지요.
춘자 언니 ~
우리가 살았던 많은 날들도 이미 추억으로 미화가 되기 시작했지요?
그렇지요? (:aa)
2006.06.21 14:15:10 (*.167.227.37)
춘선아!
모두 26명이네.
26명이 다 들어 갈 수 있는 찻집있니?
찻집을 전세를 내면 모를까?
내가 길~게 글 쓰는 동안 춘선이도 같이 글 올렸나 보네.
모두 26명이네.
26명이 다 들어 갈 수 있는 찻집있니?
찻집을 전세를 내면 모를까?
내가 길~게 글 쓰는 동안 춘선이도 같이 글 올렸나 보네.
2006.06.21 14:49:05 (*.164.129.137)
춘선이도 황해도 아이였구나.
우리는 황해도 안악이란다.
할아버지께서 이북 5도청 황해도 도지사직을 20년정도 하시다 가셨단다.
서울 보성여고 초대 교장선생님을 지내셨었지.
그래, 춘선이 글 속에서 어딘가 뭔가가 공퉁점이 있더라구.
할아버지가 정말 훌륭한 장로님이셨어.
춘선이도 아버지께서 신앙생활 잘 하시다 가셨지?.
우리는 황해도 안악이란다.
할아버지께서 이북 5도청 황해도 도지사직을 20년정도 하시다 가셨단다.
서울 보성여고 초대 교장선생님을 지내셨었지.
그래, 춘선이 글 속에서 어딘가 뭔가가 공퉁점이 있더라구.
할아버지가 정말 훌륭한 장로님이셨어.
춘선이도 아버지께서 신앙생활 잘 하시다 가셨지?.
첫번째라구요.
지나간 일들이 그리운게 가난 뿐인가요?
서러움도, 배고픔도, 엄마의 회초리도, 교실에 혼자 남아서 하던 나머지 공부도,
땅 뺏기 하던 사금파리 조각 마저도.
언니 근데 거슬러 올라간 세월을 쪼금 보탠 것 같다.
언니하구 나하구 두살 밖에 차이 안 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