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위의 가슴아픈 사연에 대한 리플로 명희가 쓴 글이네
.....................................................................................................................

'강명희','0','re: 아직도 계속되는 내 첫미팅의 찬란한 사연들','2003-08-20',조횟수:228,
.....................................................................................................................

대학에 입학하고 동창들을 만나니 고혜자 강희숙 나 강명희 요렇게 셋이 부대표라고 하더라.
우리 모두 1번이라, 1번이 부대표 하는 줄 알았더니 뭐 차석으로 들어왔다나?
골찌로 붙어서 쟁쟁한 친구들과 공부하길 바랬던 나는
그 때부터 난 공부를 접고 미팅 주선이란 것이 내 전공이 되어 버렸다.

첫 미팅은 전통적으로 K대 국문과와 우리 과 거의 모두 참석한 가운데 했지.
그쪽 과대표와 여러번 사전미팅을 거쳐 장소를 정하고
행운권 당첨 된 행운아들에게 줄 선물까지 준비했다.
미팅은 미리 완벽하게 짜여진 프로그램대로 성황리에 끝났다.
내 파트너는 함께 주선한 과대표였는데 그냥 흐지부지되었다.

몇 년 전 창과50주년 행사가 모교에서 있었다.
그때 내가 아주 예뻐하던 과후배이며 인일 13회 후배이며
동시에 내 대학 생활 전부였던 써클 후배가 반색을 하며
자기가 누구와 결혼 했는 줄 아느냐고 물었다.
모르다는 내 대답에 내 첫미팅 파트너 이름을 대는 것이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두 사람의 결혼에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언젠가 동아일보에 예술가들이  돌아가면서 나를 키운 공간이란 글을 쓰고 있었다.
그 당시 하늘을 찌를 듯이 유명세를 타던(지금까지) 연예오락 담당인 J PD의 글이 있었다.
그 글은'내 나이 스물,  정윤희가 바글거리는 머리를 하고
우리 사이 좋은 사이 해태사이다를 속삭이는 사진이 걸려 있는
고대 앞 해태의 집에서 숙대 국문과 신입생들과 미팅을 하고 있었지로 시작되고 있었다.
당연히 내가 주선한 미팅이었다.
사연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둘째 딸이 대학논술고사 보러 가는 날, J pd가 자기가 시험 보러 가는 대학의
그것도 자기가 지망한 과의 교수로 부임한다는 기사가 났다.
딸애와 그 피디는 교수와 학생으로 함께 같은과에 들어갔다.
그 교수의 강의는 터질듯이 아이들이 몰려와   신문에 늘 화제가 되어 실리곤 했다.
어느 날 강의 시간에 교수가 그 첫미팅 이야기를 또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딸 애가 교수와 친해 진 후에 그 미팅 우리 엄마가 주선했다고 말했더니
너무나 재미있어 하면서 고대 앞에 그럴 듯한 장소를 빌려
예전처럼 두 과가 30년만의 다시 예전처럼 만남을 갖자는 제의가 딸을 통해 들어왔다.

스무 살 3월 마지막 토요일이었는데
내년 쉰살의 3월 마지막 토요일에 30년만의 만남을 갖기로 일단은 합의를 했다.
물론 인일 13후배인 내 파트너의 적극적인 동의도 있었고,
친구 남편은 그때까지 뭐 기다리느냐 빨리 하고 얘기 좀 듣자고 조르고
제주도 사는 친구 남편은 함께 온다는 소식도 들어오고,
다른 친구 남편은 늙은이들 뭐 볼 것 있냐고 놀리구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