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저녁식사를 한후 설겆이가 끝나면 “얘들아 이리와서 오락회하자”고 부르신다.
우리 칠남매는 모두 아랫목에 몰려 앉아 있고
하나씩 하나씩 뒷목에 서서 독창을 하거나 춤을 추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이 나가서 노래하면서 재롱을 부리면
우리 아버지는 신이나서 박수를 치시고 좋아하셨다.
잘한 아이는 일등상으로 지전을 주시기도 했다.

아버지께서는 자주 우리를 하나씩 하나씩 껴안고 귓속에 대고 소근소근 노래를 해주셨다.
고무줄을 귀에 대고 딩딩 소리를 반주삼아 노래를 해주시기도 하셨다.
아버지는 많은 노래가사를 85세인 지금까지도 외우고 계시지만
젊을 때부터 노래하시기를 그렇게나 좋아하셨다.
대부분 유행가 가락밖에 모르셨고
아이들이 그런 노래부르면 안되는 줄도 모르시고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셨다.
멋도 모른 언니는 소학교에 입학하여 노래한다고 손을 들고 했다가
그런노래를 부른다고 야단을 맞기도 했단다.

아버지는 술을 즐겨 드시는 분이 아니셔서 술 취하고 주정 부린 적은 단 한번도 기억에 없다.  
한번은 어디서 술을 잡숫고 들어오시는데, 흥얼흥얼 하시고 중 문턱을 넘으시자 마자
엄마는 재빨리 사랑방으로 안내하셨다. 술이 깨야 안방에 들어가게 하셨다.
술은 어쩌다가 조금드시는데 조금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 지셨고
그때마다 기분이 아주 좋으신지 우리 모두에게 용돈을 주셨다.  

엄마는 우리 7남매를 집에서 해산을 하셨다.
어떤 때는 할머니가 오시기도 하시지만 대부분 아버지께서 탯줄도 끊으시고 수발을 다 하셨다.
해산이 끝나면 아버지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탯줄은 쌀 껍질속에 파묻고 태우셨으며,
큰 가마 솥에 미역국을 잔뜩 끓여 놓으셨다.

우리 아버지는 배고프실때는 잘 못참으시지만 그외에는 늘 기분이 좋으셨다.
엄마가 음식을 짜게할 때는 “짭짤해서 맛있다” 하시고 싱거우면 “심심해서 맛있는거야” 하셨다.
두분이 다퉈야할 때가 있으면 집에서 나가서 우리 모르는데서 싸우고 들어오셨다.

아버지는 결혼 전에 일본인 고급관리를 위해 일을 하신 적이 있었는데,
수준 높은 일본 사람들은  남편들이 아내들에게 잘하더라는 이야기를 하셨다.
우리가 살던 시골 고장에는 여자를 홀대하던 사람들이 흔했으나
일본 관리들의 좋은 점을 본 받아서 인지 아버지는 엄마께 참 잘하셨다.
식솔은 많고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다 뺏기고 사시는 엄마를 위해
사탕이나 먹을 것을 몰래 숨겨놓고 주시기도 한것 같다.
가끔 나도 야금야금 훔쳐내어 먹고 흔적을 안 남기려고 애쓰던 기억이난다.

어떤 때  우리들한테 “너희들이 암만 예뻐도 네 엄마만 못하다” 고 말씀 하셨는데
엄마가 듣는데서 일부러 그리하셨다.

아버지가 아주 자상하시니까 우리 모두 아버지를 좋아해서
세상에 우리 아버지가 제일 잘난 남자인 줄 알았다.
그 환상이 깨진 건 대학에 가서였다.
첫번 전시회를 보시러 아버지께서 혼자 오신 적이 있었다.
얼마나 촌티가 나고 시시해보이는지 친구들이 많이 알아볼까봐 신경이 써질 정도 였다.
나중에 미국에 이민오실 때 비행장에 마중 나가보니
오랜만에 만난 우리 아버지는 완전히 아메리칸 인디안 스타일이셨다.
툭나온 광대 뼈에, 약간 뻐드렁니에,  농사군의 검은 얼굴 색…
어떻게 한때 아버지를 세상에서 제일 잘난 남자인걸로 착각을 한적이 있었다니!

다시 옛날 국민학교 때로 돌아가서 아버지께서 방앗간을 하실 때
우리 시골 동네에 처음으로 전화가 생겼다.
집과 방앗간에 전화를 놔서 나는 집에서 아버지께 전화를 자주 하고 책을 읽어 드렸다.
그러면 만사를 제쳐놓고 아버지는 가만히 들어주시고 “그래 그래” 하시며 그렇게 좋아하셨다.

또 우리 아버지 같이 유머가 좋은 양반도 없으실게다.
한번은 세째 남동생의 손을 들여다 보시던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 얘, 너는 밖에 나가서 나보고 아버지 라고 하지마” 하시는 게 아닌가?.
왜 그런고하니 하루종일 날이면 날마다 바깥에서 구슬치기며 딱지치기를 하며
밖에서 사는 동생의 손이 새까맣고  손등이 터져서 아주 흉했기 때문이었다.

20년후 그 개구장이 동생이 장가를 들었다.
아주 많이 예쁜 색시를 골라서 장가를 갔다.
그 결혼 사진을 들고 보시던 우리 아버지..
”그 참 잘 생겼다” 하셔서 언니가 물었다.
“새 며느리 말씀이지요?” 하니 아버지께서는
“아니, 내 아들이 잘 생겼어” 하셨다.

한번은 시골에서 어떤 할아버지께서 우리집에 오신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노인네는 우리 아이들이 당신을 못 알아본다고 매우 역정을 내셨다.
그랬더니 아버지는 우리들을 모아놓고 살짝 이렇게 말씀하셨다.
“얘들아 내가 너희들 때리는 시늉을 할테니 얼른 도망가라”
그래서 우리는 맞는 시늉만하고 도망나가서 한참을 재미나게 낄낄 거렸다.

매를 드신 이야기가 났으니 말이지만 우리아버지는 드물게 단체 기합을 주셨다.
한사람이 잘못하면 다같이 연대 책임을 지라며 때리셨는데
한번도 큰소리나 성질을 부리면서 때린 적은 없었다.
왜 맞아야 하는가를 잘 설명해주시고 때린 후에는 즉시 마음을 풀게 해주신다고
오락회를 하시고 풀어 주시려했다.
우리는 조금 울다가 그치고 금방 풀어져야했는데 그게 잘 안되서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래도 오락회 하는 동안 어느새 완전히 풀어지곤 했다.
아버지께서 는 말씀으로 타이르는 편이요 나도 범생이어서
자라면서 맞을 일을 해서 괴롭혀 드린적은 별로 없을 것이다.

시골에서 국민학교를 마친 후 나는 언니를 따라 인천으로 여학교를 갔다.
주말이면 한없이 오래 걸리는 버스를타고 집에 돌아 갔는데
혼자 정거장에서 집에 들어오는 길은 아주 무섭고 컴컴했다.
무서워하는 내게 아버지께서는
“얘야 너같이 아무것도 아닌 꼬마를 누가 데리고 가겠냐? 걱정할 것 아무것도 없다” 하셨다.
나는 그말씀을 기억하고 캄캄한 밤길을 더듬으면서 집에 가곤했다.
“나같이 조그만 계집아이를 누가 쓸데가 있담”을 주문 처럼 되뇌이며 무서움을 참아내곤 했다.

내가 대학에 붙었을 때 어느날 아버지는 일본 패션 잡지책을 하나 가지고 오셔서 내게 보이시며
“너는 이런 옷을 입으면 예쁘겠다” , “이건 더 좋겠다” 하시며 몇 페이지를 넘기며 고르시는 것이었다.
그때는 사업이 기울어서 마음 뿐이기는 하셨지만 나는 아버지의 마음을 읽고 감사히생각하였다.
우리아버지는 넉넉 하시기만 하면 내게 아주 더 잘 해주시려고 할꺼야 하며…
아버지께서는 내 대학교 성적표를 들고 다니시며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내가 무사히 대학까지 잘 다녀서 아주 재미 있으셨겠지….

인천에서 중학교 다닐 때 부모님이 여러날 자취방에 와서 계신 적이 있었다.
눈치를 보니 싸우신 것 같기도하고 이상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빚에 쫓겨 도망온 것이었고 인천 앞 바다에 나가서 물에 빠져버리고 싶었었다고 하셨다.
그러나 차마 그리 못한 것은 순전히 우리 7남매를 생각해서였다고….
아, 사랑하는 우리 아버지, 우리 엄마,  
               (2006년 12월 1일, 이인선 씀,우리 부모님께서 우리집에 오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