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은 두분 다 안계시지만 어버이 날만 되면 카네이션을 삽니다. 엄마, 아버지 너무도 그립습니다.**

일기쓴 날짜 : 2004/04/27  (퍼온글)

곧 다가올 어버이 날이 내게는 일년 중 가장 바쁜
몇날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오월이 되기전에
친정 부모님을 뵈러 갔다.
사가지고 간 몇가지의 찬거리를 냉장고에 넣어두고
아버지가 계실 마을 앞 시내건너 딸기 하우스로 갔다.

<아버지, 저 왔어요.>
<오냐, 왔나? 엄마는 들에 있을게다.>
저어만치 하우스 끝에 엎드린 아버지가 내 고함소리에
허리를 한번 펴신다.
아버지와의 대화는 그걸로 끝이다.

올해는 수확이 예년의 절반수준 밖에 되지 않아서
아버지가 속상해 하신다는 엄마의 푸념을 몇번인가 들었다.
연세가 있으시니 많은 농사를 건사할 수야 없지만
ha당 수확을 따지면 줄곧 면내에서 5위내를 고수하신다던
아버지의 농사가 그리된 이유는 동생네 밭의 파종시기를
적기에 맞추다보니 아버지의 밭에는 일주일 정도 당겨서
모종을 이식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일주일이 이상기온 현상으로
지나치게 따뜻한 바람에 순이 웃자라서 딸기가 많이 열리질 않는다고.

가서 쳐다보면 더 속상할테니 따는 날 외에는 나가시지 말라고 말려도
밥숟가락만 놓으면 가서 사신다고 엄마는 푸념이셨다.
엄마말처럼 아버지는 식사만 끝나면 밭으로 나가
쉬임없이 전잎을 따내고 잡초를 뽑아내고 하신다.
내가 보기에는 너무 싱싱하고 잘 되어 보이는데
저 밭이 아버지를 속상하게 하는구나
길게 뻗은 밭이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는 냇둑으로 나 앉는다.
어린 시절 은모래 반짝이던 시내는 논에서 흘러든 뻘과
그 뻘에 뿌리내린 수초들 때문에 볼품없이 변했다.

집으로 돌아와 동생이 일하다가 잠깐씩 쉬기위해 창고로 쓰던 걸
꾸몄다는 아랫 채 문간방에 들어가 동생의 침대에 벌렁 드러 누웠다.
그러다 침대 머리맡에 두툼한 검정색 노트 한권이 눈에 띄어
무심코 펼쳐 본다.
언젠가 동생에게서 언듯 얘기 들은 적이 있는 아버지의 영농일지다.

무학이신 내 아버지가 영농일지라는 개념을 갖고 기록하셨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버지는 오래 전부터 당신의 작농현황을
기록으로 갖고 계셨다.

언제 거름을 넣고 심었는지, 순은 언제 땄으며 일꾼은 몇명이 들었는지
투약 시기와 사용한 약의 양, 그리고 수확이 시작되면
몇일날 어느 상회로 몇박스를 얼마에 내었는지 몇년에 걸쳐
꼼꼼하게도 체크해 놓으셨다.

몇년 전 IMF가 터지고 경기가 급속히 나빠질 때
조그만 사업을 하던 동생이 제일 먼저 궁지에 몰렸고
다들 고만 고만하게 살던 형제들은 뾰족하게 도움을 줄 형편이 아니었던 터라
동생을 고향으로 밀었다.
선듯 결정하지 못하던 동생은 결국 결혼 때 부모님이 마련해 준
전세금까지 다 털어 먹고서야 하는 수 없이 아버지 곁으로 갔다.

그렇게 돌아온 작은 아들에게 아버지는
당신이 일구어 놓은 하우스 네동을 고스란히 넘겨 주셨다.
그리고 당신은 집 앞 내건너 작은 논으로 옮겨 앉으셨다.
아침 저녁 앞산 그늘이 드리우는 그 논은 원래 짓던 논보다는
딸기농사를 짓기에 조건이 좋지않다.
그래도 아버진 농사일 서툰 아들보다는 당신이 조건 나쁜 땅을 맡는 게
낫다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동생에게 들논을 넘겨 주신 후
한번도 그 논에는 나가시지 않으시면서도 동생에게
두엄시기, 파종시기, 투약시기 등을 지시하셨는데
동생은 논에 가 보지도 않은 아버지가 내리는 지시의 정확함이
굉장히 신기하였는데 그 다음해에 이 노트를 동생에게 넘기시더란다.
그 여러해의 기록을 통해 아버지는 언제쯤 어떤 조건에서
어떤 병들이 생기는지 훤히 꿰고 계셨던 것이다.

처음 영농메모만 참조하던 동생은 어느 날
아버지의 출하기록을 토대로 가락시장 상회마다의 물건 값을
그래프로 그려 보았는데 신기하게도 일주일 단위로 오르고 내리는
싸이클을 형성하더란다.
수요와 공급의 과반에 의한 그 싸이클을 참조해서 출하할 상회를
선정하였더니 똑같은 상품으로 한해 몇백은 거뜬히 더 벌어지더라고...

<도시 사람들 주식 투자하는거랑 비슷한 원리라우.>
동생이 자랑삼아 이야기하던 그 벌이의 토대가 된 아버지의 메모는
거의 수치로 이루어져 있었는 데 간간히 그 숫자 사이 사이에
아버지의 일기가 들어 있었다.

0월 0일 숙이가 왔다 갔다. 가슴이 아프다.

띄엄 띄엄 다섯 형제들의 대소사와 방문 기록이
영농기록 사이 사이에 숨어 있었는데 나와 관련 된 기록은 대부분
아버지를 가슴 아프게 하는 것들 뿐이다.
가슴이 아프다는 그 한마디 뿐
그 이상의 아무런 언급도 없는 아버지의 일기는
여태 내가 만난 어떤 슬픈 글귀보다 내 마음에 아프게 와 닿는다.
비죽이 눈물이 묻어난다.

<죄송해요, 아버지.
이 나이가 되도록 아버지의 가슴에 줄곧 멍으로 있는 딸
제가 아무리 씩씩한 모습을 보여도 당신은 가슴이 아프다는 것을 압니다.
제가 아버지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저려 오듯이...
그래도 늘 열심히 살께요.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