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소리 들리는 …”
어느 선배님이 올린 바닷가 풍경을 보며 흘러 나오는 멜로디를 따라 불러 봅니다.  
파도치는 백사장을 보며 옛 생각에 젖었습니다.  

30년전 여름에 오빠와  함께 (결혼 전엔 그렇게 불렀습니다)  온 식구가 오빠의 고향  태안반도의  만리포로 캠핑을 갔습니다.  
버스에서 내리니 태양이 작렬하는  해수욕장, 물이 빠져 나간 넓은 백사장에  젊음을 만끽하듯 수영하고,  뛰노는 인파로 가득하였습니다.    멀리 떠 있는 여객선에선  
“똑딱선 기적소리 젊은 꿈을 싣고서,  갈매기 노래하는…”  
유행가가 확성기를 통해 들려오고,  천리포쪽 갯바위 너머로 하얀 여객선 한 척이 인천에서 내려오고 있습니다.  길가엔 캠핑족을 상대로 동네 아줌마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고 다라에 참외, 오이, 가지, 고추 등을 놓고 흥정을 하고 있습니다. 장작이나 짚으로 짠  돗자리를 파는 사내아이들도 보입니다.  

만리포 백사장을 지나 천리포?넘어 가는 길목엔  텐트촌에 학생들이 둘러 앉아 기타치고,  음악을 틀어놓고 웃으며 신나게 놀고 있습니다.  장작을 피워 밥을 짓는 남학생들도 보입니다.  

닭섬이 보이는 천리포엔  박정희 대통령의 조그만 별장이 있습니다.  
오빠는 고등학교 때 제고 아카데미 회원들과 지도교사 이선생님을 모시고 캠핑을 왔다고 했습니다.  수학을 가르치는 이선생님은 불편하신 한 팔에도 아랑곳 않고 (불편하다는 것은 보는 우리들 학생들의 생각이라고 했죠.) 항상 웃으시는, 안경너머 눈빛이 반짝이는 멋진 선생님이셨다고,  제고 아카데미 회원들을 따로 불러 수학 과외공부도 시켜 주신 분이라고,  수학 선생님들은 특히 술도 잘 하시는데  (어느 선생님은 존함까지도 “노상 술” 이셨다고 하며…… 선생님 죄송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지 못한, 참 좋은 선생님 이시라고  열심히 칭찬합니다.  

그때에  박정희 대통령의 둘째 따님이 그 곳 별장에 왔었는데 먼 발치에서만 보고,  함께 수영하고, 얘기 못한것이 아쉽다고, 모두들 아쉬운 마음이었다고  얘기하며…  
정말  모처럼 시간낸 즐거웠던 시간이었다고 회상에 잠깁니다.  

고깃배들이 들어 앉은 작은 선창이 있는 마을 모래 언덕에 오르면 작은 교회당이 나오고,  논밭을지나 산길에 접어들면 길가에 보랏빛 도라지 꽃들이 수줍게 피어 있고 소나무에 붙은 매미들이 요란하게 여름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멀리 하얀 파도가 부서지는 방죽골,  일명 백리포가 내려다 보입니다.  
해변가에 딱 한채 있는 초가집에 짐을 풀었습니다.  오빠와도 잘 아는 순박한 아저씨 내외가 방을 비워 주었습니다.  

해당화 빨갛게 피어 있는 모래 언덕을 지나 바닷가 갯바위에 가면 굴,  고동,  담치라 하는 홍합이 무수히 있고 큰 썰물이 되면 소라와 해삼, 전복도 딸 수 있습니다.  
아직 이곳 백사장은 외부인이 모르고 동네 현지인 만 아는 숨어있는 조용한 곳 입니다.  돌로 쌓아 만든 둑살엔 밀물 따라 왔다가 갇힌 물고기와 게들이 잡힙니다.  모래 속에는 깨끗한, 담백한  맛의 무늬가 예쁜 개양조개가 시골 아낙들의 즐거움으로, 숨어 자라고 있습니다.  

물이 들어와 가득 차면 한길 넘는 깊이에도 모래가 하나하나 다 보이는 맑은 바다 입니다. , 물장난 치며, 수영하고,  바위에 올라 신기한 따개비, 말미잘,  바위 못속에서 노는 작은 물고기를 보며 즐거운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조개 껍질도 줏어 실에 꿰어 목걸이도 만들었습니다.  바위 틈에서 잡은 고동과 모래 속에서 파낸  개양조개로 국을 끓여 저녁을 먹고 마당에 멍석을 깔았습니다.  쑥을 꺾어 모깃불을 피워 놓고 재잘 재잘  즐겁게 시간 가는 줄도, 피곤한 줄도  모르고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웁니다.  인심좋은 주인 아줌마가  내온 찐감자를 설탕에 찍어 먹고, 소금에 찍어 먹고  수염도 있고 엉성하게 박힌 옥수수도 맛있게 먹었습니다.  
‘새벽이슬이 차다’며 느릿하게 말씀하시는 주인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좋은 날씨라  마당에서 모두 노숙하기로 했습니다.  담요를 깔고 덮고 모두 일렬로 누웠습니다.  “맨 옆엔 남자들이 누워라. 잘 지켜주어야지.”

엄마, 여동생 둘, 오빠는 모두 누워 하늘의 별을 보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정말  그렇게 많은 별을, 반짝이는 영롱한 별들을 처음 보았습니다.  
북두칠성이 원을 그리며 도는 것을 처음 보았습니다. 밝게 빛나는 오리온좌도.  
은하수에 깔아 놓은 반짝이는 많은 작은 다이아몬드도 그 때 처음 보았습니다.  

모두들 잠이 들었나 봅니다.
풀벌레 소리, 이름모를 것들의 소리, 부엉이 우는 소리, 산짐승의 소리가 간간이 들립니다.  철석 거리는 파도 소리와 함께…  
긴꼬리의 별똥별이 떨어집니다.  소원을 빌어 봅니다.
‘ 주님, 오빠와 결혼하여 살고 싶어요.’

엄마는 잠이 오지 않나 봅니다.
“ 자네, 경숙이 사랑하나?”       “예.”
“ 눈물 흘리지 않게 해 주게.”   “예.”  
“ 아버지 만 살아 계셨더라면…”  
“ 엄마, 나 절대 울일 없을거야. 오빠 닮은 아들 낳고 잘 살거예요.”  
“ 경숙이 닮은 딸도 낳을 겁니다.  예쁜…”  

노랗게 빛나던 별들이 뿌옇게 커져 보입니다.
담요 속으로 따뜻한 누군가의 손이 나의 손을 꼬옥 잡아 주었습니다.  

철썩 철얼썩 쏴아 ~  



                                                                                 6월 17일 200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김 경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