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동산 데뷔전이 워낙 엉망이어서 항상 가시를 조심하여
댓글을 많이 달기는 했지만, 글 자체를 쓰는 것은 3회 게시판에 특정인에게 다소 딱딱한 얘기를 2-3회 쓴 것 빼 놓고는
처음인 것 같읍니다.
그동안 피해 다녔던 가시가 다행히 이곳에는 없는 것으로 판단되어 처음으로 편안한 글을 씁니다.

글쓰기의 form이 굉장히 생소하군요.


어려서 아들은 굉장히 장난꾸러기였다.

지금도 집에 진열되어 있는 아파트 복도에서 머리 휘날리며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있는 모습이나
유치원 사진인지 빨간 나비 넥타이를 하고 찍은 모습을 보면 아주 귀엽게 생겼었다.
주위에 남자 친구도 많았지만, 여자 애들도 여럿 잇었다.
아들이 어렸을 때 아침 7시에 나가면 거의 매일 새벽 2,3시에 술 먹고 들어 오다 보니 애 크는 것조차 몰랐던 내가 아는
여자 애들도 3명이 있었다.
얘들은 지금 모두 New York에 있는데, 작년에 20년 가까이만에 보니 다 큰 처녀들이 돼 잇었고
어려서 예뻤던 애는 지금도 예쁘고 다소 아니었던 애는 자라서도 좀 그런 것 같았다.

이곳에서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생활을 하며 자연스럽게 여자, 남자 구별없이 또래와 어울리는 미국화된 아이로
성장해 갔다.

다소 이상하게 생각된 첫번째 여자 애가 고 1때 미국 애였다.
서로 집에 왔다 갔다 하며 지내는 영화배우처럼 아주 예쁜 여학생이었다.

짐작하다시피 이곳에서는 여자 애들이 훨씬 aggressive하다.
자기 생각을 용감하게 표현하고 당당하다.(나는 이런 모습을 아주 좋아한다.)

이런 일에는 천재적인 동물적인 감이 있는 마누라가 여자 애한테 테클을 걸었다.

"얘, 아직 공부해야 할 때이니 너무 왔다 갔다 하면서 시간 낭비하면 안 돼지."

이 여학생은 음악대학에 진학했는데, 벌써 결혼해서 잘 산다고 한다.


Prom Party에 데리고 갈 여학생은 100 mile이나 떨어진 중부 New Jersey 고등학교 2학년 한국 애였다.

"너, 걔는 어떻게 알았니?"
"band 주 경연대회에 나가서 만났어요."

집에서 너무 멀어 그 전날 우리 집에 와서 자고 party에 갔다가 데려다 주기로 했다.
불안감을 얼굴에 감추지 못 하는 여자 애 부모가 딸을 데리고 집에 왔다.
의학 연구소에서 일하는 doctor인데, 아주 젊잖게 생기신 분이었다.
이곳에서 태어 난 여자 애는 한국 말은 잘 못 하고 축구를 했다고 하는데, 키도 크고 아주 건강하게 생긴 여학생이었다.

나중에 들었더니 자기 학교 여학생하고 같이 가지 않고 먼데서 수입해 왔다고 여학생들한테서는 규탄의 대상이 되었단다.

나는 지금도 이 여학생이 마음에 들어 가끔 아들한테 물어 본다.

"잘 있어요. 가끔 연락하고 지내요."
"너, 차였지 !!"(x10)(x10)(x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