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순을 심기로 한 날이다.
일기예보는 비가 온다고 했다.
농사를 짓고 부터 가장 관심이 있는 것은 일기예보다.
고구마를 심고 비가 오면 더없이 좋지만
비가 와도 일을 시작했다 하면 멈출 줄 모르는 아버지 때문에 걱정이다.
아버지에게 가장 무서운 것이 감기이기 때문이다.
날은 잡아 놓았는데 비는 온다고 하고 하여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대신 일을 일찍 시작하기로 하였다.
새벽 6시에 서울에서 집을 나섰다.
아버지 역시 새벽부터 일 나갈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한 시가 급했던 그 시간에 2호선 지하철 당산동에서 내려야 하는데
나는 그만 깜빡 잠이 들어 신촌까지 갔다.
예정했던 시간보다 40분이 늦었다.
결국 나는 밭으로 직접 갔다.
고구마 순 450개를 사다가 아버지와 동생과 나 셋이서 심었다.
엄마는 밭이 좋아 따라 나서지만 농사일이 힘에 부쳐 거들지 못하고
잔소리뿐이니 감독의 역할이다.
비닐로 덮은 밭두렁을 아버지는 호미로 구멍을 뚫고
나는 물을 퍼다가 그곳에 붓고 동생은 순을 심는다.
삼박자가 맞으니 생각보다 일이 빨리 끝났다.
일찌거니 일을 끝내고 들어오니 비가 오기 시작했다.
"허허! 지난 번 고추 모 냈을 때도 비가 오더니 오늘은 고구마 심었는데 비가 오는구나!"
새벽부터 서둔 것이 헛되지 않아 아버지는 좋아하며 말씀하셨다.

오늘로 밭일을 얼추 끝냈다.
제일 먼저 심은 상추 쑥갓 시금치는 잎을 따다가 먹고
완두콩은 콩꼬투리가 매달려 굵어가고 있다.
감자가 세 고랑이나 되는 곳에서 무성히 자라고
고추가 400그루, 가지, 토마토, 외콩,
그리고 밤호박 애호박 국수호박 등이 종류별로 자라고,
시금치 뽑은 곳에서는 다시 열무 싹이 흙을 밀고 나왔다.

시장에 가면 단돈 몇 천 원 몇 만원만 주면 그 모든 것들은 살 수가 있다.
아버지는 꼭 고추와 토마토를 따기 위해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다.
농사를 지으며 세상을 가르치고 있다.
뿌리면 뿌린 대로 나고, 가꾸면 가꾼 대로 거두며 노력하면 노력한 대로 더 거두는
정직한 농사일을 통하여 세상 이치를 가르친다.
또 아버지는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가족과 함께 하기 위해 농사를 짓는다.
농사 지어다 먹으라는 핑계를 삼아 자식들을 불러들인다.
함께 하고 함께 밥 먹는 그 시간들은 자식들 출가시킨 후  처음 갖는 것이다.
또 아버지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잊기 위해 농사를 짓는다.
점점 들리지 않는 귀와 점점 보이지 않는 눈으로 인해
쇠락해 가는 몸에 대한 두려움은
생명들이 싹트고 자라는 것을 보면 잊을 수 있다고 한다.

똑같은 일을 몇 시간이고 반복해야하는 농사일은
많은 육체노동을 요하는 작업이다.
한 번 일하고 오면 이삼일은 두두려 맞은 것처럼 온 몸이 쑤시고 아프다.
또한 반복의 작업이라 지루하고 권태롭기 짝이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사일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가장 신성한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다음 일은 아마도 감자 캐는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