킴안이


오래전 우리집에서 2년간 데리고 살았던
그 베트남 틴에이저 여자애 이름은
가끔 밖에는 생각나지 않는 잊혀진 이름이다.

중국 피가 섞였는지 통통하게 살도 찌고
베트남 아이같지 않게 희고, 웃는 낯이 예쁘기까지한 여자애...

우리집 뒷집에는 한국인 입양아를 데려다 키우는 백인 가정이 있었다.
한국인 양녀 뿐 아니라 의붓아이들도 키워주는 집이었다.
정부에서 가정 문제가 있는 아이들을 당분간 맡아 달라고 부탁하면 약간의 돈을 받고 그일을 해주는데
몇달 혹은 몇년씩 키우다가 보내기도 하였고
한번은 어린 장애아이를 데려다 키우더니 그 아이도 입양을 하겠다고 하였다.
아무리 다 퍼줘도 계속 넘치는 사랑을 주체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런 사람들을 가까이서 본적이 없던 나는 진심어린 존경을 보내기도 했었는데…

어느날 그녀가 놀러와서 킴안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자기들이 데리고 있으려고 했는데 아들들 넷이 다 떡거머리 총각들이어서
데려오기가 좀 걱정된다며 맡을 의향이 없느냐는 것이었다.

우리 부부는 대답이 생각보다 항상 빨라서 무조건 그러자고 했다.
그런데 의붓부모가 되는 길은 상당히 까다로와서 몇번의 인터뷰를 하고
까다로운 심사를 받고 나서야 간신히 허락이 되었던것을 기억한다.
가정이 화목한지, 생활이 넉넉한지, 맡아 기르려는 목적이 무엇인지 등등 캐물었다.

킴안이는 공산화되는 베트남에서 보트타고 도망나온 피난민이었다.
150 명이 보트를 타고 피난 나올때
바다 한 가운데서 타일랜드 해상 도적에게 배에 탔던 모두가 다 귀중품을 빼앗기고 수장 당했다고 한다.

그애만 유일하게 목숨만은 건졌다지만
그 망망 대해에서 사흘낮 사흘밤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작은 나무판에 밀려다니다가 큰 물고기 밥이 될뻔 했던 이야기며,

죽기직전 간신히 구출되었지만 피난민 수용소에서는
직원에게 강간도 당하는 둥 어린나이에 온갖 고초를 당했다는
영화에나 나옴직한 이야기를 함께 울며 들었다.

피난민 수용소에서 몇달을 지내다가 미국에 먼저 왔던 가족연고로 이곳에 왔다고 한다.
그때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였는데 오랜만에 미국에서 만난 아버지는
새 엄마와 살고 있었고 딸을 만난 것이 안 기뻤던지 구박을 하였단다.
그래서 싸우고 집에서 가출하여 미국 정부의 보호를 받게 된 것이다.
고등학교를 다닐 나이였기 때문에 우리집에 기거하며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우리는 정부에서 비용을 매달 200불인가 조금씩 받기도 했다.

그 아이는 아직 영어가 서툴어서 의사소통이 안되어 처음엔 오해도 많고 힘든일이 많이 있었다.
예를 들어 변기에 생리대를 넣어서 하수구가 막히게 만들곤 했었다.
설명을 해주면 오케이 오케이는 했지만 못알아 먹고 자꾸 막히게 만들었으니까...

그때는 남편이 아직 의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아이들은 어리고 우리들은 뭔가 항상 바빠서
아이들 밥도 부려먹은 적도 많이 있었던 것 같다.
큰 아이가 아이들과 함께 있으니 마음이 놓이기도 했고....

어느날 그애 방에 가보니 제사를 드리고 있었다.
밥상에 과일이며 여러가지를 차려놓고 비는 것이었다.
기독교인인 나는 기분이 섬찟하였지만
자기 엄마인지 할머니인지를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 한편 기특하게도 생각이 되었다.

우리 딸에게 킴안하면 생각나는 일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겨드랑이 털을 뽑아 달라고 해서
뽑아주면 커피캔디를 주곤 했는데
그일이 너무 싫었지만 나이가 많이 차이나는 사람이라 무서워서 해주곤 하였단다.
그래서 커피를 싫어하게 되었다나, 그런일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한번은 어린딸 메리가 귀가 부어 올라서 급히 수술하게 된일이 있었다.
같은날 킴안이는 왠일인지 학교에서 졸도를 하였다고 병원에 입원을 하였다
동시에 같은 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왜 우리 어린딸은 그렇게 애처롭고 그애는 공연히 미운지 알수가 없었다.

그 힘든 수술을 하는데도 우리 딸은 하나도 안보채고 아프다는 말 없이
두번 “으으”하고 끝났다고 의사가 기특하다고 했고,
킴안이는 무슨 이유로 졸도를 했는지도 알수 없이
멀쩡하고 건강한데도 공연히 엄살을 했대서 그랬는지…

아무튼 남의 아이를 데리고 있는 일이 쉽지 않은 일인지 처음 안 일이었다.
처음엔 불쌍하기도하고 돕는 손길도 반가왔지만 날이 갈수록 그렇지 않았다.
내가 처음 그아이를 데려올 때는 아주 잘해주려는 맘 뿐이었는데
세월이 갈수록 눈에 나는 일이 많은 것이었다.

그애는 가끔 거짓말도 하는데 그것이 제일 못 참겠었다.
카운셀러 이야기로는 집안에 문제가 있는 아이들은 의례 거짓말을 해서
자기 자신을 기분좋게 만드는 법이라고 말해 주어서 간신히 이해하기로 하였지만…
우리 아이들이 거짓말을 했다면 그렇게까지나 기분이 나빴을까?  

크리스챤이라서가 아니라 시골사람인 나는 스스로를 착한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었는데
이일을 계기로 내가 별로 착하지 않은 사람이란 자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착한사람이란 손해를 볼지라도 연고없는 시시한 사람을 잘 돌봐주는 사람이라고 정의 한다면...

사실 그런 적이 한번 더 있었다.
시어머님이 오시면 아주 잘해 드릴 수 있을 줄로 자신했는데 그렇게 못했던 일....
그때도 마음이 불편하고 아, 나도 별수 없이 세상 며느리들과 다름이 없구나 한탄 하기도 했었으니까…

킴안이를 말로 구박하거나 힘들게 해준 적은 없지만
그애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떠나가게 될때 얼마나 시원해 했던지 ....
손해는 조금도 안보았을텐데 그렇게 밖에 마음을 주지 못했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그후로부터 남의 아이 키워주는 사람들을 더욱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킴안이가 우리를 떠난 후 텍사스에서 살다가 꼭 두번 집에 왔었는데
처음 와서는 돈많은 15살 쯤 차이 나는 홍콩 남자에게 시집간다고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나는 막 말렸다.
그 남자가 전처가 있다는 것도 기분 나쁘고 나이가 많다는 것도 기분이 나빴으니까.

우리 집에 있는 동안 교회도 다니고 예수 믿는다고 했었는데
그당시 누누히 “좋은 크리스챤, 베트남 사람, 젊은이”에게 결혼하라고 충고했었는데
또 다시 그 이야기를 해봤자 소용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는 아이를 둘을 낳았고,
그 남자가 사업에 망하여 빈털털이가 되어  
나라에서 돈을 타먹는다는 것이었다. 기가막혀서!
그 이후로 더이상 오지 않고 소식이 끊어졌지만  
마음 한구석에 조금 미안한 마음으로 그녀를 기억한다.
     (2007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