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회 | 포토갤러리 | - 게시판담당 : 박화림
글 수 1,334
나는 한국에서 25년을 살았는데
인천에서 태어나 김포, 인천, 서울에서 몇해씩 살았으므로
어디가 정말 고향이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
초등학교 6학년때 까지 살던 김포 양곡이 고향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 한곳에만 30년을 살았으니
시카고가 진짜 나의 고향이라고 할수 밖에 없다.
한국에서 미국오기 위해 필요한 수속인 엑스레이를 찍으러 위생병원에 갔는데 미국의사는 나에게 물었다.
“미국 어디로 가느냐?”고.
“시카고로 갑니다.”라고 했더니
그는 “왜 그런 위험한 곳으로 가느냐?”고 깜짝 놀라는 표현을 했다.
마피아인지 알 카포네인지가 판을 치던 시카고는
위험한 깡패의 소굴쯤으로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어두컴컴한 도둑의 소굴로 흰옷을 입고 무방비 상태로 들어가는 순진한 아이,
불쌍한 이국의 소녀쯤으로 내가 그눈에 비쳤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말을 들어서가 아니라 처음 공항에서 내려 한인 타운으로 가는 길은
정말로 실망을 금할수 없는 풍경이었다.
한국에서는 볼수 없던 쓰레기들이 바람에 불려 이리저리 왔다갔다 했다.
영화에서 보던 멋진 건물들은 다 어디로가고 구질스런 시시한 건물들 사이에 쓰레기가 쌓여 있었다.
시카고는 바람이 많이 부는 동네여서 그 강한 바람이
종이 나부랑이들을 똘만이 처럼 데리고 구석구석 휘젖고 다녔다.
더구나 가자마자 처음에 살던 곳은 시카고에서도 우범지역이던 메디칼 센터 지역이었다.
밖에 나가면 무지막지하게 몸이 큰, 더러워보이는 사람들이 걸어 다녔다.
남편은 혼자 밤에 나가다니지 말라고 당부했다.
새 색시를 누가 납치라도 할것 같이…
써버브에 살기 시작하면서 그 말은 듣지 않아도 되었다.
우리가 직장을 따라 집을 사서 이사한 곳은 남서부 교외였는데
시카고 다운타운에서 50분이면 갈수있는 멀지 않은 곳이었다.
학교도 좋고 살기가 편리한 조용한 동네였다.
나는 한국에서 중학교 때부터 대학교 때까지, 아니 결혼 직전까지 자취를 했었다.
일년에 한번 내지 두번씩 자취 방을 이사 다니던 나에게
내 집이라는 것을 장만한다는 것이
얼마나 벅찬 감격이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집을 사고 수속을 밟는동안 시간만 나면 그집에 찾아 가서 바깥을 서성이었다. 그리고 속으로 기도하는 마음이었다.
“주님 우리 이사할 때까지 재림하지 마세요!
한번 내 집에서 살고 싶어요 ” 라고…
나는 그 집에서 30년에서 일년을 못한 세월을 보냈다.
한 집에 뿌리박고 오래 산것은 얼마나 이사다니는 것을 싫어 했었는지 말해주는 것일게다.
또한 주변 머리 없음도 확실히 들켜 버리게 해준다.
왜냐하면 옮기고 옮기면서 재산을 증식하는 것이 쉽다는 것은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아는 기본적인 경제 지식이니까...
어린 딸 하나만 데리고 이사왔다고
“그 큰 집에 세 식구 밖에 안 사네..” 했던 이웃이
우리 집에서 겨울이 지나면 아기가 하나 더 기어나오고
또 한 겨울을 나면 또 하나씩 더 기어 나와서 4년만에 아이가 넷이 되었다고 놀려 먹었다.
연년생 아이들 넷이 서로 친구가 되어 얼마나 친했는지!
쿵쿵대며 아래 윗층을 쉴새없이 요란히 뛰어다니던 그 집….
한번은 전화를 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조용하였다. 다 끝내고 나가보니
밥알을 물에 섞어 부엌 바닥에 도배를 하고 있었다.
네 놈이 숨도 안쉬고 열심히..
또 한번은 킬킬대며 왔다갔다 하길래 왠일인가 가 보았더니
물을 화장실 변기에서 퍼 날라서 소파에다 들이 붓는 것이 아닌가!
그게 무슨 재미인지는 모르지만.ㅎㅎㅎ..
세상에, 한번은 우리 없는 사이에 이웃집 아이들까지 몰려와서 지붕 밑 방에서 놀다가 천장에 구멍이 나버렸다.
집에 가보니 아이들이 떨어진 부엌 천장엔 구멍이 제법 컸고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다행히 지붕 밑에서 떨어진 아이들 예닐곱 명이 아무도 안다쳤으니 그것만해도 얼마나 감사했는지!
아이들은 크게 야단 맞은 일이라고 기억을 하지만 우리는 그냥 넘어갔다고 기억한다.
너무나 놀라서 야단도 못쳤던 것이라고...
'문제는 기회'라고, 덕분에 부엌 천장을 오크 나무로 덮어서 집이 더 멋지게 데코레이션이 되었다.
이번에 조카 결혼식 때문에 시카고를 다녀오며 또 다시 감회가 새로왔다.
그 집을 떠난지 3년….나는 옛날 살던 집에 가서 사진을 찍어왔다.
새 주인이 다시 꾸미느라 집 앞의 나무들을 다 잘라 버려서 훵하게 변했지만...
이 집은 앞에서보면 조촐한데 들어가면 아주 널찍한 가족실이 있어서 너무나 시원한 집이다.
그 큰 가족실 때문에그곳에 교회 식구들을 모아 예배드리고 싶다고 그집을 샀었는데...
시카고도 세월이 가면서 많이 변했다.
시내 다운타운 근방의 헌집들은 눈을 씻고도 못찾는다.
고급 콘도들이 지어지고 흑인들이 넘쳐나던 다운타운에
이제는 잘 생긴 젊은 여피들이 활보한다. 그리고 옛날에는 그들이 서버브로 출퇴근을 했지만
이제는 다운타운에서 비싼 집에서들 산다.
그것은 데일리 시장의 정치의 성공으로 이룬 업적이라고 볼수 있다.
시카고는 더이상 더럽고 위험한 곳이 아니라 살기 좋고 깨끗한 곳,
만족도가 아주 높은 도시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는 공항에서부터 많은 꽃들이 반기며 깨끗한 국제 도시의 손색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에는 가볼수 없었지만 레
인천에서 태어나 김포, 인천, 서울에서 몇해씩 살았으므로
어디가 정말 고향이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
초등학교 6학년때 까지 살던 김포 양곡이 고향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 한곳에만 30년을 살았으니
시카고가 진짜 나의 고향이라고 할수 밖에 없다.
한국에서 미국오기 위해 필요한 수속인 엑스레이를 찍으러 위생병원에 갔는데 미국의사는 나에게 물었다.
“미국 어디로 가느냐?”고.
“시카고로 갑니다.”라고 했더니
그는 “왜 그런 위험한 곳으로 가느냐?”고 깜짝 놀라는 표현을 했다.
마피아인지 알 카포네인지가 판을 치던 시카고는
위험한 깡패의 소굴쯤으로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어두컴컴한 도둑의 소굴로 흰옷을 입고 무방비 상태로 들어가는 순진한 아이,
불쌍한 이국의 소녀쯤으로 내가 그눈에 비쳤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말을 들어서가 아니라 처음 공항에서 내려 한인 타운으로 가는 길은
정말로 실망을 금할수 없는 풍경이었다.
한국에서는 볼수 없던 쓰레기들이 바람에 불려 이리저리 왔다갔다 했다.
영화에서 보던 멋진 건물들은 다 어디로가고 구질스런 시시한 건물들 사이에 쓰레기가 쌓여 있었다.
시카고는 바람이 많이 부는 동네여서 그 강한 바람이
종이 나부랑이들을 똘만이 처럼 데리고 구석구석 휘젖고 다녔다.
더구나 가자마자 처음에 살던 곳은 시카고에서도 우범지역이던 메디칼 센터 지역이었다.
밖에 나가면 무지막지하게 몸이 큰, 더러워보이는 사람들이 걸어 다녔다.
남편은 혼자 밤에 나가다니지 말라고 당부했다.
새 색시를 누가 납치라도 할것 같이…
써버브에 살기 시작하면서 그 말은 듣지 않아도 되었다.
우리가 직장을 따라 집을 사서 이사한 곳은 남서부 교외였는데
시카고 다운타운에서 50분이면 갈수있는 멀지 않은 곳이었다.
학교도 좋고 살기가 편리한 조용한 동네였다.
나는 한국에서 중학교 때부터 대학교 때까지, 아니 결혼 직전까지 자취를 했었다.
일년에 한번 내지 두번씩 자취 방을 이사 다니던 나에게
내 집이라는 것을 장만한다는 것이
얼마나 벅찬 감격이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집을 사고 수속을 밟는동안 시간만 나면 그집에 찾아 가서 바깥을 서성이었다. 그리고 속으로 기도하는 마음이었다.
“주님 우리 이사할 때까지 재림하지 마세요!
한번 내 집에서 살고 싶어요 ” 라고…
나는 그 집에서 30년에서 일년을 못한 세월을 보냈다.
한 집에 뿌리박고 오래 산것은 얼마나 이사다니는 것을 싫어 했었는지 말해주는 것일게다.
또한 주변 머리 없음도 확실히 들켜 버리게 해준다.
왜냐하면 옮기고 옮기면서 재산을 증식하는 것이 쉽다는 것은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아는 기본적인 경제 지식이니까...
어린 딸 하나만 데리고 이사왔다고
“그 큰 집에 세 식구 밖에 안 사네..” 했던 이웃이
우리 집에서 겨울이 지나면 아기가 하나 더 기어나오고
또 한 겨울을 나면 또 하나씩 더 기어 나와서 4년만에 아이가 넷이 되었다고 놀려 먹었다.
연년생 아이들 넷이 서로 친구가 되어 얼마나 친했는지!
쿵쿵대며 아래 윗층을 쉴새없이 요란히 뛰어다니던 그 집….
한번은 전화를 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조용하였다. 다 끝내고 나가보니
밥알을 물에 섞어 부엌 바닥에 도배를 하고 있었다.
네 놈이 숨도 안쉬고 열심히..
또 한번은 킬킬대며 왔다갔다 하길래 왠일인가 가 보았더니
물을 화장실 변기에서 퍼 날라서 소파에다 들이 붓는 것이 아닌가!
그게 무슨 재미인지는 모르지만.ㅎㅎㅎ..
세상에, 한번은 우리 없는 사이에 이웃집 아이들까지 몰려와서 지붕 밑 방에서 놀다가 천장에 구멍이 나버렸다.
집에 가보니 아이들이 떨어진 부엌 천장엔 구멍이 제법 컸고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다행히 지붕 밑에서 떨어진 아이들 예닐곱 명이 아무도 안다쳤으니 그것만해도 얼마나 감사했는지!
아이들은 크게 야단 맞은 일이라고 기억을 하지만 우리는 그냥 넘어갔다고 기억한다.
너무나 놀라서 야단도 못쳤던 것이라고...
'문제는 기회'라고, 덕분에 부엌 천장을 오크 나무로 덮어서 집이 더 멋지게 데코레이션이 되었다.
이번에 조카 결혼식 때문에 시카고를 다녀오며 또 다시 감회가 새로왔다.
그 집을 떠난지 3년….나는 옛날 살던 집에 가서 사진을 찍어왔다.
새 주인이 다시 꾸미느라 집 앞의 나무들을 다 잘라 버려서 훵하게 변했지만...
이 집은 앞에서보면 조촐한데 들어가면 아주 널찍한 가족실이 있어서 너무나 시원한 집이다.
그 큰 가족실 때문에그곳에 교회 식구들을 모아 예배드리고 싶다고 그집을 샀었는데...
시카고도 세월이 가면서 많이 변했다.
시내 다운타운 근방의 헌집들은 눈을 씻고도 못찾는다.
고급 콘도들이 지어지고 흑인들이 넘쳐나던 다운타운에
이제는 잘 생긴 젊은 여피들이 활보한다. 그리고 옛날에는 그들이 서버브로 출퇴근을 했지만
이제는 다운타운에서 비싼 집에서들 산다.
그것은 데일리 시장의 정치의 성공으로 이룬 업적이라고 볼수 있다.
시카고는 더이상 더럽고 위험한 곳이 아니라 살기 좋고 깨끗한 곳,
만족도가 아주 높은 도시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는 공항에서부터 많은 꽃들이 반기며 깨끗한 국제 도시의 손색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에는 가볼수 없었지만 레
2007.11.10 08:24:56 (*.172.221.40)
인선아~
마음 속 깊은 곳에 많은 기억들로 남아 있는,
너와 너의 자녀들이 함께 했던
교우들과 함께 했던,
따뜻한 모습으로 떠오르는, 그 곳이 바로 '고향'이지.
나는 올해 초에 한국을 다녀 온 뒤, '고향'에 대해
다시 생각 해 보는 시간이 있었지.
그래서 글 한 편 쓰기도 했다만......
13년 동안 살았던, 네브라스카 '오마하'는
나에게 무엇이었을까?
또 하나의 고향이라면, 지금은 너무 아릿한 기억으로 가득하네.
....................................
'고향'이란 살면서 만들어 진다고 생각 해.
그래서 '정들면 고향'이란, 참 맞는 말 같애.
마음 속 깊은 곳에 많은 기억들로 남아 있는,
너와 너의 자녀들이 함께 했던
교우들과 함께 했던,
따뜻한 모습으로 떠오르는, 그 곳이 바로 '고향'이지.
나는 올해 초에 한국을 다녀 온 뒤, '고향'에 대해
다시 생각 해 보는 시간이 있었지.
그래서 글 한 편 쓰기도 했다만......
13년 동안 살았던, 네브라스카 '오마하'는
나에게 무엇이었을까?
또 하나의 고향이라면, 지금은 너무 아릿한 기억으로 가득하네.
....................................
'고향'이란 살면서 만들어 진다고 생각 해.
그래서 '정들면 고향'이란, 참 맞는 말 같애.
네 글을 읽으니 그 노래가 떠오른다.
타향을 고향으로 만들어가는데 교회가 중심이 되었었구나.
아름다운 교회로 그려진다.
그런데 30 년이나 살던 곳을 떠났으니 새로운 情에 도전해야겠네 ㅎㅎㅎ(:ab)(: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