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소와 나


미국에 오자마자 아이를 갖기시작하여 첫5년은 네 아이를 키우느라 집에 붙어있었다.
막둥이가 1살이 되면서 나도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남편은 짧은 영어에 미국 의사 생활이 버거운지
사업을 하면 돈버는게 더 쉬울꺼란 생각을하였다.
그래서 내가 나서서 비지네스를 하는것을 장려하였다.
남편의 월급이 조금 모이면 그돈을 가지고 식당, 식품점, 구두수선소 등을 열어
구경도 못해본 일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별 재미를 보지 못하고  돈 번것을 다 갖다가 버린 셈이다.
식당은 헐값에 팔고,
친정집이 이민오니까 그들에게 식품점은 넘겼다.
나중 화려한 몰 안에 장소를 얻어 구두수선소를 시작한지 얼마 안되었을 어느날
남편은 과장과 다툰끝에 좋은직장을 헌신짝같이 내버리고 와버렸다.
나는 그의 고집을 알기때문에 돌이킬 생각을 하지못하고 내 맘을 돌렸다.
그동안 우릴 먹이느라 혼자 애쓴 셈이니 이제 내가 본격적으로 나서서 도와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구두 수선소만 가지고는 우리  살림이 안될것 같아 무얼할까 생각을 하였는데
그때 제일 만만한 것이 세탁소였다.
여동생이 뉴욕에서 새로 차렸는데 아주 잘하고 있다는 소식이요,
내 주위에도 세탁소로 돈벌어 의사보다 잘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결정을 하고는
세탁소를 보러 여러군데를 다닌 것이 아니라 꼭 한군데만 가보고 그냥 샀다.
평생 꼼꼼히 재보는것을 하지않고
급한 결정을 해서 고생을 사서한 적이 많았는데 그때도 꼭 그랬다.  
빨래가 많이 있다는 것만 보고 사기로한 것이었다.
나중보니 남의 드랍스토어 몇군데에서 픽업해가지고 온것이었고
그런건 이익보다 골치가 더 아픈 것인데 
세탁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정말 그냥 샀다.

나는 우리집 둘째 딸이요,
언니 아니면 동생이 궂은 일은 다하고
나는 요리조리 잘 빠지는 식으로 살았었다.
착한동생에게 “언니는 시집가서 일 못해서 쫒겨 올꺼야”
악담을 듣기도 했으니까 얼마나 얌체였을까.
일이 뭔지도 모른 나와 해본건 공부밖에 없는남편,
최악의 콤비가 세탁소를 시작했으니 볼을 보듯 고생이 뻔한 것이었다.  
일꾼 댓명을 데리고 일을 하는데 아무리해도 일이 안끝났다.
아침 7시에 문을 열어 7시에 닫는데 어떤날에는 5-6시까지 뒷일이 끝이 안나는 것이었다.
뒷일이 끝나야 앞엣 일을 끝내는데 말이다.
어떤 날엔 밤 9시 10시까지 해도 밀린 옷수선 일이 끝나지 않기도했다.
익숙해지기 전  처음 몇달 동안은 마치 눈이 뒤로 빠져 나가는 것같고
다리도 후들후들 떨렸다.
일꾼들이 일을 안끝내고 다 도망을 가버리면
혼자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울기도 여러번.

여름에는 얼마나 더웠는지!
땀이 비오듯 흘렀는데 지옥보다는 덜뜨거울거라고 서로 위로했다.
그 더운데 뜨거운 열로 프레스를 하는건
꼭 오븐 안에서 일하는것 같았다.
물을 한도 없이 마시며 견뎠다.
겨울에는 뒷일이 끝나면 보일러를 껏는데
즉시 추운 시카고 날씨에 덩달아 식어버려서 한기가 올라왔다.
전기 난로를 한두군데 켜도 시카고 추위를 당할수 있으랴만
난방비를 아끼려면 보일러를 켤수는 없었다.
덜덜 떨면서 중학교 재봉시간에 배운실력으로 옷수선을
틈틈히 손님 받아가면서 하는 것이다.
눈설미도 있고 손재주라면 자신있는 내가 생각나는 대로 고쳐주면
잘했다는 말을 해주는 손님도 있었다.
나중에는 단골이 많아져 옷수선 일만으로도 년5만불은 벌었다.

기계도 가끔 고장이 났다.
그 많은 기계가 차례로 고장이 나는 것이었다.
기계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남편과 나는
큰돈을 들여가며 기술자를 데려와서 고쳤다.
왠만한 사람들은 남편들이 고쳐가며 쓴다고 하지만
내 남편은 기계를 쳐다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할줄 아는게 그렇게도 없는 무재주일까.
남편은 20년 가까이 세탁소를 했지만 끝까지 스커트하나 옳게 찍지 못했고,
가장 기본이던 바지하나 제대로 다려서 걸지못했다.
세탁소 20년에 바지 하나 못 끝내는 사람은 내 남편 하나뿐이 없을것이다.
그래도 할일이 많아서 이리왔다 저리갔다하며 일하는 흉내는 내주는게 고마왔다.
남편은 그 많은 일 중에서  배달일, 종업원 월급주는일, 청소, 빨래 거는일,
그리고 짝 맞추는 일들을 했는데
옷을 잘못 맞춰 골탕을 먹일때도 많았다.
한개라도 잘못 엮어지면 그걸 찾아내느라 얼마나 시간이 들고 속이 상했는지!
그리고 그가 점심식사를 책임졌다.  
남편이 먹자고 졸라대지 않으면 먹지 못하고 일만 했을것이다.  
일만하다 죽었을것이다.

나는 앞에서 손님 받는것 부터 시작하여,
빨래를 챙겨 기계에 넣는것,
거는것, 스팟 빼는것, 프레스하는것, 뒷 손질하는것, 짝 맞추는것,
카버 씌우는것 제자리에 파일해 놓는것,
옷수선하는것 등, 일꾼들이 하다만것들을 닥치는대로 다하였다.
고생은 고생대로 했지만 돈은 맘대로 벌리지 않았다.
남들은 다 떼 돈벌은 세탁소 인데
우리는 교회 헌금내고
애들 넷 학교 보내고 근근히 살 정도 였다.
아이들 넷은 자기들끼리 컸다.
지금도 그때 못먹이고 못 입히고 키운것이 한스럽고 미안하다.

그렇게 근근히 살다가 늙어가는 남편이 남의 옷 배달하는게 보기 싫어서 다 떼버리고
우리것만 하기시작하였더니
드디어 차차 나아졌다.
나중 3-4년은 돈도 조금씩 모이기 시작하였다.
3 년전 두째딸 의과 대학 졸업식을 뉴욕  카네기홀에서 했는데
그곳에 가는 기념으로 그 세탁소를 팔았다.
팔때도 재지 않고 팔아버렸다.
처음에 일하기 힘들어서 팔고 싶었을때는 그렇게 안팔리더니
이제 좀 된가 싶으니 당장 팔수가 있었다.

나를 쏭 버드(노래하는 새)라고 부르던 단골 손님들에게는
한마디 예고도 상의도 안한 미안한 일이었다만 얼마나 시원했던지!
지금은 옛 이야기가 되어버린 세탁소! 내 훈련소!
꿈에도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지만
남의 나라에서 아이들 넷과 먹고 산 터전이었으니
고마와해야 할것이다.(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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