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회 - 게시판담당 : 최경옥, 정환복,설인실 - 11회 모임터 가기
글 수 1,261
명희에게도 다짐을 했건만 이렇게 공개된 것을알고 여러 가지로 미안한 맘 가득이다.
이렇게 공식적(?)으로 올라올 활동을 못한 이런저런 이유가 변명이다.
해서 내겐 특별한(누구에게나 특별한 부모님들)우리 아버지얘기를 조금만 해 볼게.
자식들에게 항상 철없는 만년 소년으로 남아있는 유쾌하고 복 많은 아버지였기에
매장을 원하시는 엄마원대로 가까운 곳에 매장으로 모셨다.
2년 넘게 엄마의 극진한 정성과 사랑의 보살핌을 받으시고 3개월 중환자실에서 자식들이 번갈아 찾아오게 하시며 마음준비까지 시켜주셨다.
크게 잘해드린 것 하나 없는데(정말 용돈 한 번 크게 드린 적 없고 근사한 곳 모시고 구경간 적도 없는데) 우리 형제들 누구하나 마음에 서운한 것도 없이 복 받으신 일생이였다고 생각한다면 참말 이상하지?
몇 년 전 팔순 생신 때 내가 드린 편지로 작고 재밌던 우리 아버지 얘기를 대신할게.
두 번씩이나 와준 한신애를 비롯해서 여러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이 글로 대신한다.
( 아버지 보세요)
아버지, 팔순을 축하드려요.
엄마를 놀리시면서 너무나 재밌어 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 형제들이 아버지께 ‘ 항상 만년 소년이시라니까, 못 말려’ 하던 말 , 생각나세요?
그런데 벌써 팔순이시네요.
요즘 들어 말수도 줄어드시고, 다리 기운도 조금씩 빠지시는 것 같아 걱정도 되지만 그래도 어디 나갈 때면 제일 먼저 차에 앉아 계신 것을 보며 아직 빠른 행동 그대로이신 것 같아 안심이 됩니다.
나에게 있어 제일 어린 시절의 아버지는 나를 무등 태워 인천 용동 골목의 술집으로 향하시던 모습이에요. 술은 잡수시고 싶고 엄마 잔소리는 피하고 싶을 때, 나를 앞세워 집을 나서셨던 못 말리는 아버지! 그 곳에서 과자종류를 맘껏 먹고 그림 그리며 놀다 집에 가자고 떼를 쓰면 마지못해 일어서셨죠.
두 번째 그림은 초등학교도 안 들어갔던 대여섯 살 때, 주안 저수지 근처로 친구 분들과 낚시 가는 아버지 따라 갔다 혼자 돌아 온 일이에요. 처음엔 좋아서 따라 갔지만 우두커니 앉아 낚시하는 어른들 곁에서 심심해서 집에 가자 졸랐더니 혼자 갈래면 가라는 말씀에 건너편의 버스를 홀랑 집어 타고 (어려서 돈도 안 받았으니까요) 집에 돌아와 신나게 놀고 있었죠. 전화도 없던 시절이라 나중에 없어 진 것을 알고 모두들 혼비백산으로 찾다가 집에 와 보니 태연히 놀고 있는 나를 보고 크게 나무라지 않으시던 모습이에요. 많이 혼날 줄 알았는데 말이에요. 아버진 그렇게 ‘별일 없으니 됐다’ 하시던 행동을 나중에도 저에게 보여 주셨어요.
대학 때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다 큰 것이 12시가 다 되어 뛰어 들어오면서 얼마나 가슴을 조였었는지요. 엄마의 야단을 생각하며 말이죠. 골목 끝 우리 집에 대문까지 불이 환하게 밝혀 진 것을 보며 들어가는데 열 올라 있는 엄마를 방으로 잡아끄시며 ‘들어 왔으니 됐잖아’ 하시던 말씀. 크게 혼날 일인걸 알고 있는 저에게 아무 말씀도 안 하시던 그 마음이 이렇게 오래 오래 제 가슴에 남아 있네요.
또 하나의 그림은 초등학교 중학년 정도에 아버지께서 기분 좋을 만큼의 술을 잡수시고 들어오시면 자는 우리4남매를 깨워서 씨름하자시던 모습이에요.
4명 다 양팔다리에 늘러 붙어도 들어 올리시면서 힘 센 것을 자랑하시던 모습이요. 그리고 용돈도 잘 주셨죠. 다른 집들과 마찬가지로 다음날 아침이면 엄마께 거의 다 뺏겼지만요. 엄마께는 미안 하지만 우리한테는 아주 재미있고 즐거운 추억입니다. 흥이 더 오르신 날이면 그 잘 부시던 하모니카를 꺼내서 졸려 눈 껌벅이는 우리 앉혀 놓고 하모니카 연주하시던 모습도 정말 잊을 수가 없어요. 그 연세에 피아노와 기타음을 찾아 아리랑을 치시던 아버지의 음악성은 우리 4남매 중 아무도 이어 받질 못 한 것 같아 안타깝네요. 엄마한테는 무수한 잔소리를 들었지만 아버지한테는 초등학교 시절 볼기 몇 대 맞은 기억밖엔 없어요. 다른 곳은 전혀 손도 안대고 오직 손바닥으로 볼기 한두 대 맞은 기억이 전부인데, 그것도 조금 있으면 때린 것이 마음 쓰여 더 잘 해주시던 기억에 ‘조금 있으면 나한테 잘할 걸 뭘’, 하며 속으로 으쓱해 했던 것은 모르실 거예요. 아버지의 천성같은 그런 편안함과 조금의 권위도 우리에게 나타내지 않으셨던 모습에서 어린 시절 아무 것도 두렵지 않던 천방지축의 자신감을 가졌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다 자라서 모두들 20대 이상이 되어서 ‘엄마나 나는 번데기다 ’하고 웃으시며 말씀하시면 ‘우리도 우리 애들한테 똑 같이 그렇게 될 건데, 뭘’ 하며 더 큰소리치던 철없는 이 큰딸이 50을 바라보며, 이제야 아버지, 엄마 같은 우리 부모님의 얼만큼이나 될 수 있을지 도무지 자신이 서지 않는 요즘입니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항상 즐거운 사건들이 같이 떠오릅니다.
막내 종혁이가 난데없이 연극한다고 햄릿 친구로 나올 때, 우리 모두 인하대 연극 보러 갔었죠. 어쩌다 뭉친 건데도 끝까지 보지 않고 중간에 나와 먹는 집에 앉아 낄낄대며 무대 위에서 어설픈 대사 열심히 외칠 막내얘기를 하며 요건 모를 거라며 제일 재밌어 하시던 아버지모습 !
아! 몇 번을 들어도 질리지 않는 1.4후퇴 때 얘긴 또 얼마나 아버지다운지요.
인천상륙작전으로 포탄이 비 오듯 쏟아지던 인천의 1.4후퇴 때, 조카들을 까맣게 칠해서 밤에 먹을 것을 서리해오게 한 것, 할머니 모시고 피난가다 포탄 속을 혼자만 먼저 뛰어 다리 밑에 숨고, 그때서야 멀리 걸어오시는 할머니 보며 하시던 말씀들, 그 절박한 순간들을 그렇게도 재밌게 회상하실 수 있는 분이 우리 아버지말고 또 누가 계실까요! 아버지 누님이신 고모 한 분쯤 이실꺼라 생각합니다. 남들에겐 넘을 수 없는 고생이나 힘듦이, 아버지의 낙천적이고 직선적인 통찰 앞에선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는 듯 싶습니다.
지금은 엄마에게 넘어간 일이지만, 일요일이면 하루 종일 화분 만지시던 아버지의 꽃 사랑을 빼놓을 수가 없네요. 며칠 출장이라도 다녀오시면 제일 먼저 화분에 물을 주었나 그 것부터 물으시던 아버지, 그런데도 아주 어렵게 오랜만에 핀 꽃에 눈길 한 번 안 주던 우리들은 어땠는지요. 일요일 아침에 늦잠 자는 우리들을 깨워 꽃 핀 것 보라고 흔들어 대시면 어쩔 수 없이 한 번 흘낏 보는 정도였지만, 화분을 종일토록 만지시던 아버지의 모습은 이 다음까지 오래도록 잊지 못 할겁니다.
아, 참 잊을 수 없는 우리 모두의 아침 잠!
엄마만 빼면 우린 일요일 하루종일이라도 자고 싶은데 엄마의 잔소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나야만 했던 일요일, 물론 아버지도 포함해서죠. 그런 엄마가 아주 가끔 친정일 때문에 천안에 가시면 우린 다들 좋아했죠.
그 날도 엄마가 모처럼 안 계신 일요일이었어요. 토요일 저녁 때 큰딸인 난 아침 챙기기도 싫고 늦잠도 자고 싶어 아버지께 말씀드렸죠. 아침은 각자 해결이라고. 내 말에 아버진 마침 잘 됐다는 듯이 제일 먼저 일어나는 사람이 아침 차리기라고 하셨어요. 난 너무나 좋아하며,(절대 일찍 안 일어 날 거니까 )모두들 그러기로 하고 잠들었죠. 그런데 다음 날, 10시도 넘어 배가 너무 고파 눈이 떠져서, 같은 방에서 자던 연희와 살금살금 방문을 여는 순간 “니네가 아침 차려라”하시던 아버지! 와, 대단한 우리 아버지!
어려선 아주 보통의 아버지라 생각했었죠. 누구나 자신의 부모님이 미화되기 마련이지만, 아주 객관적으로 아버질 바라보며 친구 같은 편안함만이 좋았을 뿐이었어요. 그런데, 그런데 나일 먹어가며, 또 내 자식을 키우며 이 세상의 많은 모습의 부모님들을 보며, 다시 한 번 아버질 생각해 보게 됐어요. 술을 그렇게도 좋아 하셨지만 모진 모습 한 번 보이시지 않고 어린 우리들에게 오히려 즐거운 추억만 남겨 주신 아버지! 자상한 아버지보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하시며 사셨는데도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아버지!
그런 자유분망함이, 그런 철없음이, 엄마껜 너무 힘드셨을 부분이지만, 우리들의 타고난 각자의 모습 이대로 자신있게 살고 있는 커다란 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버질 생각하면 왜 이렇게 따뜻한 웃음이 마음 가득 퍼지는지 모르겠어요.
천상병시인의 시처럼 이 세상에서의 삶이 마치 소풍나온 듯 즐거운 모습의 아버지로 떠오름이 우리에게 모두 행복이란걸 아셨으면 해요.
아버지! 엄마와 함께 오래 건강하셔서, 두 분의 다정한 모습을 항상 볼 수 있도록 아버지의 따뜻함을 엄마께도 많이 나타내 보이셨으면 정말 좋겠어요.
다시 한 번 팔순생신을 축하드리며.
2002년 4월에 큰딸 문희 올림.
이렇게 공식적(?)으로 올라올 활동을 못한 이런저런 이유가 변명이다.
해서 내겐 특별한(누구에게나 특별한 부모님들)우리 아버지얘기를 조금만 해 볼게.
자식들에게 항상 철없는 만년 소년으로 남아있는 유쾌하고 복 많은 아버지였기에
매장을 원하시는 엄마원대로 가까운 곳에 매장으로 모셨다.
2년 넘게 엄마의 극진한 정성과 사랑의 보살핌을 받으시고 3개월 중환자실에서 자식들이 번갈아 찾아오게 하시며 마음준비까지 시켜주셨다.
크게 잘해드린 것 하나 없는데(정말 용돈 한 번 크게 드린 적 없고 근사한 곳 모시고 구경간 적도 없는데) 우리 형제들 누구하나 마음에 서운한 것도 없이 복 받으신 일생이였다고 생각한다면 참말 이상하지?
몇 년 전 팔순 생신 때 내가 드린 편지로 작고 재밌던 우리 아버지 얘기를 대신할게.
두 번씩이나 와준 한신애를 비롯해서 여러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이 글로 대신한다.
( 아버지 보세요)
아버지, 팔순을 축하드려요.
엄마를 놀리시면서 너무나 재밌어 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 형제들이 아버지께 ‘ 항상 만년 소년이시라니까, 못 말려’ 하던 말 , 생각나세요?
그런데 벌써 팔순이시네요.
요즘 들어 말수도 줄어드시고, 다리 기운도 조금씩 빠지시는 것 같아 걱정도 되지만 그래도 어디 나갈 때면 제일 먼저 차에 앉아 계신 것을 보며 아직 빠른 행동 그대로이신 것 같아 안심이 됩니다.
나에게 있어 제일 어린 시절의 아버지는 나를 무등 태워 인천 용동 골목의 술집으로 향하시던 모습이에요. 술은 잡수시고 싶고 엄마 잔소리는 피하고 싶을 때, 나를 앞세워 집을 나서셨던 못 말리는 아버지! 그 곳에서 과자종류를 맘껏 먹고 그림 그리며 놀다 집에 가자고 떼를 쓰면 마지못해 일어서셨죠.
두 번째 그림은 초등학교도 안 들어갔던 대여섯 살 때, 주안 저수지 근처로 친구 분들과 낚시 가는 아버지 따라 갔다 혼자 돌아 온 일이에요. 처음엔 좋아서 따라 갔지만 우두커니 앉아 낚시하는 어른들 곁에서 심심해서 집에 가자 졸랐더니 혼자 갈래면 가라는 말씀에 건너편의 버스를 홀랑 집어 타고 (어려서 돈도 안 받았으니까요) 집에 돌아와 신나게 놀고 있었죠. 전화도 없던 시절이라 나중에 없어 진 것을 알고 모두들 혼비백산으로 찾다가 집에 와 보니 태연히 놀고 있는 나를 보고 크게 나무라지 않으시던 모습이에요. 많이 혼날 줄 알았는데 말이에요. 아버진 그렇게 ‘별일 없으니 됐다’ 하시던 행동을 나중에도 저에게 보여 주셨어요.
대학 때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다 큰 것이 12시가 다 되어 뛰어 들어오면서 얼마나 가슴을 조였었는지요. 엄마의 야단을 생각하며 말이죠. 골목 끝 우리 집에 대문까지 불이 환하게 밝혀 진 것을 보며 들어가는데 열 올라 있는 엄마를 방으로 잡아끄시며 ‘들어 왔으니 됐잖아’ 하시던 말씀. 크게 혼날 일인걸 알고 있는 저에게 아무 말씀도 안 하시던 그 마음이 이렇게 오래 오래 제 가슴에 남아 있네요.
또 하나의 그림은 초등학교 중학년 정도에 아버지께서 기분 좋을 만큼의 술을 잡수시고 들어오시면 자는 우리4남매를 깨워서 씨름하자시던 모습이에요.
4명 다 양팔다리에 늘러 붙어도 들어 올리시면서 힘 센 것을 자랑하시던 모습이요. 그리고 용돈도 잘 주셨죠. 다른 집들과 마찬가지로 다음날 아침이면 엄마께 거의 다 뺏겼지만요. 엄마께는 미안 하지만 우리한테는 아주 재미있고 즐거운 추억입니다. 흥이 더 오르신 날이면 그 잘 부시던 하모니카를 꺼내서 졸려 눈 껌벅이는 우리 앉혀 놓고 하모니카 연주하시던 모습도 정말 잊을 수가 없어요. 그 연세에 피아노와 기타음을 찾아 아리랑을 치시던 아버지의 음악성은 우리 4남매 중 아무도 이어 받질 못 한 것 같아 안타깝네요. 엄마한테는 무수한 잔소리를 들었지만 아버지한테는 초등학교 시절 볼기 몇 대 맞은 기억밖엔 없어요. 다른 곳은 전혀 손도 안대고 오직 손바닥으로 볼기 한두 대 맞은 기억이 전부인데, 그것도 조금 있으면 때린 것이 마음 쓰여 더 잘 해주시던 기억에 ‘조금 있으면 나한테 잘할 걸 뭘’, 하며 속으로 으쓱해 했던 것은 모르실 거예요. 아버지의 천성같은 그런 편안함과 조금의 권위도 우리에게 나타내지 않으셨던 모습에서 어린 시절 아무 것도 두렵지 않던 천방지축의 자신감을 가졌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다 자라서 모두들 20대 이상이 되어서 ‘엄마나 나는 번데기다 ’하고 웃으시며 말씀하시면 ‘우리도 우리 애들한테 똑 같이 그렇게 될 건데, 뭘’ 하며 더 큰소리치던 철없는 이 큰딸이 50을 바라보며, 이제야 아버지, 엄마 같은 우리 부모님의 얼만큼이나 될 수 있을지 도무지 자신이 서지 않는 요즘입니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항상 즐거운 사건들이 같이 떠오릅니다.
막내 종혁이가 난데없이 연극한다고 햄릿 친구로 나올 때, 우리 모두 인하대 연극 보러 갔었죠. 어쩌다 뭉친 건데도 끝까지 보지 않고 중간에 나와 먹는 집에 앉아 낄낄대며 무대 위에서 어설픈 대사 열심히 외칠 막내얘기를 하며 요건 모를 거라며 제일 재밌어 하시던 아버지모습 !
아! 몇 번을 들어도 질리지 않는 1.4후퇴 때 얘긴 또 얼마나 아버지다운지요.
인천상륙작전으로 포탄이 비 오듯 쏟아지던 인천의 1.4후퇴 때, 조카들을 까맣게 칠해서 밤에 먹을 것을 서리해오게 한 것, 할머니 모시고 피난가다 포탄 속을 혼자만 먼저 뛰어 다리 밑에 숨고, 그때서야 멀리 걸어오시는 할머니 보며 하시던 말씀들, 그 절박한 순간들을 그렇게도 재밌게 회상하실 수 있는 분이 우리 아버지말고 또 누가 계실까요! 아버지 누님이신 고모 한 분쯤 이실꺼라 생각합니다. 남들에겐 넘을 수 없는 고생이나 힘듦이, 아버지의 낙천적이고 직선적인 통찰 앞에선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는 듯 싶습니다.
지금은 엄마에게 넘어간 일이지만, 일요일이면 하루 종일 화분 만지시던 아버지의 꽃 사랑을 빼놓을 수가 없네요. 며칠 출장이라도 다녀오시면 제일 먼저 화분에 물을 주었나 그 것부터 물으시던 아버지, 그런데도 아주 어렵게 오랜만에 핀 꽃에 눈길 한 번 안 주던 우리들은 어땠는지요. 일요일 아침에 늦잠 자는 우리들을 깨워 꽃 핀 것 보라고 흔들어 대시면 어쩔 수 없이 한 번 흘낏 보는 정도였지만, 화분을 종일토록 만지시던 아버지의 모습은 이 다음까지 오래도록 잊지 못 할겁니다.
아, 참 잊을 수 없는 우리 모두의 아침 잠!
엄마만 빼면 우린 일요일 하루종일이라도 자고 싶은데 엄마의 잔소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나야만 했던 일요일, 물론 아버지도 포함해서죠. 그런 엄마가 아주 가끔 친정일 때문에 천안에 가시면 우린 다들 좋아했죠.
그 날도 엄마가 모처럼 안 계신 일요일이었어요. 토요일 저녁 때 큰딸인 난 아침 챙기기도 싫고 늦잠도 자고 싶어 아버지께 말씀드렸죠. 아침은 각자 해결이라고. 내 말에 아버진 마침 잘 됐다는 듯이 제일 먼저 일어나는 사람이 아침 차리기라고 하셨어요. 난 너무나 좋아하며,(절대 일찍 안 일어 날 거니까 )모두들 그러기로 하고 잠들었죠. 그런데 다음 날, 10시도 넘어 배가 너무 고파 눈이 떠져서, 같은 방에서 자던 연희와 살금살금 방문을 여는 순간 “니네가 아침 차려라”하시던 아버지! 와, 대단한 우리 아버지!
어려선 아주 보통의 아버지라 생각했었죠. 누구나 자신의 부모님이 미화되기 마련이지만, 아주 객관적으로 아버질 바라보며 친구 같은 편안함만이 좋았을 뿐이었어요. 그런데, 그런데 나일 먹어가며, 또 내 자식을 키우며 이 세상의 많은 모습의 부모님들을 보며, 다시 한 번 아버질 생각해 보게 됐어요. 술을 그렇게도 좋아 하셨지만 모진 모습 한 번 보이시지 않고 어린 우리들에게 오히려 즐거운 추억만 남겨 주신 아버지! 자상한 아버지보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하시며 사셨는데도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아버지!
그런 자유분망함이, 그런 철없음이, 엄마껜 너무 힘드셨을 부분이지만, 우리들의 타고난 각자의 모습 이대로 자신있게 살고 있는 커다란 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버질 생각하면 왜 이렇게 따뜻한 웃음이 마음 가득 퍼지는지 모르겠어요.
천상병시인의 시처럼 이 세상에서의 삶이 마치 소풍나온 듯 즐거운 모습의 아버지로 떠오름이 우리에게 모두 행복이란걸 아셨으면 해요.
아버지! 엄마와 함께 오래 건강하셔서, 두 분의 다정한 모습을 항상 볼 수 있도록 아버지의 따뜻함을 엄마께도 많이 나타내 보이셨으면 정말 좋겠어요.
다시 한 번 팔순생신을 축하드리며.
2002년 4월에 큰딸 문희 올림.
2007.04.01 04:01:09 (*.108.59.89)
문희야
한국에 나갈때마다 네게 신세지는 영란이야.
지난 여름 우리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실 줄 알았는데 그렇게 되었구나. 부고 보고 몇글자 쓰고 싶었는데 네가 올려지는 것 싫다고 해서 망설이고 있었지.
너의 천진함과 자유함이 너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네. 우리 시대에는 딸에 대하여 아버지가 별로 신경쓰지 않는 시대였는데 ...하긴 네가 어렸을 적 얼마나 귀엽고 영특하고 예뻤겠니. 너의 아버지가 너를 데리고 다니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한국에 나갈때마다 네게 신세지는 영란이야.
지난 여름 우리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실 줄 알았는데 그렇게 되었구나. 부고 보고 몇글자 쓰고 싶었는데 네가 올려지는 것 싫다고 해서 망설이고 있었지.
너의 천진함과 자유함이 너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네. 우리 시대에는 딸에 대하여 아버지가 별로 신경쓰지 않는 시대였는데 ...하긴 네가 어렸을 적 얼마나 귀엽고 영특하고 예뻤겠니. 너의 아버지가 너를 데리고 다니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2007.04.01 04:06:42 (*.108.59.89)
쓰다가 이상한 것 눌러서 다시 쓴다. 언젠가 백영란과 나와 너 셋이서 우리의 아버지들이 얼마나 술을 좋아하셨는지에 대하여 말하다가 무지 웃곤 했었지. 하긴 그 분들이 살아왔던 시대가 그들을 그렇게 했겠지.
암튼 그런 아버지를 둔 넌 무지 행운아였다는 사실을 알아라. 뭐 이미 알고 있기에 저리도 멋진 편지를 팔순에 써서 읽어 드렸다니 할 말이 없지만.
문희야 너는 항상 생각만 해도 남에게 미소와 힘을 줄 수 있는 사람이야. 널 만날 때마다 기쁨을 얻곤 했는데 지난 겨울에는 네가 좀 힘이 빠져서 안타까웠는데 이젠 괜찮아졌겠지. 이상하게 글이 두서없어지는데 애썼고 나중에 또 만나자. 늘 고맙게 생각하는 영란이가 미국에서
암튼 그런 아버지를 둔 넌 무지 행운아였다는 사실을 알아라. 뭐 이미 알고 있기에 저리도 멋진 편지를 팔순에 써서 읽어 드렸다니 할 말이 없지만.
문희야 너는 항상 생각만 해도 남에게 미소와 힘을 줄 수 있는 사람이야. 널 만날 때마다 기쁨을 얻곤 했는데 지난 겨울에는 네가 좀 힘이 빠져서 안타까웠는데 이젠 괜찮아졌겠지. 이상하게 글이 두서없어지는데 애썼고 나중에 또 만나자. 늘 고맙게 생각하는 영란이가 미국에서
2007.04.01 10:30:16 (*.121.5.95)
애도를 보내는 숙연한 마음도 있지만
문희의 글에서 아버지를 진정 자랑스러워 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넘쳐 흘러서
보는 나도 마음이 조금은 편해 짐을 느낀다.
우리시대의 아버지들은 술을 떠올리게 하는데,
그 술이라는 것이 토닥토닥 엄마와의 잔 싸움으로 번지지만
우리들에게는 더 없이 즐거운 순간이 되기도 하지.
용돈이 술술 나온다는 것.
자식이 한둘이 아니니 아침이면 엄마에게 모두 회수당하고,
아버지는 그 중에서 반 정도 돌려 받으시는데...
아~~~
그런저런 추억이 문희 덕분에 새록새록 또 생각난다.
맏딸이니 아버지와의 추억이 더 많겠지.
오랫만에 문희의 글을 대하게 된 것이 아버지의 추억이라 마음이 조금 아프다.
우리의 부모님들이 한분 한분 떠나시는구나.
문희야,
즐거웠던 아버지의 추억을 생각하면 그리 마음 아프지는 않을꺼야, 그치? 넌 엄마도 계시잖아? (:f)
문희의 글에서 아버지를 진정 자랑스러워 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넘쳐 흘러서
보는 나도 마음이 조금은 편해 짐을 느낀다.
우리시대의 아버지들은 술을 떠올리게 하는데,
그 술이라는 것이 토닥토닥 엄마와의 잔 싸움으로 번지지만
우리들에게는 더 없이 즐거운 순간이 되기도 하지.
용돈이 술술 나온다는 것.
자식이 한둘이 아니니 아침이면 엄마에게 모두 회수당하고,
아버지는 그 중에서 반 정도 돌려 받으시는데...
아~~~
그런저런 추억이 문희 덕분에 새록새록 또 생각난다.
맏딸이니 아버지와의 추억이 더 많겠지.
오랫만에 문희의 글을 대하게 된 것이 아버지의 추억이라 마음이 조금 아프다.
우리의 부모님들이 한분 한분 떠나시는구나.
문희야,
즐거웠던 아버지의 추억을 생각하면 그리 마음 아프지는 않을꺼야, 그치? 넌 엄마도 계시잖아? (:f)
2007.04.01 14:36:28 (*.205.39.75)
문희야
아버지를 그렇게 기억 할 수 있는 네가 부럽구나
이세상을 소풍 나오신 듯 사신 아버지가 소풍을 끝내셨구나
자연을 아름답게 바라 보시는 아버지의 소풍길에
문희가 있어서 더욱 즐거우셨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미안해
진수씨
TEARS IN HEAVEN (ERIC CLAPTON)을
문희에게 들려 주고 싶네요
죄송해요
아버지를 그렇게 기억 할 수 있는 네가 부럽구나
이세상을 소풍 나오신 듯 사신 아버지가 소풍을 끝내셨구나
자연을 아름답게 바라 보시는 아버지의 소풍길에
문희가 있어서 더욱 즐거우셨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미안해
진수씨
TEARS IN HEAVEN (ERIC CLAPTON)을
문희에게 들려 주고 싶네요
죄송해요
2007.04.01 19:07:17 (*.131.176.138)
문희야.아버지는 가셨다고 해도 가신 것이 아니더라.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평생토록 회상하면서 나도 모르게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간다.
맑고 낙천적인 너의 고운 모습이 아버지에게서 나왔구나.
허지만 어딘가에 엄마의 모습도 숨어 있을 거야.
여든 여섯까지 자식들을 곁에서 지켜 봐 주셨으니 너의 형제들은 복도 참 많다.
마지막 몇 개월 병원에서 이별을 준비할 시간까지 갖았다니 다 자식들 복이다.
요즘 주위에서 가시는 분들을 보면
가시는 모습도 꼭 그 사람의 성격대로 가시더라.
마지막 가시던 아름다운 모습이 자식들이 살아가는 큰 거름이 될 거야.
우리 아버지도 3월에 가셨는데 너의 아버지께서도 3월에 가셨구나.
새삼스레 가신 아버지 생각이 난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쓰시던 유품 몇개를 가져와 그대로 쓰고 있다.
유품 뿐 아니라 농사 일이며 살아가는 일들까지 그대로 답습하는
나의 모습을 보며 아버지는 가신 게 아니라는 것을 실감한다.
신애는 두 번씩이나 갔었다는데 못 가 봐서 미안하다.
큰 일을 당했을 때 함께 슬퍼해 주어야 하지만
부담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어.
문희야! 우리 모두 너와 함께 슬퍼 한다.
부모를 잃어봐야 비로서 어른이 된 것 같더라.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평생토록 회상하면서 나도 모르게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간다.
맑고 낙천적인 너의 고운 모습이 아버지에게서 나왔구나.
허지만 어딘가에 엄마의 모습도 숨어 있을 거야.
여든 여섯까지 자식들을 곁에서 지켜 봐 주셨으니 너의 형제들은 복도 참 많다.
마지막 몇 개월 병원에서 이별을 준비할 시간까지 갖았다니 다 자식들 복이다.
요즘 주위에서 가시는 분들을 보면
가시는 모습도 꼭 그 사람의 성격대로 가시더라.
마지막 가시던 아름다운 모습이 자식들이 살아가는 큰 거름이 될 거야.
우리 아버지도 3월에 가셨는데 너의 아버지께서도 3월에 가셨구나.
새삼스레 가신 아버지 생각이 난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쓰시던 유품 몇개를 가져와 그대로 쓰고 있다.
유품 뿐 아니라 농사 일이며 살아가는 일들까지 그대로 답습하는
나의 모습을 보며 아버지는 가신 게 아니라는 것을 실감한다.
신애는 두 번씩이나 갔었다는데 못 가 봐서 미안하다.
큰 일을 당했을 때 함께 슬퍼해 주어야 하지만
부담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어.
문희야! 우리 모두 너와 함께 슬퍼 한다.
부모를 잃어봐야 비로서 어른이 된 것 같더라.
2007.04.01 19:26:40 (*.141.34.110)
문희아버님 상가에서...
여든 넘어 거동 못하시는 몇 년을 눈쌀 찌푸리시는 일 없이
(믿기 어렵지만 자녀들 앞에 그런 모습 보이지 않으셨다니 감동이지?)
지극히 사랑으로 보살피셨다는 문희 어머니는
정말 고우셨다. 원래 미인이시지만...
문희네 4남매가 이 글에서처럼 모두 당당하고, 유쾌하고, 매사에 자유롭게, 그리 사는 것
정말 두 분 부모님이 삶으로 직접 엮어 보여주신 유산이라는 거 대번에 알 수 있었다.
허 선배님이 추구하신다는 아버지의 모습....그러고 보니 문희 아버님과 닮으셨을 거 같다고 여겨져요.
잘은 모르지만 우선 첫째, 권위 부리시지 않고 맘 편히 웃게 해 주신다는 점.
(제 경우 이게 잘 안 돼요. 권위적이진 않지만 기대에 못 미치는 행동들 때문에....)
영란이도 왕림하셨네.
미주 동창회 성대하게, 멋지게 치루느라 고생 많았지?
네 예언(?)처럼 백영란이는 LA의 너보다 자주 만나기 어려운 실정이야.
아무래도 우린 친구 하나 단학선원인가 거기에 뺏긴 거 가터..
문희는 같은 미용실 드나드느라 마주치기도 하는데....
경수야...박진수 후배님 꽉 잡았네.
광희가 넘 바빠서 부탁하기 좀 그럴 때..
진수씨가 나타나 적절하게 잘 도와주니
여기저기서 인기만점 흑기사 맞다. 실물은 안 보여주시지만...
<봄날>팀 어딘가엔 사진이 있지.
어쨌든 무척 고맙다구요. 띨띨한 게시판지기를 요모조모 도와주시니...
광희야 네 글에서 읽은 네 아버님 모습도
참 아름답고 따뜻하신 분이셨어. 너도 그래서 마음밭이 늘 따뜻한 거 난 알아.
우리들 참 복이 많은 사람들인 거 확실해.(:f)(:f)(:f)
여든 넘어 거동 못하시는 몇 년을 눈쌀 찌푸리시는 일 없이
(믿기 어렵지만 자녀들 앞에 그런 모습 보이지 않으셨다니 감동이지?)
지극히 사랑으로 보살피셨다는 문희 어머니는
정말 고우셨다. 원래 미인이시지만...
문희네 4남매가 이 글에서처럼 모두 당당하고, 유쾌하고, 매사에 자유롭게, 그리 사는 것
정말 두 분 부모님이 삶으로 직접 엮어 보여주신 유산이라는 거 대번에 알 수 있었다.
허 선배님이 추구하신다는 아버지의 모습....그러고 보니 문희 아버님과 닮으셨을 거 같다고 여겨져요.
잘은 모르지만 우선 첫째, 권위 부리시지 않고 맘 편히 웃게 해 주신다는 점.
(제 경우 이게 잘 안 돼요. 권위적이진 않지만 기대에 못 미치는 행동들 때문에....)
영란이도 왕림하셨네.
미주 동창회 성대하게, 멋지게 치루느라 고생 많았지?
네 예언(?)처럼 백영란이는 LA의 너보다 자주 만나기 어려운 실정이야.
아무래도 우린 친구 하나 단학선원인가 거기에 뺏긴 거 가터..
문희는 같은 미용실 드나드느라 마주치기도 하는데....
경수야...박진수 후배님 꽉 잡았네.
광희가 넘 바빠서 부탁하기 좀 그럴 때..
진수씨가 나타나 적절하게 잘 도와주니
여기저기서 인기만점 흑기사 맞다. 실물은 안 보여주시지만...
<봄날>팀 어딘가엔 사진이 있지.
어쨌든 무척 고맙다구요. 띨띨한 게시판지기를 요모조모 도와주시니...
광희야 네 글에서 읽은 네 아버님 모습도
참 아름답고 따뜻하신 분이셨어. 너도 그래서 마음밭이 늘 따뜻한 거 난 알아.
우리들 참 복이 많은 사람들인 거 확실해.(:f)(:f)(:f)
2007.04.01 19:34:13 (*.141.34.110)
강명과 김명이 박치기했네.
그래, 강명아 네 글에서 읽은 네 아버지 모습도 참 행복하신 분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어머니의 사랑과 존경을 사시는 날까지 받으셨다니, 최고의 복 아닐까...?
네 말대로 두고두고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고 답습하며 추억하는 너희들 같은 자녀를 두신 것도
복 중의 복일 것이고....(:f)(:f)(:f)
그래, 강명아 네 글에서 읽은 네 아버지 모습도 참 행복하신 분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어머니의 사랑과 존경을 사시는 날까지 받으셨다니, 최고의 복 아닐까...?
네 말대로 두고두고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고 답습하며 추억하는 너희들 같은 자녀를 두신 것도
복 중의 복일 것이고....(:f)(:f)(:f)
2007.04.01 20:39:14 (*.138.134.241)
영란아(두영란 니네가 인하대에서 공부할 때, 밤에 풀밭에서 노래하는 것 내가 좋아 쫓아갔었지, 그렇게 널 만나는 것이 지금도 좋아)
광희야(철없는 듯 속 깊은 너와 따뜻한 네 시어머님 얘기 읽고 댓글 달지도 못했어)
경수야(여기 니가 올린 글들 와! 대단한데, 시원한 네 모습처럼 마음도 막힘없이 사랑이 넘치네)
강명아(네 아버지와의 글들 나도 그때 네 팬이었다, 네 웃는 모습이 참 편안해 보여서 말 걸고 싶더라)
김명아(오랜 내 친구, 두루두루 챙기느라 언제나 바쁜 명희야, 만수교회에서 너희 목사님의 첫 작곡발표회 때의 개구리소리가 가끔 그립다)
그리고 제고의 허인,진수님 손 가는대로 써 내려간 글이라 부담스럽지만 고맙습니다.
우리 4자식들, 엄마한테 야단 좀 들었어.
아버지 매장할 때 곡도 안한다고 너희는 서운하지도 않냐고.
서운은 하지만 아버진 우리가 우는 것보다 아버지의 즐거운 추억으로 떠들썩 웃는 걸 더 좋아하실텐데 말야.
내 동생도 제고잖아. 시험본 마지막세대. 올케도 인일이잖아.
강하구,이효건 선생님도 오셨었어.(내 동생 문상이었지만 셋이 인사드렸지).
광희야(철없는 듯 속 깊은 너와 따뜻한 네 시어머님 얘기 읽고 댓글 달지도 못했어)
경수야(여기 니가 올린 글들 와! 대단한데, 시원한 네 모습처럼 마음도 막힘없이 사랑이 넘치네)
강명아(네 아버지와의 글들 나도 그때 네 팬이었다, 네 웃는 모습이 참 편안해 보여서 말 걸고 싶더라)
김명아(오랜 내 친구, 두루두루 챙기느라 언제나 바쁜 명희야, 만수교회에서 너희 목사님의 첫 작곡발표회 때의 개구리소리가 가끔 그립다)
그리고 제고의 허인,진수님 손 가는대로 써 내려간 글이라 부담스럽지만 고맙습니다.
우리 4자식들, 엄마한테 야단 좀 들었어.
아버지 매장할 때 곡도 안한다고 너희는 서운하지도 않냐고.
서운은 하지만 아버진 우리가 우는 것보다 아버지의 즐거운 추억으로 떠들썩 웃는 걸 더 좋아하실텐데 말야.
내 동생도 제고잖아. 시험본 마지막세대. 올케도 인일이잖아.
강하구,이효건 선생님도 오셨었어.(내 동생 문상이었지만 셋이 인사드렸지).
2007.04.01 23:01:06 (*.81.103.254)
쓴 글을 읽을수록 정말 저하고 비슷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저도 제가 가도 남은 가족들이 울지 않고 좋은 추억을 떠 올리며 행복하기를 바랄 것 같읍니다.
오히려 오래 오래 더 같이 못 하여 미안한 마음일 것 같고.....
천사 옷을 입으셨던 김 명희씨,
항상 실체보다 더 좋게 봐 주셔셔 감사드립니다.
예쁜 마음이 축복 받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제가 가도 남은 가족들이 울지 않고 좋은 추억을 떠 올리며 행복하기를 바랄 것 같읍니다.
오히려 오래 오래 더 같이 못 하여 미안한 마음일 것 같고.....
천사 옷을 입으셨던 김 명희씨,
항상 실체보다 더 좋게 봐 주셔셔 감사드립니다.
예쁜 마음이 축복 받으시리라 생각합니다.
2007.04.02 12:04:29 (*.126.178.165)
큰딸인 문희의 아버지를 향한 훈훈한 사랑이 넘치고 가슴 찡한 글 잘 읽었다.
표현은 안하셔도 언제 어디서나 항상 보살펴주시던 아버님의 따뜻한 웃음이 넘치는 사랑에 힘입어
4형제 모두가 즐거운 마음으로 멋지게 살아가고 있는것을 보니 참 복이많다고 생각한다.
나의 어린시절에 일찍 우리 곁을 떠나신 아버지를 다시한번 생각나게 하는구나.
사실 아버지를 너무 존경하고 너무 좋아 하였기에...
너와 나 그리고 우리들 가슴속에 지금 함께 하시겠지.
표현은 안하셔도 언제 어디서나 항상 보살펴주시던 아버님의 따뜻한 웃음이 넘치는 사랑에 힘입어
4형제 모두가 즐거운 마음으로 멋지게 살아가고 있는것을 보니 참 복이많다고 생각한다.
나의 어린시절에 일찍 우리 곁을 떠나신 아버지를 다시한번 생각나게 하는구나.
사실 아버지를 너무 존경하고 너무 좋아 하였기에...
너와 나 그리고 우리들 가슴속에 지금 함께 하시겠지.
2007.04.03 23:31:17 (*.138.134.236)
경숙아, 네 글은 참 따뜻하고 평화롭더라. 네 모습처럼.
난 내일 또 시아버님 제사라 바쁘구나.
두 아버님 연세가 같으시니 저 윗쪽 좋은 곳에서 만나셨을거라 생각한다.
난 내일 또 시아버님 제사라 바쁘구나.
두 아버님 연세가 같으시니 저 윗쪽 좋은 곳에서 만나셨을거라 생각한다.
"아버지"나 "어머니"에 대한 글이 나오면 마음이 찡해져서 먼저 본 제가 초면인데도 염치 불구하고 씁니다.
어려서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이런 좋은 추억이 전혀 없지만,
옆집에 김 문희씨가 말씀하신 그런 아들에게 친구같은 친구 아버님이 계셨읍니다.
우리 어렸을 때의 아버지는 엄부자모처럼 엄한 분들이 대부분이어서
친구 집에 가도 아버님을 모시고 식사할 때는 조용히 밥만 먹었고 아버지가 집에 계시다고 하면 조용히 놀았지요.
나는 다정한 친구 아버지를 보면서 "나도 나중에 커서 아버지가 되면 친구같은 아버지가 되어야지"하고
생각했읍니다.
지금의 제 자신을 보면 다행히 어려서의 생각대로, 또 김 문희씨 아버님하고 비슷한 style이 되어있지 않나?
하고 감히 생각합니다.
2년 전에 저희 어머니도 팔순이셨는데, 에궁, 저도 그 때 마음의 편지를 한장 쓸걸......
게시판의 글들 중, 어디서 좋은 글을 가져오는 것보다는 본인의 경험이나 얘기를 더 좋아합니다.
저는 알 수 없는 자식이 바라본 아버지에 대하여 쓰신 글을 통하여 좀 더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생각을
이 아침에 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