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회 | 포토갤러리 | - 게시판담당 : 박화림
글 수 1,334
아버지
저녁식사를 한후 설겆이가 끝나면 “얘들아 이리와서 오락회하자”고 부르신다.
우리 칠남매는 모두 아랫목에 몰려 앉아 있고
하나씩 하나씩 뒷목에 서서 독창을 하거나 춤을 추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이 나가서 노래하면서 재롱을 부리면
우리 아버지는 신이나서 박수를 치시고 좋아하셨다.
잘한 아이는 일등상으로 지전을 주시기도 했다.
아버지께서는 자주 우리를 하나씩 하나씩 껴안고 귓속에 대고 소근소근 노래를 해주셨다.
고무줄을 귀에 대고 딩딩 소리를 반주삼아 노래를 해주시기도 하셨다.
아버지는 많은 노래가사를 85세인 지금까지도 외우고 계시지만
젊을 때부터 노래하시기를 그렇게나 좋아하셨다.
대부분 유행가 가락밖에 모르셨고
아이들이 그런 노래부르면 안되는 줄도 모르시고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셨다.
멋도 모른 언니는 소학교에 입학하여 노래한다고 손을 들고 했다가
그런노래를 부른다고 야단을 맞기도 했단다.
아버지는 술을 즐겨 드시는 분이 아니셔서 술 취하고 주정 부린 적은 단 한번도 기억에 없다.
한번은 어디서 술을 잡숫고 들어오시는데, 흥얼흥얼 하시고 중 문턱을 넘으시자 마자
엄마는 재빨리 사랑방으로 안내하셨다. 술이 깨야 안방에 들어가게 하셨다.
술은 어쩌다가 조금드시는데 조금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 지셨고
그때마다 기분이 아주 좋으신지 우리 모두에게 용돈을 주셨다.
엄마는 우리 7남매를 집에서 해산을 하셨다.
어떤 때는 할머니가 오시기도 하시지만 대부분 아버지께서 탯줄도 끊으시고 수발을 다 하셨다.
해산이 끝나면 아버지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탯줄은 쌀 껍질속에 파묻고 태우셨으며,
큰 가마 솥에 미역국을 잔뜩 끓여 놓으셨다.
우리 아버지는 배고프실때는 잘 못참으시지만 그외에는 늘 기분이 좋으셨다.
엄마가 음식을 짜게할 때는 “짭짤해서 맛있다” 하시고 싱거우면 “심심해서 맛있는거야” 하셨다.
두분이 다퉈야할 때가 있으면 집에서 나가서 우리 모르는데서 싸우고 들어오셨다.
아버지는 결혼 전에 일본인 고급관리를 위해 일을 하신 적이 있었는데,
수준 높은 일본 사람들은 남편들이 아내들에게 잘하더라는 이야기를 하셨다.
우리가 살던 시골 고장에는 여자를 홀대하던 사람들이 흔했으나
일본 관리들의 좋은 점을 본 받아서 인지 아버지는 엄마께 참 잘하셨다.
식솔은 많고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다 뺏기고 사시는 엄마를 위해
사탕이나 먹을 것을 몰래 숨겨놓고 주시기도 한것 같다.
가끔 나도 야금야금 훔쳐내어 먹고 흔적을 안 남기려고 애쓰던 기억이난다.
어떤 때 우리들한테 “너희들이 암만 예뻐도 네 엄마만 못하다” 고 말씀 하셨는데
엄마가 듣는데서 일부러 그리하셨다.
아버지가 아주 자상하시니까 우리 모두 아버지를 좋아해서
세상에 우리 아버지가 제일 잘난 남자인 줄 알았다.
그 환상이 깨진 건 대학에 가서였다.
첫번 전시회를 보시러 아버지께서 혼자 오신 적이 있었다.
얼마나 촌티가 나고 시시해보이는지 친구들이 많이 알아볼까봐 신경이 써질 정도 였다.
나중에 미국에 이민오실 때 비행장에 마중 나가보니
오랜만에 만난 우리 아버지는 완전히 아메리칸 인디안 스타일이셨다.
툭나온 광대 뼈에, 약간 뻐드렁니에, 농사군의 검은 얼굴 색…
어떻게 한때 아버지를 세상에서 제일 잘난 남자인걸로 착각을 한적이 있었다니!
다시 옛날 국민학교 때로 돌아가서 아버지께서 방앗간을 하실 때
우리 시골 동네에 처음으로 전화가 생겼다.
집과 방앗간에 전화를 놔서 나는 집에서 아버지께 전화를 자주 하고 책을 읽어 드렸다.
그러면 만사를 제쳐놓고 아버지는 가만히 들어주시고 “그래 그래” 하시며 그렇게 좋아하셨다.
또 우리 아버지 같이 유머가 좋은 양반도 없으실게다.
한번은 세째 남동생의 손을 들여다 보시던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 얘, 너는 밖에 나가서 나보고 아버지 라고 하지마” 하시는 게 아닌가?.
왜 그런고하니 하루종일 날이면 날마다 바깥에서 구슬치기며 딱지치기를 하며
밖에서 사는 동생의 손이 새까맣고 손등이 터져서 아주 흉했기 때문이었다.
20년후 그 개구장이 동생이 장가를 들었다.
아주 많이 예쁜 색시를 골라서 장가를 갔다.
그 결혼 사진을 들고 보시던 우리 아버지..
”그 참 잘 생겼다” 하셔서 언니가 물었다.
“새 며느리 말씀이지요?” 하니 아버지께서는
“아니, 내 아들이 잘 생겼어” 하셨다.
한번은 시골에서 어떤 할아버지께서 우리집에 오신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노인네는 우리 아이들이 당신을 못 알아본다고 매우 역정을 내셨다.
그랬더니 아버지는 우리들을 모아놓고 살짝 이렇게 말씀하셨다.
“얘들아 내가 너희들 때리는 시늉을 할테니 얼른 도망가라”
그래서 우리는 맞는 시늉만하고 도망나가서 한참을 재미나게 낄낄 거렸다.
매를 드신 이야기가 났으니 말이지만 우리아버지는 드물게 단체 기합을 주셨다.
한사람이 잘못하면 다같이 연대 책임을 지라며 때리셨는데
한번도 큰소리나 성질을 부리면서 때린 적은 없었다.
왜 맞아야 하는가를 잘 설명해주시고 때린 후에는 즉시 마음을 풀게 해주신다고
오락회를 하시고 풀어 주시려했다.
우리는 조금 울다가 그치고 금방 풀어져야했는데 그게 잘 안되서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래도 오락회 하는 동안 어느새 완전히 풀어지곤 했다.
아버지께서 는 말씀으로 타이르는 편이요 나도 범생이어서
자라면서 맞을 일을 해서 괴롭혀 드린적은 별로 없을 것이다.
시골에서 국민학교를 마친 후 나는 언니를 따라 인천으로 여학교를 갔다.
주말이면 한없이 오래 걸리는 버스를타고 집에 돌아 갔는데
혼자 정거장에서 집에 들어오는 길은 아주 무섭고 컴컴했다.
무서워하는 내게 아버지께서는
“얘야 너같이 아무것도 아닌 꼬마를 누가 데리고 가겠냐? 걱정할 것 아무것도 없다” 하셨다.
나는 그말씀을 기억하고 캄캄한 밤길을 더듬으면서 집에 가곤했다.
“나같이 조그만 계집아이를 누가 쓸데가 있담”을 주문 처럼 되뇌이며 무서움을 참아내곤 했다.
내가 대학에 붙었을 때 어느날 아버지는 일본 패션 잡지책을 하나 가지고 오셔서 내게 보이시며
“너는 이런 옷을 입으면 예쁘겠다” , “이건 더 좋겠다” 하시며 몇 페이지를 넘기며 고르시는 것이었다.
그때는 사업이 기울어서 마음 뿐이기는 하셨지만 나는 아버지의 마음을 읽고 감사히생각하였다.
우리아버지는 넉넉 하시기만 하면 내게 아주 더 잘 해주시려고 할꺼야 하며…
아버지께서는 내 대학교 성적표를 들고 다니시며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내가 무사히 대학까지 잘 다녀서 아주 재미 있으셨겠지….
인천에서 중학교 다닐 때 부모님이 여러날 자취방에 와서 계신 적이 있었다.
눈치를 보니 싸우신 것 같기도하고 이상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빚에 쫓겨 도망온 것이었고 인천 앞 바다에 나가서 물에 빠져버리고 싶었었다고 하셨다.
그러나 차마 그리 못한 것은 순전히 우리 7남매를 생각해서였다고….
아, 사랑하는 우리 아버지, 우리 엄마,
(2006년 12월 1일, 이인선 씀,우리 부모님께서 우리집에 오셨다)
저녁식사를 한후 설겆이가 끝나면 “얘들아 이리와서 오락회하자”고 부르신다.
우리 칠남매는 모두 아랫목에 몰려 앉아 있고
하나씩 하나씩 뒷목에 서서 독창을 하거나 춤을 추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이 나가서 노래하면서 재롱을 부리면
우리 아버지는 신이나서 박수를 치시고 좋아하셨다.
잘한 아이는 일등상으로 지전을 주시기도 했다.
아버지께서는 자주 우리를 하나씩 하나씩 껴안고 귓속에 대고 소근소근 노래를 해주셨다.
고무줄을 귀에 대고 딩딩 소리를 반주삼아 노래를 해주시기도 하셨다.
아버지는 많은 노래가사를 85세인 지금까지도 외우고 계시지만
젊을 때부터 노래하시기를 그렇게나 좋아하셨다.
대부분 유행가 가락밖에 모르셨고
아이들이 그런 노래부르면 안되는 줄도 모르시고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셨다.
멋도 모른 언니는 소학교에 입학하여 노래한다고 손을 들고 했다가
그런노래를 부른다고 야단을 맞기도 했단다.
아버지는 술을 즐겨 드시는 분이 아니셔서 술 취하고 주정 부린 적은 단 한번도 기억에 없다.
한번은 어디서 술을 잡숫고 들어오시는데, 흥얼흥얼 하시고 중 문턱을 넘으시자 마자
엄마는 재빨리 사랑방으로 안내하셨다. 술이 깨야 안방에 들어가게 하셨다.
술은 어쩌다가 조금드시는데 조금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 지셨고
그때마다 기분이 아주 좋으신지 우리 모두에게 용돈을 주셨다.
엄마는 우리 7남매를 집에서 해산을 하셨다.
어떤 때는 할머니가 오시기도 하시지만 대부분 아버지께서 탯줄도 끊으시고 수발을 다 하셨다.
해산이 끝나면 아버지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탯줄은 쌀 껍질속에 파묻고 태우셨으며,
큰 가마 솥에 미역국을 잔뜩 끓여 놓으셨다.
우리 아버지는 배고프실때는 잘 못참으시지만 그외에는 늘 기분이 좋으셨다.
엄마가 음식을 짜게할 때는 “짭짤해서 맛있다” 하시고 싱거우면 “심심해서 맛있는거야” 하셨다.
두분이 다퉈야할 때가 있으면 집에서 나가서 우리 모르는데서 싸우고 들어오셨다.
아버지는 결혼 전에 일본인 고급관리를 위해 일을 하신 적이 있었는데,
수준 높은 일본 사람들은 남편들이 아내들에게 잘하더라는 이야기를 하셨다.
우리가 살던 시골 고장에는 여자를 홀대하던 사람들이 흔했으나
일본 관리들의 좋은 점을 본 받아서 인지 아버지는 엄마께 참 잘하셨다.
식솔은 많고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다 뺏기고 사시는 엄마를 위해
사탕이나 먹을 것을 몰래 숨겨놓고 주시기도 한것 같다.
가끔 나도 야금야금 훔쳐내어 먹고 흔적을 안 남기려고 애쓰던 기억이난다.
어떤 때 우리들한테 “너희들이 암만 예뻐도 네 엄마만 못하다” 고 말씀 하셨는데
엄마가 듣는데서 일부러 그리하셨다.
아버지가 아주 자상하시니까 우리 모두 아버지를 좋아해서
세상에 우리 아버지가 제일 잘난 남자인 줄 알았다.
그 환상이 깨진 건 대학에 가서였다.
첫번 전시회를 보시러 아버지께서 혼자 오신 적이 있었다.
얼마나 촌티가 나고 시시해보이는지 친구들이 많이 알아볼까봐 신경이 써질 정도 였다.
나중에 미국에 이민오실 때 비행장에 마중 나가보니
오랜만에 만난 우리 아버지는 완전히 아메리칸 인디안 스타일이셨다.
툭나온 광대 뼈에, 약간 뻐드렁니에, 농사군의 검은 얼굴 색…
어떻게 한때 아버지를 세상에서 제일 잘난 남자인걸로 착각을 한적이 있었다니!
다시 옛날 국민학교 때로 돌아가서 아버지께서 방앗간을 하실 때
우리 시골 동네에 처음으로 전화가 생겼다.
집과 방앗간에 전화를 놔서 나는 집에서 아버지께 전화를 자주 하고 책을 읽어 드렸다.
그러면 만사를 제쳐놓고 아버지는 가만히 들어주시고 “그래 그래” 하시며 그렇게 좋아하셨다.
또 우리 아버지 같이 유머가 좋은 양반도 없으실게다.
한번은 세째 남동생의 손을 들여다 보시던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 얘, 너는 밖에 나가서 나보고 아버지 라고 하지마” 하시는 게 아닌가?.
왜 그런고하니 하루종일 날이면 날마다 바깥에서 구슬치기며 딱지치기를 하며
밖에서 사는 동생의 손이 새까맣고 손등이 터져서 아주 흉했기 때문이었다.
20년후 그 개구장이 동생이 장가를 들었다.
아주 많이 예쁜 색시를 골라서 장가를 갔다.
그 결혼 사진을 들고 보시던 우리 아버지..
”그 참 잘 생겼다” 하셔서 언니가 물었다.
“새 며느리 말씀이지요?” 하니 아버지께서는
“아니, 내 아들이 잘 생겼어” 하셨다.
한번은 시골에서 어떤 할아버지께서 우리집에 오신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노인네는 우리 아이들이 당신을 못 알아본다고 매우 역정을 내셨다.
그랬더니 아버지는 우리들을 모아놓고 살짝 이렇게 말씀하셨다.
“얘들아 내가 너희들 때리는 시늉을 할테니 얼른 도망가라”
그래서 우리는 맞는 시늉만하고 도망나가서 한참을 재미나게 낄낄 거렸다.
매를 드신 이야기가 났으니 말이지만 우리아버지는 드물게 단체 기합을 주셨다.
한사람이 잘못하면 다같이 연대 책임을 지라며 때리셨는데
한번도 큰소리나 성질을 부리면서 때린 적은 없었다.
왜 맞아야 하는가를 잘 설명해주시고 때린 후에는 즉시 마음을 풀게 해주신다고
오락회를 하시고 풀어 주시려했다.
우리는 조금 울다가 그치고 금방 풀어져야했는데 그게 잘 안되서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래도 오락회 하는 동안 어느새 완전히 풀어지곤 했다.
아버지께서 는 말씀으로 타이르는 편이요 나도 범생이어서
자라면서 맞을 일을 해서 괴롭혀 드린적은 별로 없을 것이다.
시골에서 국민학교를 마친 후 나는 언니를 따라 인천으로 여학교를 갔다.
주말이면 한없이 오래 걸리는 버스를타고 집에 돌아 갔는데
혼자 정거장에서 집에 들어오는 길은 아주 무섭고 컴컴했다.
무서워하는 내게 아버지께서는
“얘야 너같이 아무것도 아닌 꼬마를 누가 데리고 가겠냐? 걱정할 것 아무것도 없다” 하셨다.
나는 그말씀을 기억하고 캄캄한 밤길을 더듬으면서 집에 가곤했다.
“나같이 조그만 계집아이를 누가 쓸데가 있담”을 주문 처럼 되뇌이며 무서움을 참아내곤 했다.
내가 대학에 붙었을 때 어느날 아버지는 일본 패션 잡지책을 하나 가지고 오셔서 내게 보이시며
“너는 이런 옷을 입으면 예쁘겠다” , “이건 더 좋겠다” 하시며 몇 페이지를 넘기며 고르시는 것이었다.
그때는 사업이 기울어서 마음 뿐이기는 하셨지만 나는 아버지의 마음을 읽고 감사히생각하였다.
우리아버지는 넉넉 하시기만 하면 내게 아주 더 잘 해주시려고 할꺼야 하며…
아버지께서는 내 대학교 성적표를 들고 다니시며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내가 무사히 대학까지 잘 다녀서 아주 재미 있으셨겠지….
인천에서 중학교 다닐 때 부모님이 여러날 자취방에 와서 계신 적이 있었다.
눈치를 보니 싸우신 것 같기도하고 이상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빚에 쫓겨 도망온 것이었고 인천 앞 바다에 나가서 물에 빠져버리고 싶었었다고 하셨다.
그러나 차마 그리 못한 것은 순전히 우리 7남매를 생각해서였다고….
아, 사랑하는 우리 아버지, 우리 엄마,
(2006년 12월 1일, 이인선 씀,우리 부모님께서 우리집에 오셨다)
2006.12.03 19:28:31 (*.183.209.249)
따뜻하고 사랑 많으신 부모님 .....
너는 네 아버지를 아주 많이 사랑하는구나.
선한 네 성품이 보이는듯하다.
나두 울아버질 참 좋아 했는데.
난 엄니가 더 오래 살아 계심은 순전히
엄니와 나의 애증을 풀으라고
하나님께서 내곁에 머물게 하시는것 같다.
걸 알면서도 풀으려고 하면 도로 꼬이고...
풀으려고 하면 도로 꼬이는것이 시간이 지나야 할것 같다.::o
너는 네 아버지를 아주 많이 사랑하는구나.
선한 네 성품이 보이는듯하다.
나두 울아버질 참 좋아 했는데.
난 엄니가 더 오래 살아 계심은 순전히
엄니와 나의 애증을 풀으라고
하나님께서 내곁에 머물게 하시는것 같다.
걸 알면서도 풀으려고 하면 도로 꼬이고...
풀으려고 하면 도로 꼬이는것이 시간이 지나야 할것 같다.::o
2006.12.03 20:57:05 (*.75.110.219)
인선아!!
바람이 너무 심하게 불었는데...
부모님 오셨니, 너 행복하겠다
보고싶던 손주는 못 왔으니. 섭섭하겠네
오랫만에 4대가 뭉칠수 있는 기회였는데 말야.
이참에 부모님한테 어리광이나 실컨 부려 둬
한동안 부모님이나 너한테 에너지가 될터니...
이제 내나이가 60을 바라보고
부모님이 생전에 안계시닌 지금에야
효도하지 못했던 지난날이 후회 막금이다
인선아!!!
좋은추억 만들며 행복한 시간 많이 보내기를...

이 꽃다발을 두분의 건강을 축하하면서
바람이 너무 심하게 불었는데...
부모님 오셨니, 너 행복하겠다
보고싶던 손주는 못 왔으니. 섭섭하겠네
오랫만에 4대가 뭉칠수 있는 기회였는데 말야.
이참에 부모님한테 어리광이나 실컨 부려 둬
한동안 부모님이나 너한테 에너지가 될터니...
이제 내나이가 60을 바라보고
부모님이 생전에 안계시닌 지금에야
효도하지 못했던 지난날이 후회 막금이다
인선아!!!
좋은추억 만들며 행복한 시간 많이 보내기를...

이 꽃다발을 두분의 건강을 축하하면서
2006.12.04 05:43:20 (*.102.111.158)
인선은
아버님의 '올바른' 사랑을 듬뿍 받아서
그처럼 가정을 따스하게 일구는 여인이 되었구나
원래 자상하신 성품이신데다가
일본 관리들로부터 좋은 점을 당신의 것으로 만들어가신
인선 아버님의 삶을 통해
성품을 갈고 닦을 수 있다면 곱게 다듬어 보고 싶고
남의 좋은 면을 내것으로 만드는 일에 부지런해야겠단 다짐을 다시금 하게 되니
참 고맙다. 인선아.
네 아버님에 대한 글을 읽으며
7년전에 돌아가신 다섯형제의 우리 아버지를 떠올렸어.
당신은 배우지 못하신게 아쉬어
자식은 가르쳐야 한다고 정말 열심히 사셨지.
당신을 위해선 변변한 옷 한벌 사시는 것도 마다하셨어.
그래서인지 우리 다섯형제 아버지 같은 모습이 참 많네.
'자식은 울타리'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어.
술기운이 든 날 저녁이면 주머니 다 털게 하시니
신포동 중국집 돈버는 날이었지.
배곺은 시절, 뜨근한 진빵 간식이 어찌나 맛있었는지,
지금도 모락 모락 김이 내 눈앞에서 어른거리네
그리구, 고생에 찌든 수드룩한 행상 여인들이 우리 집에 오시면
무조건 엄마에게 사라고 하셨어. 일찍 여윈 친할머니를 생각하셔서 그랬다네.
난,
가끔 사는 게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이까짓 것, 부모님 고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냐'라며
힘낼 때가 많아. 사실 지금도 그래.
자식 사랑은 '내리 사랑'이라며
부모님 반의 반만큼이라도 진실되게 한뜻, 한샘에게 하고 싶은데
잘 모르겠다. 잘하고 있는지 아닌지....
네 글 덕분에
이번 짧은 한국 방문 기간 엄마랑 아버지 묘에 다녀오고 싶단 생각을 갖게 되었어.
인선아,
이처럼 사람 사는 이야기를 진솔하게 나누어주어서
너무 고마와.
아버님의 '올바른' 사랑을 듬뿍 받아서
그처럼 가정을 따스하게 일구는 여인이 되었구나
원래 자상하신 성품이신데다가
일본 관리들로부터 좋은 점을 당신의 것으로 만들어가신
인선 아버님의 삶을 통해
성품을 갈고 닦을 수 있다면 곱게 다듬어 보고 싶고
남의 좋은 면을 내것으로 만드는 일에 부지런해야겠단 다짐을 다시금 하게 되니
참 고맙다. 인선아.
네 아버님에 대한 글을 읽으며
7년전에 돌아가신 다섯형제의 우리 아버지를 떠올렸어.
당신은 배우지 못하신게 아쉬어
자식은 가르쳐야 한다고 정말 열심히 사셨지.
당신을 위해선 변변한 옷 한벌 사시는 것도 마다하셨어.
그래서인지 우리 다섯형제 아버지 같은 모습이 참 많네.
'자식은 울타리'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어.
술기운이 든 날 저녁이면 주머니 다 털게 하시니
신포동 중국집 돈버는 날이었지.
배곺은 시절, 뜨근한 진빵 간식이 어찌나 맛있었는지,
지금도 모락 모락 김이 내 눈앞에서 어른거리네
그리구, 고생에 찌든 수드룩한 행상 여인들이 우리 집에 오시면
무조건 엄마에게 사라고 하셨어. 일찍 여윈 친할머니를 생각하셔서 그랬다네.
난,
가끔 사는 게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이까짓 것, 부모님 고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냐'라며
힘낼 때가 많아. 사실 지금도 그래.
자식 사랑은 '내리 사랑'이라며
부모님 반의 반만큼이라도 진실되게 한뜻, 한샘에게 하고 싶은데
잘 모르겠다. 잘하고 있는지 아닌지....
네 글 덕분에
이번 짧은 한국 방문 기간 엄마랑 아버지 묘에 다녀오고 싶단 생각을 갖게 되었어.
인선아,
이처럼 사람 사는 이야기를 진솔하게 나누어주어서
너무 고마와.
2006.12.05 03:14:18 (*.209.207.91)
정례야, 어제 네글 읽으며 눈물이 나더라.
특별한 사랑을 베푸신 너의 부모님도 참 좋으시구나.
언제 돌아가셨니? 우리 부모님도 이번이 우리 집에 오시는게 처음이자 마지막이 안될까 싶어.
엄마가 지난번에 다리가 부러져 수술을 받으신후로는 구부정하고 걸음을 더 못 걸으시고
극성스런 일도 예전처럼 못하시니
뒤에서 가만히 눈물이 나와.
이제 남은건 두분다 예수님을 잘 믿으시고
천국 갈 준비를 하도록 도와 드려야하는 건데
귀도 좀 어두워 지셨고
똑떨어지게 해드리가 어렵네.
교회는 열심히 다니시지만
아버지 말씀이 설교가 귀에 하나도 안들어 온다고 하시네.
내가 믿는것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그 말씀의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 뿐이야.
희자야 좋은 글들, 너무 감사하고 읽고 있다.
어쩜 그리 열심이니?
경선아 음악 감사하고..
순호야 뛰어난 너의 글 솜씨에 감사하고... (:f)
특별한 사랑을 베푸신 너의 부모님도 참 좋으시구나.
언제 돌아가셨니? 우리 부모님도 이번이 우리 집에 오시는게 처음이자 마지막이 안될까 싶어.
엄마가 지난번에 다리가 부러져 수술을 받으신후로는 구부정하고 걸음을 더 못 걸으시고
극성스런 일도 예전처럼 못하시니
뒤에서 가만히 눈물이 나와.
이제 남은건 두분다 예수님을 잘 믿으시고
천국 갈 준비를 하도록 도와 드려야하는 건데
귀도 좀 어두워 지셨고
똑떨어지게 해드리가 어렵네.
교회는 열심히 다니시지만
아버지 말씀이 설교가 귀에 하나도 안들어 온다고 하시네.
내가 믿는것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그 말씀의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 뿐이야.
희자야 좋은 글들, 너무 감사하고 읽고 있다.
어쩜 그리 열심이니?
경선아 음악 감사하고..
순호야 뛰어난 너의 글 솜씨에 감사하고... (:f)
2006.12.07 10:21:31 (*.99.177.251)
인선아,
네 부모님을 위한 기도 나도 기억할께.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자라건 형편이 여의치 못해 그 사랑 미처 받지 못했건,
우린 모두 귀한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잖니.
누군가로 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는 그 사실만이라도
그 감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한 영의 양식이라 생각하며 지내서인지
힘들 때 투정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엔 늘 감사하는 마음이 도사리고 있어
삶은 살만하다라고 고백하는가봐.
너처럼, 또 인일의 아름다운 동기들 처럼
(일일이 열거하기 어렵도록 300여명의 인일 5기),
아니 그외 세상 사람들 때문에
"Life is Beautiful"
지난 이틀 짬을 내지 못했네.
지금 여긴 고베에 있는 관서대학교 차기 대학총장 (여기선 chancellor 라 하네)네 집에 와서 인터넷 쓰는 중야.
영빈관에 머무는데 wireless 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서지.
Ruth 선교사는 일본서 선교사 가정에서 태어나시어
미국서 가르치시다가 다시 선교사로 이 학교에서 파송받아 오래 봉직하고 계셨어.
인정을 아주 많이 받았나봐.
어찌나 조용한 성품인지, 꼭 일본 여성처럼 다소곳한 태도를 갖고 계시네.
이 글 끝내고선 나가야 되. 함께 오늘 일정마치면, 이제 일본에서의 공무가 다 끝난다.
빡빡한 일정이었지만,
15명의 선교사와 그 선교사들이 사역하는 기관과 단체의 사람들을 만나고,
또 2007년도 새로운 사역지 2곳에 가서 구체적인 절차를 마무리 지었어.
딱 한사람의 문제만 해결하지 못한게 아쉽네.
그래.
우리 진실하고 솔직하게 살자꾸나.
모두 모두에게 감사한다.
네 부모님을 위한 기도 나도 기억할께.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자라건 형편이 여의치 못해 그 사랑 미처 받지 못했건,
우린 모두 귀한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잖니.
누군가로 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는 그 사실만이라도
그 감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한 영의 양식이라 생각하며 지내서인지
힘들 때 투정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엔 늘 감사하는 마음이 도사리고 있어
삶은 살만하다라고 고백하는가봐.
너처럼, 또 인일의 아름다운 동기들 처럼
(일일이 열거하기 어렵도록 300여명의 인일 5기),
아니 그외 세상 사람들 때문에
"Life is Beautiful"
지난 이틀 짬을 내지 못했네.
지금 여긴 고베에 있는 관서대학교 차기 대학총장 (여기선 chancellor 라 하네)네 집에 와서 인터넷 쓰는 중야.
영빈관에 머무는데 wireless 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서지.
Ruth 선교사는 일본서 선교사 가정에서 태어나시어
미국서 가르치시다가 다시 선교사로 이 학교에서 파송받아 오래 봉직하고 계셨어.
인정을 아주 많이 받았나봐.
어찌나 조용한 성품인지, 꼭 일본 여성처럼 다소곳한 태도를 갖고 계시네.
이 글 끝내고선 나가야 되. 함께 오늘 일정마치면, 이제 일본에서의 공무가 다 끝난다.
빡빡한 일정이었지만,
15명의 선교사와 그 선교사들이 사역하는 기관과 단체의 사람들을 만나고,
또 2007년도 새로운 사역지 2곳에 가서 구체적인 절차를 마무리 지었어.
딱 한사람의 문제만 해결하지 못한게 아쉽네.
그래.
우리 진실하고 솔직하게 살자꾸나.
모두 모두에게 감사한다.
2006.12.07 13:27:59 (*.13.165.154)
정례야
드디어 오늘 아침 우리 아버지랑 주님 이야기를 같이하고 영접기도를 같이
했어. 아버지도 마음이 많이 열리신것 같아.
기도해주어서 감사한다.
일본에서의 일정이 많이 빡빡한거 같은데 틈틈히 많이 쉬면서
잘먹으면서 할것..(:i)
드디어 오늘 아침 우리 아버지랑 주님 이야기를 같이하고 영접기도를 같이
했어. 아버지도 마음이 많이 열리신것 같아.
기도해주어서 감사한다.
일본에서의 일정이 많이 빡빡한거 같은데 틈틈히 많이 쉬면서
잘먹으면서 할것..(:i)
2006.12.07 20:43:15 (*.75.110.219)
인선아!!!
'주님의 크신 사랑'이아버님과 함께라니,
넌 이번 성탄절에는 아주 큰 선물을 받았구나...
올 크리스마스엔 '주님이 은총안'에서 평안하기를...(:y)
'주님의 크신 사랑'이아버님과 함께라니,
넌 이번 성탄절에는 아주 큰 선물을 받았구나...
올 크리스마스엔 '주님이 은총안'에서 평안하기를...(:y)
2006.12.08 01:24:05 (*.13.165.154)
오늘 아침에는 기도문을 써드렸어. 날마다 읽고 기도하시라고.
급히써서 썩 좋지는 않지만
오늘 아침 부모님께서 뉴저지로 다시 가시거던...
하나님 아버지
저를 만나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아직도 기도를 잘할 줄모릅니다.
그러나 기도를 잘하고 하나님과 대화를 하고 싶습니다. 기도의 문을 열어주시옵소서.
저는 예수님께서 저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습니다.
저는 이제 죄가 하나도 없고 의인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제가 성실하게 살아왔대도, 남과 같은 큰 죄를 안졌어도,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 들으며 살아왔대도 여전히 하나님앞에서는 큰 죄인이었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만나지 않으면 지옥밖에 갈수 없는 죄인임을 이제 알았습니다. 제가 예수님과 상관이 없으면 천국시민이 될수 없음을 이제 알았습니다. 하나님 저는 지옥에 결코 가지 않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영원히 함께 살 천국에 가서 살고 싶습니다. 제 힘으로는 갈수 없으되 예수님의 피의 공로로, 예수님 빽으로 천국에 들어갈수 있을줄 굳게 믿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하나님 오래된 저의 죄들과 생활습관을 주님 앞에 회개합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내뜻대로 고집하며 하나님보다 나를 중요시하며 내가 하나님이었던것을 회개합니다.
하나님, 이제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때까지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며 거룩하게 살겠습니다. 제 안에 들어오신 성령님 저를 붙잡아 주시고 의인으로 승리하게 해주시옵소서.
주님의 말씀을 사랑할수 있게 도와주시고 주님의 사람들을 사랑할수 있게 도와 주시옵소서. 또한 주님의 몸되신 주님의 교회를 사랑할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굳어져 있는 마음을 갈아 옥토를 만들어 주셔서 이제라도 영안이 열리고 영적으로 성숙하여 주님의 사랑하시는 의인의 반열에 설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제가 많은 시간이 없지만 하루하루 제가 할수 있는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생활을 할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라”고 하신 주님. 그렇게 살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아버지를 위해 이인선 씀 2006년 12월 7일)(:ab)
급히써서 썩 좋지는 않지만
오늘 아침 부모님께서 뉴저지로 다시 가시거던...
하나님 아버지
저를 만나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아직도 기도를 잘할 줄모릅니다.
그러나 기도를 잘하고 하나님과 대화를 하고 싶습니다. 기도의 문을 열어주시옵소서.
저는 예수님께서 저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습니다.
저는 이제 죄가 하나도 없고 의인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제가 성실하게 살아왔대도, 남과 같은 큰 죄를 안졌어도,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 들으며 살아왔대도 여전히 하나님앞에서는 큰 죄인이었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만나지 않으면 지옥밖에 갈수 없는 죄인임을 이제 알았습니다. 제가 예수님과 상관이 없으면 천국시민이 될수 없음을 이제 알았습니다. 하나님 저는 지옥에 결코 가지 않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영원히 함께 살 천국에 가서 살고 싶습니다. 제 힘으로는 갈수 없으되 예수님의 피의 공로로, 예수님 빽으로 천국에 들어갈수 있을줄 굳게 믿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하나님 오래된 저의 죄들과 생활습관을 주님 앞에 회개합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내뜻대로 고집하며 하나님보다 나를 중요시하며 내가 하나님이었던것을 회개합니다.
하나님, 이제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때까지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며 거룩하게 살겠습니다. 제 안에 들어오신 성령님 저를 붙잡아 주시고 의인으로 승리하게 해주시옵소서.
주님의 말씀을 사랑할수 있게 도와주시고 주님의 사람들을 사랑할수 있게 도와 주시옵소서. 또한 주님의 몸되신 주님의 교회를 사랑할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굳어져 있는 마음을 갈아 옥토를 만들어 주셔서 이제라도 영안이 열리고 영적으로 성숙하여 주님의 사랑하시는 의인의 반열에 설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제가 많은 시간이 없지만 하루하루 제가 할수 있는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생활을 할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라”고 하신 주님. 그렇게 살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아버지를 위해 이인선 씀 2006년 12월 7일)(:a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