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회 | 포토갤러리 | - 게시판담당 : 박화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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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아이 낳던 이야기
어제 우리교회 식구 뷔나가 드디어 해산을 했다.
뷔나는 중국여자인데 한국남자와 결혼한 31살짜리 젊은 부인이다.
그녀의 첫 아이라 거의 10일을 극매였다.
병원도 세번 가서 아직 안됬다고 집으로 돌려보내기를 세번 했단다.
어제는 새벽 3시에 더 이상 못참는다고 병원에 들어갔는데
두시간이면 된다든 것이 또 하루 낮을 지나고
저녁 6시 반에 간신히 첫 아들을 낳은 것이다.
허리가 너무 아파서 힘을 못쓰고 쩔쩔 매었다는 소식이었다.
뷔나 남편까지 아주 얼이 빠지도록 혼줄이 났다는 소식도 있었다.
다행히 순산을 하고 산모와 아기 모두 건강하다 한다.
그 얘기들을 하다가 아줌마들이 자기들 아이 낳았을 때 얽힌 이야기들을 쏟아내게 되었다.
영미씨는 아들 좋아하는 남편에게 첫 아들을 낳아 줄때,
그 남편이 얼마나 좋아했는지
잘 알지도 못하던 이웃에게 집집이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했고
친구들에게 전화를 안한 집이 없었다고한다.
그리고는 아들과 첫번 대면을 한다고 목욕을 하고 정장으로 갈아입고 왔단다.
더 우스운 것은 아내가 임산했을때 병원으로 운전하고 데리고 갈때
막 함부로 속력을 낸건데
그건 내내 별르던 일이 었다고..
혹 경찰이 따라오면 배부른 자기 아내가 고통하는 것을 보이며 어깨를 으쓱할것이었다는데
애재라, 아무리 속력을 내고 또 내도 경찰이 안보이더라나!
두고두고 애드러워한다는 이야기다.
나는 더우스운 이야기가 있다.
언제 임신이 되었는줄도 언제 해산 예정일인지도 모르던 첫 애때 이야기다.
한번 살짝 졸도를 해서야 임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마 그때가 3개월 쯤 되었을게다.
그래서 산부인과 의사를 찾아갔다.
남편이 아는 분이었는데 인사를 하고
다음 달부터 정식으로 진찰을 다니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차일피일 하다가는 그날이 닥친것이다!
실은 한국의사이니 챙피하게 생각되어 한번도 내진을 받으러 못 간것이었다.
그날, 아침부터 은행으로, 우체국으로, 일을 보고 12시쯤 아파트로 돌아가는데
아래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갑자기 잘 움직일수가 없었다
그래서 간신히 천천히 걸어서 3층 아파트에 돌아왔다.
걱정이 되어 전화를 남편에게 했더니
아마 아기가 나올 모양인데 내일 이맘때나 해산할테니 걱정하지 말라한다.
그런가 보다 하고 있는데 걷기가 많이 불편해져서 기분이 이상했다.
이슬도 나왔던것 같다.
마침 친구가 전화를 해서 그렇다고 했더니 당장 자기 남편을 데리고 쫓아왔다.
그러더니 병원에 당장 가야된다고 내 남편을 오라고 했다.
그때가 5시경, 간단히 짐을 챙겨서 병원엘 가는데 너무너무 힘들었다.
그런데 아직은 힘을 주지 말라는 것이었다.
30분 가는 병원 길이 열흘길처럼 먼 길 같았다.
병원에서는 난리가났다.
아무런 병원기록도 의사 기록도 없으니까..
산부인과 의사를 처음 인사한날 보고 그날 두번째로 본 것이니 기록이 있을 턱이 있는가?
간호원들이 "뭐 이런 여자가 있나?"며 나를 미개인 취급을 했다.
사실 내가 지금 생각해도 요새 세상에 그럴순 없었다.
간호원들이 무식한 나를 구박하면서 그때부터 키를 잰다, 몸무게를 잰다하는 것이었다.
나는 서있지도 못하겠는데 그런 짓거리였다.
챙피한 맘으로 남편이 레지던트로 일한다고 슬쩍 고백을 했다.
그제서야 아마 집에서 잘 돌보았는가 생각하면서 웃어주었다.
한번도 비타민도 안사다준, 밥만 잘 먹으면 된다고 한,
엉터리 중의 엉터리가 내 남편인줄 알면 들여보내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간신히 해산방으로 들어갈수 있었고
침대에 눕자마자 꼭 두번 마음껏 힘을 주니까 아기가 나온 것이었다!
그때가 7시쯤, 정작 힘든건 두시간 쯤이었나? 한시간 쯤이었나?
나처럼 아기를 쉽게 낳은사람도 별로 없어서 가끔 생각하면서 웃는다.
두째 애는 보나마나 길에서 빠치겠다고 사람들이 놀렸다.
첫째때 얼마나 챙피했는지, 두째 때부터는 미국 의사를 정하여 꼬박꼬박 진찰도 다녔다.
해산이 임박해서 미리 들어가서 입원을 하곤 했다.
첫 애처럼 빨리 나오지 않아서 너무 빨리 왔는가 걱정을 조금했던 기억이난다.
그래도 몇시간이 안되어 아기를 낳을수 있었다.
너무 쉽게 애 넷을 낳아버렸으니 남편을 조금치도 고생 시킬수가 없었다.
그는 얼마나 복이 많은 사람인지!
애를 더 낳을 걸 그랬단 이야기나 가끔하니 웃기는 사람이다.
뷔나가 회복이 너무 오래걸릴까봐 걱정이된다.
고생한만큼 회복기간도 더 걸릴 것이니까...
미역국을 좀 끓여다 줘야겠다.
부모님들이 오시려면 한주일은 더 있어야하니까...
어제 우리교회 식구 뷔나가 드디어 해산을 했다.
뷔나는 중국여자인데 한국남자와 결혼한 31살짜리 젊은 부인이다.
그녀의 첫 아이라 거의 10일을 극매였다.
병원도 세번 가서 아직 안됬다고 집으로 돌려보내기를 세번 했단다.
어제는 새벽 3시에 더 이상 못참는다고 병원에 들어갔는데
두시간이면 된다든 것이 또 하루 낮을 지나고
저녁 6시 반에 간신히 첫 아들을 낳은 것이다.
허리가 너무 아파서 힘을 못쓰고 쩔쩔 매었다는 소식이었다.
뷔나 남편까지 아주 얼이 빠지도록 혼줄이 났다는 소식도 있었다.
다행히 순산을 하고 산모와 아기 모두 건강하다 한다.
그 얘기들을 하다가 아줌마들이 자기들 아이 낳았을 때 얽힌 이야기들을 쏟아내게 되었다.
영미씨는 아들 좋아하는 남편에게 첫 아들을 낳아 줄때,
그 남편이 얼마나 좋아했는지
잘 알지도 못하던 이웃에게 집집이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했고
친구들에게 전화를 안한 집이 없었다고한다.
그리고는 아들과 첫번 대면을 한다고 목욕을 하고 정장으로 갈아입고 왔단다.
더 우스운 것은 아내가 임산했을때 병원으로 운전하고 데리고 갈때
막 함부로 속력을 낸건데
그건 내내 별르던 일이 었다고..
혹 경찰이 따라오면 배부른 자기 아내가 고통하는 것을 보이며 어깨를 으쓱할것이었다는데
애재라, 아무리 속력을 내고 또 내도 경찰이 안보이더라나!
두고두고 애드러워한다는 이야기다.
나는 더우스운 이야기가 있다.
언제 임신이 되었는줄도 언제 해산 예정일인지도 모르던 첫 애때 이야기다.
한번 살짝 졸도를 해서야 임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마 그때가 3개월 쯤 되었을게다.
그래서 산부인과 의사를 찾아갔다.
남편이 아는 분이었는데 인사를 하고
다음 달부터 정식으로 진찰을 다니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차일피일 하다가는 그날이 닥친것이다!
실은 한국의사이니 챙피하게 생각되어 한번도 내진을 받으러 못 간것이었다.
그날, 아침부터 은행으로, 우체국으로, 일을 보고 12시쯤 아파트로 돌아가는데
아래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갑자기 잘 움직일수가 없었다
그래서 간신히 천천히 걸어서 3층 아파트에 돌아왔다.
걱정이 되어 전화를 남편에게 했더니
아마 아기가 나올 모양인데 내일 이맘때나 해산할테니 걱정하지 말라한다.
그런가 보다 하고 있는데 걷기가 많이 불편해져서 기분이 이상했다.
이슬도 나왔던것 같다.
마침 친구가 전화를 해서 그렇다고 했더니 당장 자기 남편을 데리고 쫓아왔다.
그러더니 병원에 당장 가야된다고 내 남편을 오라고 했다.
그때가 5시경, 간단히 짐을 챙겨서 병원엘 가는데 너무너무 힘들었다.
그런데 아직은 힘을 주지 말라는 것이었다.
30분 가는 병원 길이 열흘길처럼 먼 길 같았다.
병원에서는 난리가났다.
아무런 병원기록도 의사 기록도 없으니까..
산부인과 의사를 처음 인사한날 보고 그날 두번째로 본 것이니 기록이 있을 턱이 있는가?
간호원들이 "뭐 이런 여자가 있나?"며 나를 미개인 취급을 했다.
사실 내가 지금 생각해도 요새 세상에 그럴순 없었다.
간호원들이 무식한 나를 구박하면서 그때부터 키를 잰다, 몸무게를 잰다하는 것이었다.
나는 서있지도 못하겠는데 그런 짓거리였다.
챙피한 맘으로 남편이 레지던트로 일한다고 슬쩍 고백을 했다.
그제서야 아마 집에서 잘 돌보았는가 생각하면서 웃어주었다.
한번도 비타민도 안사다준, 밥만 잘 먹으면 된다고 한,
엉터리 중의 엉터리가 내 남편인줄 알면 들여보내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간신히 해산방으로 들어갈수 있었고
침대에 눕자마자 꼭 두번 마음껏 힘을 주니까 아기가 나온 것이었다!
그때가 7시쯤, 정작 힘든건 두시간 쯤이었나? 한시간 쯤이었나?
나처럼 아기를 쉽게 낳은사람도 별로 없어서 가끔 생각하면서 웃는다.
두째 애는 보나마나 길에서 빠치겠다고 사람들이 놀렸다.
첫째때 얼마나 챙피했는지, 두째 때부터는 미국 의사를 정하여 꼬박꼬박 진찰도 다녔다.
해산이 임박해서 미리 들어가서 입원을 하곤 했다.
첫 애처럼 빨리 나오지 않아서 너무 빨리 왔는가 걱정을 조금했던 기억이난다.
그래도 몇시간이 안되어 아기를 낳을수 있었다.
너무 쉽게 애 넷을 낳아버렸으니 남편을 조금치도 고생 시킬수가 없었다.
그는 얼마나 복이 많은 사람인지!
애를 더 낳을 걸 그랬단 이야기나 가끔하니 웃기는 사람이다.
뷔나가 회복이 너무 오래걸릴까봐 걱정이된다.
고생한만큼 회복기간도 더 걸릴 것이니까...
미역국을 좀 끓여다 줘야겠다.
부모님들이 오시려면 한주일은 더 있어야하니까...
2007.02.15 20:27:17 (*.125.0.206)
인선아,
미국선 아기 병원비가 비싸서 최소한도 2천불이란 거금이 든다고 하더라.
그 당시엔 학생 신분이라 의료보험은 물론 저축은 꿈도 꾸지 못할 때거던.
그러다 마지막 학년되어
아주 좋은 외부 장학금을 받아 2천불을 모을 수 있었어.
그래서 임신한거 있지.
사실 아기를 낳으면 빈민 대상이 되어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예기는 들었는데
왠지 우리 애기를 "남의 나랏돈"으로 갖고 싶지 않았어.
쓸데없는 자존심의 발로인가 하고 지금도 의아해하는 부분이야.
게다가,
임신했다는 예기를 하는게 왜 그리 챙피한지
학생촌 여인들에게나 강의실의 학생들이나 교수들이 눈치 못채게
헐렁한 옷을 입고 다녔거던.
게다가
임신 마지막 몇달은 여름철이라
학교에 남지 못하고 타지에 나가 있으니
학교에선 아무도
내 임신을 몰랐던거야.
우리나라에선 병원갈 때마다 진찰비를 냈잖니.
그러니까 의사한테 갈 때마다 돈을 내는 줄 알았어.
모든 걸
임신에 관한 책 두권 사서 거기에 완전 의존한거야
지금쯤엔 태아가 이렇겠구나 짐작하면서.
나중에 출산 한달전에야 처음으로 의사한테 찾아갔더니,
어이없어 웃으시더라.
첫 임신 때 의사 진찰비 부터 출산 때 병원비 까지
총괄한다는 걸 모른거야.
게다가 병원 입원비가 비싸다는 예기는 들어가지고
이틀만에 퇴원해야겠다 마음 먹었는데 의사가 허락을 해주지 않더라고.
헤모로이드 라나
일어났다 앉았다 할 때마다 어찌나 아픈지
결국 3일만에 퇴원했어
그래도 그 때엔 "남의 나랏돈" 의지 하지 않은
대한민국의 딸이란
긍지로 살았던 것 같은데.
멩꽁이 짓 아님 어리석음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30여년 새월 후 지금에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d
미국선 아기 병원비가 비싸서 최소한도 2천불이란 거금이 든다고 하더라.
그 당시엔 학생 신분이라 의료보험은 물론 저축은 꿈도 꾸지 못할 때거던.
그러다 마지막 학년되어
아주 좋은 외부 장학금을 받아 2천불을 모을 수 있었어.
그래서 임신한거 있지.
사실 아기를 낳으면 빈민 대상이 되어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예기는 들었는데
왠지 우리 애기를 "남의 나랏돈"으로 갖고 싶지 않았어.
쓸데없는 자존심의 발로인가 하고 지금도 의아해하는 부분이야.
게다가,
임신했다는 예기를 하는게 왜 그리 챙피한지
학생촌 여인들에게나 강의실의 학생들이나 교수들이 눈치 못채게
헐렁한 옷을 입고 다녔거던.
게다가
임신 마지막 몇달은 여름철이라
학교에 남지 못하고 타지에 나가 있으니
학교에선 아무도
내 임신을 몰랐던거야.
우리나라에선 병원갈 때마다 진찰비를 냈잖니.
그러니까 의사한테 갈 때마다 돈을 내는 줄 알았어.
모든 걸
임신에 관한 책 두권 사서 거기에 완전 의존한거야
지금쯤엔 태아가 이렇겠구나 짐작하면서.
나중에 출산 한달전에야 처음으로 의사한테 찾아갔더니,
어이없어 웃으시더라.
첫 임신 때 의사 진찰비 부터 출산 때 병원비 까지
총괄한다는 걸 모른거야.
게다가 병원 입원비가 비싸다는 예기는 들어가지고
이틀만에 퇴원해야겠다 마음 먹었는데 의사가 허락을 해주지 않더라고.
헤모로이드 라나
일어났다 앉았다 할 때마다 어찌나 아픈지
결국 3일만에 퇴원했어
그래도 그 때엔 "남의 나랏돈" 의지 하지 않은
대한민국의 딸이란
긍지로 살았던 것 같은데.
멩꽁이 짓 아님 어리석음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30여년 새월 후 지금에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d
정례 옛날 얘기를 듣고 생각나서 다시 이곳에 옮겨왔어
참 우스운 이야기가 아니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