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희에게도 다짐을 했건만 이렇게 공개된 것을알고 여러 가지로 미안한 맘 가득이다.
이렇게 공식적(?)으로 올라올 활동을 못한 이런저런 이유가 변명이다.  
해서 내겐 특별한(누구에게나 특별한 부모님들)우리 아버지얘기를 조금만 해 볼게.

자식들에게 항상 철없는 만년 소년으로 남아있는 유쾌하고 복 많은 아버지였기에
매장을 원하시는 엄마원대로 가까운 곳에 매장으로 모셨다.
2년 넘게 엄마의 극진한 정성과 사랑의 보살핌을 받으시고 3개월 중환자실에서 자식들이 번갈아 찾아오게 하시며 마음준비까지 시켜주셨다.
크게 잘해드린 것 하나 없는데(정말 용돈 한 번 크게 드린 적 없고 근사한 곳 모시고 구경간 적도 없는데) 우리 형제들 누구하나 마음에 서운한 것도 없이 복 받으신 일생이였다고 생각한다면 참말 이상하지?
몇 년 전 팔순 생신 때 내가 드린 편지로 작고 재밌던 우리 아버지 얘기를 대신할게.
두 번씩이나 와준 한신애를 비롯해서 여러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이 글로 대신한다.

( 아버지 보세요)

아버지, 팔순을 축하드려요.

엄마를 놀리시면서 너무나 재밌어 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 형제들이 아버지께 ‘ 항상 만년 소년이시라니까, 못 말려’ 하던 말 , 생각나세요?
그런데 벌써 팔순이시네요.

요즘 들어 말수도 줄어드시고, 다리 기운도 조금씩 빠지시는 것 같아 걱정도 되지만 그래도 어디 나갈 때면 제일 먼저 차에 앉아 계신 것을 보며  아직 빠른 행동 그대로이신 것 같아 안심이 됩니다.

나에게 있어 제일 어린 시절의 아버지는 나를 무등 태워 인천 용동 골목의 술집으로 향하시던 모습이에요. 술은 잡수시고 싶고 엄마 잔소리는 피하고 싶을 때, 나를 앞세워 집을 나서셨던 못 말리는 아버지! 그 곳에서 과자종류를 맘껏 먹고 그림 그리며 놀다 집에 가자고 떼를 쓰면 마지못해 일어서셨죠.

두 번째 그림은 초등학교도 안 들어갔던 대여섯 살 때, 주안 저수지 근처로 친구 분들과 낚시 가는 아버지 따라 갔다 혼자 돌아 온 일이에요. 처음엔 좋아서 따라 갔지만 우두커니 앉아 낚시하는 어른들 곁에서 심심해서 집에 가자 졸랐더니 혼자 갈래면 가라는 말씀에 건너편의 버스를 홀랑 집어 타고 (어려서 돈도 안 받았으니까요) 집에 돌아와 신나게 놀고 있었죠. 전화도 없던 시절이라 나중에 없어 진 것을 알고 모두들 혼비백산으로 찾다가 집에 와 보니 태연히 놀고 있는 나를 보고 크게 나무라지 않으시던 모습이에요. 많이 혼날 줄 알았는데 말이에요. 아버진 그렇게 ‘별일 없으니 됐다’ 하시던 행동을 나중에도 저에게 보여 주셨어요.

대학 때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다 큰 것이 12시가 다 되어 뛰어 들어오면서 얼마나 가슴을 조였었는지요. 엄마의 야단을 생각하며 말이죠. 골목 끝 우리 집에 대문까지 불이 환하게 밝혀 진 것을 보며 들어가는데 열 올라 있는 엄마를 방으로 잡아끄시며  ‘들어 왔으니 됐잖아’ 하시던 말씀. 크게 혼날 일인걸 알고 있는 저에게 아무 말씀도 안 하시던 그 마음이 이렇게 오래 오래 제 가슴에 남아 있네요.

또 하나의 그림은 초등학교 중학년 정도에 아버지께서 기분 좋을 만큼의 술을 잡수시고 들어오시면 자는 우리4남매를 깨워서 씨름하자시던 모습이에요.

4명 다 양팔다리에 늘러 붙어도 들어 올리시면서 힘 센 것을 자랑하시던 모습이요. 그리고 용돈도 잘 주셨죠. 다른 집들과 마찬가지로 다음날 아침이면 엄마께 거의 다 뺏겼지만요. 엄마께는 미안 하지만 우리한테는 아주 재미있고 즐거운 추억입니다.  흥이 더 오르신 날이면 그 잘 부시던 하모니카를 꺼내서 졸려 눈 껌벅이는 우리 앉혀 놓고 하모니카 연주하시던 모습도 정말 잊을 수가 없어요. 그 연세에 피아노와 기타음을 찾아 아리랑을 치시던 아버지의 음악성은 우리 4남매 중 아무도 이어 받질 못 한 것 같아 안타깝네요. 엄마한테는 무수한 잔소리를 들었지만 아버지한테는 초등학교 시절 볼기 몇 대 맞은 기억밖엔 없어요. 다른 곳은 전혀 손도 안대고 오직 손바닥으로 볼기 한두 대 맞은 기억이 전부인데, 그것도 조금 있으면 때린 것이 마음 쓰여 더 잘 해주시던 기억에 ‘조금 있으면 나한테 잘할 걸 뭘’, 하며 속으로 으쓱해 했던 것은 모르실 거예요.   아버지의 천성같은 그런 편안함과 조금의 권위도 우리에게 나타내지 않으셨던 모습에서 어린 시절 아무 것도 두렵지 않던 천방지축의 자신감을 가졌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다 자라서 모두들 20대 이상이 되어서 ‘엄마나 나는  번데기다 ’하고 웃으시며 말씀하시면 ‘우리도 우리 애들한테 똑 같이 그렇게 될 건데, 뭘’ 하며 더 큰소리치던 철없는 이 큰딸이 50을 바라보며, 이제야 아버지, 엄마 같은 우리 부모님의 얼만큼이나 될 수 있을지 도무지 자신이 서지 않는 요즘입니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항상 즐거운 사건들이 같이 떠오릅니다.

막내 종혁이가 난데없이 연극한다고 햄릿 친구로 나올 때, 우리 모두 인하대 연극 보러 갔었죠. 어쩌다 뭉친 건데도 끝까지 보지 않고 중간에 나와 먹는 집에 앉아 낄낄대며 무대 위에서 어설픈 대사 열심히 외칠 막내얘기를 하며 요건 모를 거라며 제일 재밌어 하시던 아버지모습 !

아! 몇 번을 들어도 질리지 않는 1.4후퇴 때 얘긴 또 얼마나 아버지다운지요.

인천상륙작전으로 포탄이 비 오듯 쏟아지던 인천의 1.4후퇴 때, 조카들을 까맣게 칠해서 밤에 먹을 것을 서리해오게 한 것, 할머니 모시고 피난가다 포탄 속을 혼자만 먼저 뛰어 다리 밑에 숨고, 그때서야 멀리 걸어오시는 할머니 보며 하시던 말씀들, 그 절박한 순간들을 그렇게도 재밌게 회상하실 수 있는 분이 우리 아버지말고 또 누가 계실까요! 아버지 누님이신 고모 한 분쯤 이실꺼라 생각합니다. 남들에겐 넘을 수 없는 고생이나 힘듦이, 아버지의 낙천적이고 직선적인 통찰 앞에선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는 듯 싶습니다.

지금은 엄마에게 넘어간 일이지만, 일요일이면 하루 종일 화분 만지시던 아버지의 꽃 사랑을 빼놓을 수가 없네요. 며칠 출장이라도 다녀오시면 제일 먼저 화분에 물을 주었나 그 것부터 물으시던 아버지, 그런데도 아주 어렵게 오랜만에 핀 꽃에 눈길 한 번 안 주던 우리들은 어땠는지요. 일요일 아침에 늦잠 자는 우리들을 깨워 꽃 핀 것 보라고 흔들어 대시면 어쩔 수 없이 한 번 흘낏 보는 정도였지만, 화분을 종일토록 만지시던 아버지의 모습은 이 다음까지 오래도록 잊지 못 할겁니다.

아, 참 잊을 수 없는 우리 모두의 아침 잠!
엄마만 빼면 우린 일요일 하루종일이라도 자고 싶은데 엄마의 잔소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나야만 했던 일요일, 물론 아버지도 포함해서죠. 그런 엄마가 아주 가끔 친정일 때문에 천안에 가시면 우린 다들 좋아했죠.

그 날도 엄마가 모처럼 안 계신 일요일이었어요. 토요일 저녁 때 큰딸인 난 아침 챙기기도 싫고 늦잠도 자고 싶어 아버지께 말씀드렸죠. 아침은 각자 해결이라고. 내 말에 아버진 마침 잘 됐다는 듯이 제일 먼저 일어나는 사람이 아침 차리기라고 하셨어요. 난 너무나 좋아하며,(절대 일찍 안 일어 날 거니까 )모두들 그러기로 하고 잠들었죠. 그런데 다음 날, 10시도 넘어 배가 너무 고파 눈이 떠져서, 같은 방에서 자던 연희와 살금살금 방문을 여는 순간 “니네가 아침 차려라”하시던 아버지!  와, 대단한 우리 아버지!    
    
어려선 아주 보통의 아버지라 생각했었죠. 누구나 자신의 부모님이 미화되기 마련이지만, 아주 객관적으로 아버질 바라보며 친구 같은 편안함만이 좋았을 뿐이었어요. 그런데, 그런데 나일 먹어가며, 또 내 자식을 키우며 이 세상의 많은 모습의 부모님들을 보며, 다시 한 번 아버질 생각해 보게 됐어요.  술을 그렇게도 좋아 하셨지만 모진 모습 한 번 보이시지 않고 어린 우리들에게 오히려 즐거운 추억만 남겨 주신 아버지!  자상한 아버지보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하시며 사셨는데도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아버지!

그런 자유분망함이, 그런 철없음이, 엄마껜 너무 힘드셨을 부분이지만, 우리들의 타고난 각자의 모습 이대로 자신있게 살고 있는 커다란 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버질 생각하면 왜 이렇게 따뜻한 웃음이 마음 가득 퍼지는지 모르겠어요.

천상병시인의 시처럼 이 세상에서의 삶이 마치 소풍나온 듯 즐거운 모습의 아버지로 떠오름이 우리에게 모두 행복이란걸 아셨으면 해요.

아버지!   엄마와 함께 오래 건강하셔서, 두 분의 다정한 모습을 항상 볼 수 있도록  아버지의 따뜻함을 엄마께도 많이 나타내 보이셨으면 정말 좋겠어요.

                        다시 한 번 팔순생신을 축하드리며.

                          2002년 4월에      큰딸 문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