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회 | 포토갤러리 | - 게시판담당 : 박화림
글 수 1,334

육영수 여사님의 미담
충청북도 옥천출신으로서 종관(鍾寬)과 이경령(李慶齡) 사이의 차녀이다.
옥천읍내 죽향국민학교를 마치고 상경하여 배화여고를 졸업한 뒤
옥천여자중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1950년 전란으로 부산에 피난중일 때 육군 중령 박정희와 혼인하여 슬하에 1남2녀를 두었다.
1961년 박정희장군이 5.16 군사 혁명을 주도하여 성공한 뒤 1963년 10.15총선거에서
6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연임됨에 따라 대통령 영부인으로 11년간 내조하였다.
만년의 공직은 양지회(陽地會) 명예회장과 자연보존협회 총재였으나,
평소 재야 여론을 수렴하여 대통령에게 건의하기를 계속하는 가운데
'청와대 안의 야당'이라는 말도 들으며 남산에 어린이회관을 설립하는가 하면,
서울 구의동 일대에 어린이대공원을 조성하고 정수기술직업훈련원 설립을 비롯하여
재해대책기금조성과 정신박약아돕기운동 등 그늘진 곳을 직접 찾아다니며
사회복지사업에 분망한 일과를 보내었다.
어린이 잡지 '어깨동무' 창간과 서울대학교 기숙사 정영사를 건립하였다.
경향 각처의 여성회관 건립은 물론 연말마다 고아원, 양로원을 위문하여 따뜻한 구호의 손길을 미쳤고,
전국 77개소의 음성나환자촌까지 일일이 순방하면서 온정을 베풀었다.
1974년 8.15 광복절 기념식이 열린 서울국립극장 단상에서 문세광(文世光)에 저격당하여 서거하셨다.
박정희대통령 저격사건에 희생양이 된 격이어서 애도 인파가 청와대에 연일 쇄도하였는데,
국민장영결식이 8월19일 오전10시 중앙청(현 국립중앙박물관) 광장에서 각국 조문사절과
내외인사 3,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하게 거행되고 이날 오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묘비는 백일탈상 하루 전인 1974년 11월21일에 제막되었으며,
이듬해 기념사업회도 발적되어 추모책자를 펴냈다.
국민의 가슴을 후비고 지나간 그날의 아픔은 세월과 함께 아득히 잊혀져 가고 있다.
그러나 가난하고 병든 사람,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소외된 사람들의 편에 서서
진심으로 그들을 도우려고 애썼던 육 여사,
어린이와 노약자 그리고 힘없는 사람들을 지성으로 보살피는가 하면
사랑하는 남편의 '밝은 귀'가 되어 국민의 소리를 바르게 전함으로써
국민과 위정자와의 사이에 신뢰의 가교를 놓으려고 노력했던 '
청와대 야당'으로서의 육 여사는 많은 이의 가슴에 오늘도 살아 남아 있다.
글. 김두영 (전 청와대 제2부속실 행정관)
2006.12.09 00:29:04 (*.75.110.219)




☆ 고 육영수 여사의 청와대 생활 [수집자료]
1963년 12월 17일. 육여사 38세 때 제3공화국의 퍼스트 레이디로 청와대의 안주인이 되었다.
육여사는 청와대 생활이 시작되자 세 가지 일을 실천에 옮겼다.
그 첫째가 열심히 공부하는 일이었다.
다음은 많은 사람을 만나 시중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다.
끝으로 청와대의 살림을 중류 가정 정도로 하는 것이었다.
시장의 얘기와 관심사를 토대로 대통령께 직접 건의하여 <청와대 야당>으로 불리기도 했다.
육여사는 사회 각층으로부터의 들은 얘기를 그 나름으로 옳다고 생각되는 일이면
서슴없이 박대통령에게 직언했으며, 또한 솔직한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때로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되는 일을 박대통령이 들어주지 않을 때에는
<나는 정권 야욕도 조직도 없는 사람>이라는 슬기로운 농으로써 우회작전을 펴기도 했다.
육여사는 새벽 6시부터 밤 1시가 넘을 때까지 숨돌릴 겨를도 없이 바쁜 생활을 해야만 했다.
늘 고된 하루였다.
자녀들이 등교하고 난 7시 반부터 조반을 들기까지의
1시간 동안은 조간신문을 읽고 라디오를 들으며
대통령의 판단에 도움이 되도록 메모를 하거나 신문에 언더라인을 치는 일이었다.
9시경 식사가 끝나 박대통령이 집무실에 들어서면 육여사의 민원처리가 시작되었다.
하루에 50여 통이나 되는 서신을 일일이 읽어보고는
정성껏 답장을 해주기도 하고 좋은 일도 베풀어 주었다.
그런 바쁜 틈틈이 가족의 식단을 짜거나 옷가지를 매만지거나 실내장식에 마음을 쓰는 등
생활 주위의 정리를 했다. 그러다 보면 점심시간이 되었다.
박대통령과 함께 또는 혼자서 외부 손님을 초청하여 오찬을 나누었다.
하오는 접견시간이었다. 외국의 빈객을 비롯하여 사회 각계 각층의 인사들,
각 단체의 간부나 회원들, 벽촌의 어린이들, 새마을 지도자들, 일반 서민층 주부에
이르기까지 접견, 그 수많은 손님들에게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 했다.
하오 4시부터 6시까지는 공부시간이었다.
여러 전문 학자들을 초빙하여 세계사·문화사·종교사·역사·지리·철학·
고고학·경제학·교육학·외교 정치사·시문학 등 각 방면에 걸쳐 공부를 했다.
6시가 넘으면 가족과 함께 단란한 식사를 나누었다.
불가피한 일로 박대통령이 불참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전 식구가 한자리에 모여 식사를 했다.
때로는 예고 없이 허물없는 손님이 동석하기도 했다.
저녁 식사가 끝나면 석간신문을 살피고
라디오, 텔레비전의 뉴스를 체크하고, 자녀들과의 대화, 독서, 하오에
도착된 편지를 읽는 등 밤 1시가 될 때까지 일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이것이 보통의 육여사의 일과이지만
봉사활동, 지방시찰 등의 일이 겹칠 때는 눈코 뜰 새가 없게 된다.
한편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무엇하나
변변하게 갖춰진 것이 없던 시기에 선물포장을 제대로 하기위해 고심하고,
한국적 미각의 요리를 마련키 위해 꾸준한 노력과 연구를 거듭하고,
외빈의 편안한 방문을 위해서, '진실은 누구에게나 통하며
신의는 동서를 막론하고 믿음을 갖게한다' 고 말하며
따뜻한 정과 창의적인 기지를 발휘한 육여사는 그야말로 알뜰한 주부,
슬기로운 퍼스트레이디로서 선구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또한 외국을 방문할 때나 청와대에서 손님들을 접견할 때에도
언제나 한복을 즐겨 입었는데 이는 우리 한복의 우아한 아름다움을
널리 인식시킬수 있었고 외국을 방문할 때마다
'우아하고 매혹적인 퍼스트 레이디'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런 분주한 생활을 보다 못해 주위에서 너무 고되지 않느냐고 얘기하면
육여사는 서슴지 않고「내 생활 신조는 항상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면서
「최선을 다하지 못했을 때는 마치 숙제를 하지 않은 학생과 같은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언제나 차분한 여유와 부드러운 미소,
유쾌한 위트와 유머가 육여사의 주변에서 맴돌고 있었다
2006.12.09 00:36:10 (*.75.110.219)


*학처럼 청청하게 사시다가 그렇게 고운 나래를 접어 우리 곁을 떠난 육영수 여사.
오랜지 빛으로 물든 천지
제 29회 광복절을 앞두고 전국은 서서히 장마 전선에서 벗어나는 것 같았다.
광복절을 하루 앞둔 14일에는 서울에 0.3 밀리의 이슬비가 내렸을 뿐
동녘엔 구름이 걷히고 찔끔거리던 하늘도 갰다.
15일 10시 20분 육여사가 범인의 흉탄을 맞은 지 2분 뒤인
10시 22분부터 하늘은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이 비는 육여사가 서울대 부속병원에 입원해서 수술을 받기 시작한
10시 40분까지 내렸다. 이때의 강우량이 0. 2밀리였다.
육여사가 수술을 받기 시작하자 바로 그 순간부터 하늘도
슬픔을 억누르고 쾌유를 비는 듯 서울 지방에선 비가 내리지 않았다.
수술을 시작한 지 30분이 흘렀다. 그리고 또 10분이 흘렀다.
수술을 맡은 의사들의 얼굴에는 절망적인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하늘은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듯 1시 20분부터 좍좍 비를 쏟아냈다.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내렸다. 육여사가 서거한 7시까지 28. 5밀리의 비가 내렸다.
하오 7시. 육여사가 운명을 했다. 이 순간 하늘에 이변이 일어났다.
비가 그치고 흑회색으로 흐려있던 하늘이
갑자기 오렌지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건물의 벽도, 창문도, 온통 오렌지빛이었다.
이 오렌지빛은 약 30분 동안 서울을 물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육여사의 운구가 서울대 부속병원을 떠나 청와대에 도착하자
그 빛은 차차 엷어져 갔다.
이 빛은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영혼의 세계에서
육여사의 성스런 영혼을 맞기 위한
극락세계의 주황색 가교가 드리워진 것일지도 모른다
<퍼온 글>
지금 우리는 육영수여사를 그리워 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늘진 곳에 있는 불우한 사람들을 대변하였기 때문입니다
크게는 국가에서,작게는 가정에서 여성들이 할 일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현명한 여인이 있는 곳은 '힘의 균형'을 이루단고 했으니.
여성들 스스로가 힘을 길러서 '사회의 균형'을찾아가야 할 때이다
국가 안팍에 사회주의, 나아가서는 공산주의가 날 뛰고 있는 지금,
여성들은 개인 보다는 국가의 미래를 걱정해야 할 시기입니다
연말 연시를 맞이하여 내 이웃에 눈을 돌려 뜻있는 일을 한가지씩 해 보십시요
여성의 손길을 도움으로 필요로 하는 곳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손길을 잡고 아름답고 힘찬 내일의 태양을 같이 맞이 하십시요(:7)(:l)(:8)(:f)(:ac)
붉은 해가 떠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