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회 - 게시판담당 : 최경옥, 정환복,설인실 - 11회 모임터 가기
글 수 1,261
바로 위의 가슴아픈 사연에 대한 리플로 명희가 쓴 글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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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희','0','re: 아직도 계속되는 내 첫미팅의 찬란한 사연들','2003-08-20',조횟수: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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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입학하고 동창들을 만나니 고혜자 강희숙 나 강명희 요렇게 셋이 부대표라고 하더라.
우리 모두 1번이라, 1번이 부대표 하는 줄 알았더니 뭐 차석으로 들어왔다나?
골찌로 붙어서 쟁쟁한 친구들과 공부하길 바랬던 나는
그 때부터 난 공부를 접고 미팅 주선이란 것이 내 전공이 되어 버렸다.
첫 미팅은 전통적으로 K대 국문과와 우리 과 거의 모두 참석한 가운데 했지.
그쪽 과대표와 여러번 사전미팅을 거쳐 장소를 정하고
행운권 당첨 된 행운아들에게 줄 선물까지 준비했다.
미팅은 미리 완벽하게 짜여진 프로그램대로 성황리에 끝났다.
내 파트너는 함께 주선한 과대표였는데 그냥 흐지부지되었다.
몇 년 전 창과50주년 행사가 모교에서 있었다.
그때 내가 아주 예뻐하던 과후배이며 인일 13회 후배이며
동시에 내 대학 생활 전부였던 써클 후배가 반색을 하며
자기가 누구와 결혼 했는 줄 아느냐고 물었다.
모르다는 내 대답에 내 첫미팅 파트너 이름을 대는 것이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두 사람의 결혼에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언젠가 동아일보에 예술가들이 돌아가면서 나를 키운 공간이란 글을 쓰고 있었다.
그 당시 하늘을 찌를 듯이 유명세를 타던(지금까지) 연예오락 담당인 J PD의 글이 있었다.
그 글은'내 나이 스물, 정윤희가 바글거리는 머리를 하고
우리 사이 좋은 사이 해태사이다를 속삭이는 사진이 걸려 있는
고대 앞 해태의 집에서 숙대 국문과 신입생들과 미팅을 하고 있었지로 시작되고 있었다.
당연히 내가 주선한 미팅이었다.
사연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둘째 딸이 대학논술고사 보러 가는 날, J pd가 자기가 시험 보러 가는 대학의
그것도 자기가 지망한 과의 교수로 부임한다는 기사가 났다.
딸애와 그 피디는 교수와 학생으로 함께 같은과에 들어갔다.
그 교수의 강의는 터질듯이 아이들이 몰려와 신문에 늘 화제가 되어 실리곤 했다.
어느 날 강의 시간에 교수가 그 첫미팅 이야기를 또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딸 애가 교수와 친해 진 후에 그 미팅 우리 엄마가 주선했다고 말했더니
너무나 재미있어 하면서 고대 앞에 그럴 듯한 장소를 빌려
예전처럼 두 과가 30년만의 다시 예전처럼 만남을 갖자는 제의가 딸을 통해 들어왔다.
스무 살 3월 마지막 토요일이었는데
내년 쉰살의 3월 마지막 토요일에 30년만의 만남을 갖기로 일단은 합의를 했다.
물론 인일 13후배인 내 파트너의 적극적인 동의도 있었고,
친구 남편은 그때까지 뭐 기다리느냐 빨리 하고 얘기 좀 듣자고 조르고
제주도 사는 친구 남편은 함께 온다는 소식도 들어오고,
다른 친구 남편은 늙은이들 뭐 볼 것 있냐고 놀리구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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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희','0','re: 아직도 계속되는 내 첫미팅의 찬란한 사연들','2003-08-20',조횟수: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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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입학하고 동창들을 만나니 고혜자 강희숙 나 강명희 요렇게 셋이 부대표라고 하더라.
우리 모두 1번이라, 1번이 부대표 하는 줄 알았더니 뭐 차석으로 들어왔다나?
골찌로 붙어서 쟁쟁한 친구들과 공부하길 바랬던 나는
그 때부터 난 공부를 접고 미팅 주선이란 것이 내 전공이 되어 버렸다.
첫 미팅은 전통적으로 K대 국문과와 우리 과 거의 모두 참석한 가운데 했지.
그쪽 과대표와 여러번 사전미팅을 거쳐 장소를 정하고
행운권 당첨 된 행운아들에게 줄 선물까지 준비했다.
미팅은 미리 완벽하게 짜여진 프로그램대로 성황리에 끝났다.
내 파트너는 함께 주선한 과대표였는데 그냥 흐지부지되었다.
몇 년 전 창과50주년 행사가 모교에서 있었다.
그때 내가 아주 예뻐하던 과후배이며 인일 13회 후배이며
동시에 내 대학 생활 전부였던 써클 후배가 반색을 하며
자기가 누구와 결혼 했는 줄 아느냐고 물었다.
모르다는 내 대답에 내 첫미팅 파트너 이름을 대는 것이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두 사람의 결혼에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언젠가 동아일보에 예술가들이 돌아가면서 나를 키운 공간이란 글을 쓰고 있었다.
그 당시 하늘을 찌를 듯이 유명세를 타던(지금까지) 연예오락 담당인 J PD의 글이 있었다.
그 글은'내 나이 스물, 정윤희가 바글거리는 머리를 하고
우리 사이 좋은 사이 해태사이다를 속삭이는 사진이 걸려 있는
고대 앞 해태의 집에서 숙대 국문과 신입생들과 미팅을 하고 있었지로 시작되고 있었다.
당연히 내가 주선한 미팅이었다.
사연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둘째 딸이 대학논술고사 보러 가는 날, J pd가 자기가 시험 보러 가는 대학의
그것도 자기가 지망한 과의 교수로 부임한다는 기사가 났다.
딸애와 그 피디는 교수와 학생으로 함께 같은과에 들어갔다.
그 교수의 강의는 터질듯이 아이들이 몰려와 신문에 늘 화제가 되어 실리곤 했다.
어느 날 강의 시간에 교수가 그 첫미팅 이야기를 또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딸 애가 교수와 친해 진 후에 그 미팅 우리 엄마가 주선했다고 말했더니
너무나 재미있어 하면서 고대 앞에 그럴 듯한 장소를 빌려
예전처럼 두 과가 30년만의 다시 예전처럼 만남을 갖자는 제의가 딸을 통해 들어왔다.
스무 살 3월 마지막 토요일이었는데
내년 쉰살의 3월 마지막 토요일에 30년만의 만남을 갖기로 일단은 합의를 했다.
물론 인일 13후배인 내 파트너의 적극적인 동의도 있었고,
친구 남편은 그때까지 뭐 기다리느냐 빨리 하고 얘기 좀 듣자고 조르고
제주도 사는 친구 남편은 함께 온다는 소식도 들어오고,
다른 친구 남편은 늙은이들 뭐 볼 것 있냐고 놀리구 있다고 한다
2005.08.31 11:52:10 (*.219.61.232)
ㅎㅎ 했지요.
작년 3월 마지막 토요일
이대 후문 앞 에스터데이에서 모임을 기졌었습니다.
우리과 친구들은 대부분
아직도 현직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어 조금도 꿀리지 않았습니다.
결혼 연륜이나 사회적인 지위나....우리가 훨씬 으젓했죠.
그래서인지 그쪽과 애들이 쫄아서 꼭 동생들과 대화하는 것 같았죠.
30년 전 기억들이 너무나 생생해 놀랄 정도였습니다.
그날 입었던 옷 색깔이며
대화도 생생이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여자들이 더 호탕하고
생활이나 사회적 위치나 더 안정이 되었더라구요.
두 과에서 커플이 나왔는데
쑥스러운지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재미있었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의미는 있었지요.
50주년 (70살 때) 그때까지 살아있다면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습니다.
누군가 그러더라구요.
저쪽에서 아무도 못 나오면 어떻게 하느냐고,
거기에 참석하려면 건강히 오래오래 살아야겠다고.......
작년 3월 마지막 토요일
이대 후문 앞 에스터데이에서 모임을 기졌었습니다.
우리과 친구들은 대부분
아직도 현직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어 조금도 꿀리지 않았습니다.
결혼 연륜이나 사회적인 지위나....우리가 훨씬 으젓했죠.
그래서인지 그쪽과 애들이 쫄아서 꼭 동생들과 대화하는 것 같았죠.
30년 전 기억들이 너무나 생생해 놀랄 정도였습니다.
그날 입었던 옷 색깔이며
대화도 생생이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여자들이 더 호탕하고
생활이나 사회적 위치나 더 안정이 되었더라구요.
두 과에서 커플이 나왔는데
쑥스러운지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재미있었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의미는 있었지요.
50주년 (70살 때) 그때까지 살아있다면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습니다.
누군가 그러더라구요.
저쪽에서 아무도 못 나오면 어떻게 하느냐고,
거기에 참석하려면 건강히 오래오래 살아야겠다고.......
명희의 글은 찬란한 미팅에 대한 기억들을 담았네
이 글들이 2년 전에 쓴 글들인데 참 재미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