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회 | 포토갤러리 | - 게시판담당 : 한선민
창영교회-19C 말 우리나라 최초의 미 여선교사들의 기숙사가 보존되어 있는 교회
19C 말에 건축된 우리나라 최초의 미 여선교사들 기숙사
창영초등학교-1907년 조선 사람들의 기금으로 세워진 인천 최초의 공립학교
창영교회 마당에 있는 5백년된 은행나무
우리나라 최초의 감리교회인 인천내리교회 마당에 진열돼 있는 아펜셀러 선교사 · 김기범 목사 · 존스 목사 흉상
내리교회 앞에 있는 미주한인선교 100주년 기념탑
홍 예 문[유형 문화재 49호]
자유공원에 있는 맥아더장군 동상
자유공원의 꽃담
한미수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자유공원에 있는 정자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
이 탑은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펜셀러 목사 부부와 언더우드 목사가 상륙한 지점에, 세 분의 뜻을 기리며
복음이 온 나라와 바다 건너 땅끝까지 파도 치기를 기원하며 세운 탑이다.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에 있는 아펜셀러 목사 부부와 언더우드 목사의 동상
창영교회에 고3때 잠간 다녔었어요.
장년성가대에서 곡중 쏠로를 부탁해서 몇번 했었는데
그 후로 지휘자의 부탁으로 한참 다녔었지요.
옛날 기억이 새삼 나네요.
그 때 학생부 성가대 지휘자인 강선생과 제가 잠간 연애를 했었답니다.
그 땐 정말 꿈 많은 소녀였었는데, 이제 60을 바라보는 일어날 땐 허리가 뻐근하게 아프고
살이 삐져 나오는 못생긴 할망구가 되었네요~~~::´(::´((x15)(x15)
마치 손때묻은 그릇들을 꺼내놓고 닦으며 옛날을 추억하듯
어렸을때로 돌아가 창영학교 마당에서 소리 지르며뛰놀던 생각이 새롭네
영분이도 , 혜경이도, 종심이도, 현애도------
그리고 내가 바로 홍예문 밑에 아이스케키 집 딸이 었잖니
공원에 오르락 내리락 하던 일들이 마음에 애잔 하게 스며드네
선민아 고마워
나는 휴스턴에서 잘 지네
이 곳은 아직도 봄 가을 날씨야
우리 지역에 한국 방송을 볼 수있는 케이블이 잇어서
조금이나마 조국 소식을 들을 수 있어
그 곳은 날씨가 꽤나 쌀쌀 한가봐
사랑하는 친구들아 몸 조심, 마음 조심하고
한국 나가면 보자 샬롬 (:ab)(:x)(:x)(:x)(:x)(:x)
또한 영어 성경을 최초로 한국어로 번역하신분[ 장 박사님]에 부인이 한국 최초에 여자분으로 함 장노님이라고
[1977년에 작고 하셨는데 ] 모다 창영교회 출신이시지 나하곤 친척이거던 내가 중국에 1986년도에 가서
그분들에 노라케 바랜 사진을 갖고 왔어 기회되면 창영교회에 보낼려고 헌데 그 당시 그사진을
보관했었던 내 사촌 언니가 그 사진 주면서 우시는거야 가끔 사진 보면서 친척들을 그리워 했다고 하시면서
그래서 내가 더 크게 확대해서 보내 드릴께요 했더니 그렇케도 할수 있니? 하고 놀라시더라고 ~
특별히 우신 이유는 그 사진을 문화 혁명때 헛간에 감추었다가 정세가 안정 되었을때 방으로 모셔 왔다는
언니 야기지 문화 혁명땐 사진이 있는것도 부농에 집이라고 동래사람들 뫃아놓고 재판을 받았다는군
암튼 그네들은 남이 잘 살았었다는것도 못 보았다니깐 그게 공상당에 무지이니깐 이제 허나 세상은 변하여
1992년 중국과 국교수교후 가까워지고 변하고 말이다 ~자유롭게 여행도하고 거기다 한국에 호적이 근거가
있으면 조선족들도 한국에와서 살수가 있고 말이야 해서 호적 찿아 드렸더니 맘만 들떠 반가워 하셨지만
중국에 계시다가 그곳에 무치시겠다고 하시는군 섬미나! 자유공원 청소 하고 내려오는 길목에선 홍예문을 통해 밀려오는 인천 앞바다에 바람에 젖은 교복을 말리곤 했었지 ㅜ사진 잘 보았다 안녕
글구 병숙아 나또한 홍예문 보면서 너희 아이스케키 집 야기를 두두릴까 하다가 말았더니 올라왔네
아마 너와 내가 동시에 생각했던것 같구나 모다 해외파들이 그리운맘을 달랜것 같네 안녕들
창영학교도ㅡ 영화학교도 다 역사가 깊어가고....
선민방장,
옛모습, 새모습 고루고루 보여주어 고맙네.
세상에!
왜 홍여문이 저렇게 작게 보일까?
병숙아!~
오랜만이다,
남편께선 건강하게 회복 하셨겠지?
설명을 붙여 주셔서 저도 모르고 있던 곳들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구요.
혜경언니,
홍예문은 예전과 다름이 없는데 주변의 모습이 많이 달라졌더군요.
그래도 아래서 걸어가며 홍예문을 올려다 보면 여전히 높아 보인답니다.^^;:)
창영교회에서 그런일이 있었군
아름다운 추억이네.
못생긴 할망구라니....
강아지와의 사진을 보니 그리 멋지고, 생기발랄하고, 귀엽고, 아주 예쁘네.
가슴이 찡하다고...타국에서 안 그랬겠나?
늘 컴을 보고는 있었구먼
오늘같이 해외 친구들이 마음이 뭉클하고
그리운 맴들을 달래며 향수를 느끼니 방장의 보람이 있네.
호문아!
창영교회 담임목사님께서 쭈욱 설명을 하시면서
기숙사 속에 들어가 많은 자료들을 보면서
그 당시 우리조선은 미개국 이었을텐데 먼 동방의 나라에 와서
병원을 세워주고, 학교를 세워주고
(인천과 하와이의 이민 첫걸음으로 인천의 인~
하와이의 하짜를 따서 인하대학교가 생겼다 함),성경을 가르키고.
어느 선교사는 26살에 와서 32살에 선교하시다가
풍토병에 걸려 사망하신분도 계시고...
많은 씨앗이 되셨더라고.
강순옥 선생님은 알었는데 못 물어봐서 그날밤에 후회했네.
혜경아!
홍예문을 나도 바로 앞에서 못보고
위에서 내려다 보니 답답했네.
언제 해외친구 누구 오면 가서 다시 찍어 볼께.
목소리는 못 들어도 속내를 알 수 있는 글이 있어서
시공을 초월해서 이렇게 우리들의 우정을 키워가니 너무 좋다
사실은 너희들이 너무 글들을 잘 쓰고 또 너무 유식해서
JOIN 하기가 수줍기도 해서 잘 안썼어
혜경아 고마워
남편의 건강이 많이 좋아졌어
미국에 와서 다시 다 검사 했는데
그 의사 말이 한국의사가 수술을 잘했다고 모든 것이 다 정상이래
주님의 은혜, 조국의 은혜 다 감사해
호문아 켈리포니아 가면 연락 할께
나중에 갈때 되면 전화 번호 알려줘
방장님 수고가 너무 많으시네 고마워 샬롬(:y)

혜경아! 홍예문을 다른 각도에서 찍은 사진을 추가로 올린다.
그날 시간이 없어서 밑에 내려 가지는 못하고,
그대신 최대한 가까이 가서 찍은 사진이다.
선민아, 인천에서 더구나 창영동엘 가서
역사 깊은 창영 교회를 방문하고
한 담벼락 사이로 이웃하고 있는
우리 모교 보며 우리 생각까지
해주었다니 고맙구나.
창영동 하면 역시 혜경이네 지성 소아과와
건너편에 있있던 창영당 아이스케키집
빼놓을 수 없는데, 특히 팥들은 케키맛은
맛이 좋아 아직도 잊혀지지 않고 있지.
홍예문 보니 근방에 병숙이네
아이스케키집도 물론 생각나고 말고!
아! 그리운 옛날들 이구나.
나도 불러본다.
병숙아 !
영분아 !
혜경아 !
현애야 !
3년 전 봄 창영 초등학교 방문했을 때
강당 앞 마당에 1학년생 한 반이 일렬로
서 있는 걸 보며 바로 그 해로부터 50년 전의
우리를 상상하며 신기해 했는데.
가슴 쓰린 일은 우리 다닐 때 4000명
헤아리던 학생 수가 겨우 800명 이라는 점.
그리고 뒤운동장과 거기 있던 교실건물,
도서관 자리에는 생소한 건물들이 들어섰더구나.
재선아 !
무자야 !
창영동 살던 정님아!
또 경란이가 있고
정숙이도 있지.
가물가물한데
정우야 , 미안. 너도 창영이니?
그렇다면 한 반한 적이 없어
생각이 안미칠 수 있겠다.
키큰 김정숙은 부평, 대치동 김정숙은 송림
정우는 축현이 아마 맞을걸~~~
애들이 그리 많이 줄어서 걱정이지.
선민씨가 창영교회 사진을 올려 주시니 지난시절 제가
창영교회 구내에서 하숙을 하며 보내던 시절이 생각이 나는군요
제가 중학교 3학년때 부터 고1학년까지 2여년 동안 교회에서 기숙하던 일이
생각납니다
제가 교회에 딸린 구내 주택에( 일자형의 길다란 집모양에 방이 여럿이 있엇음)하숙을 한 사연은 이렇습니다
중고교 동기인 홍연표( 현재 미국에서 목사로 있음)군의 소개로 교회 구내에서 기거 하시던
권사님의 밥식구가 되었습니다 권사님(이름이 기억이 안남)은 슬하에 자식이 없는 할머니이셨는데
생활 호구책으로 나와 같은 학생들을 몇명 하숙을 치면서 생활을 하셨는데
친척이 강화에 많이 계셨던 걸로 기억이 납니다
나를 권사님께 소개한 홍연표도 교회에 기거하는 식구중 한가정의 아들이였는데
그의 아버지는 교회에 소속된 잡역부로 청소며 교회의 굳은 일이 다 하시는
신앙심이 무척이나 두터운 분이셧습니다
창영교회가 얼마나 커던지 목사님 사택 말고 구내에 기거하는 세대가 4~5세대는 된것 같습니다
하숙을 한다고 해도 별도의 방이 따로 있는것이 아니고 대여섯명이 길다란 방 하나에 혼숙하는
생활 패턴이였습니다
내가 생활 하는 방은 창문을 열면 영화여중 교문이 있었습니다
방 청소시 창문을 열라면 보통학생들 보다 일찍등교하는 주번이나 쳥소담당 여학생둘과
눈을 마주치는 일이 일과의 시작이였습니다
몇몇 학생이 등교하면 그때부터 학교 에 달아 놓은 마이크에선
소녀의 기도니 엘리제를 위하여 등등 음악이 나오기 시작 하죠
내가 교회에 기거하는 동안 목사님은 明목사님( 존함이 생각 안남) 이셧는데
기억되는 것이 우리와 학년이 같은 아들과 그때 성악을 전공하던 대학생 따님이
있었는데 발성연습 소리에 시험기간에는 공부에 방해 된다고 얼마나 저주를 했는지...
그리고 목사님 아들과 나는 중등부 회장선거에서 내가 회장이 되고...
하숙집 할머니인 권사님을 따라 새벽기도를 많이 참석하게 되었는데
할머니 할아버지 가운데 유일하게 중학생이 한명 있었으니 귀여움은 독차지...
목사님도 내 이름을 기억했다가 당신의 아드님과 날 비교하면서
훈육하셨으니 목사님 아들과 나는 물과 기름 같은 존재로 변질...
하긴 목사님 아들은 우리또래 중에서는 말썽구러기로 인천시내에 악명이 자자..
어느날 새벽기도에 가다가
교회 십자가 뒷로 둥근달이 걸쳐 있는 걸 보고 성령이 나에게로
다가 오는 그런 성스런 모습을 경험했던 교회가 창영교회 였답니다
그 후 고1학년 후반에 제고 구내로 기숙처를 옮겼지만...
아마도 그 때 중등부 여학생이 혹시 이방에 잇으려나????
내가 부른 정숙이는
옛날 옛적 도원동에 살던
익살스런 얘기 재미나게 할 때
저는 웃는 척 마는 척 해가며
듣는 이들은 폭소하게 하는 이정숙.
하늘하늘 영희가 잘 알고 있지.
신앙체험을 하셨다니 지금쯤은 장노님은 되셨을 터인데 어느교회를 섬기시는지 궁금하네 ~
쇠님이나 저에게는 섬미니에 성지순례가 우리에 어린날 추억을 잔잔하게 들추어주니 교복입은 맘입니다
쇠님~ 인일 교복 입고 잘 읽었습니다 또 뵈유 안녕
어린나이에 성령받는 신앙체험??을 했던
그 중학생은
역설적으로 너무나 유명한 목사님과 교회의 십자가 품에 가까이에서
생활해서 인지는 모르나 무종교인이 되엇습니다
후회하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아직껏 온 집안 식구(모친 처 아들 딸)가 카톨릭에 귀의 했으나
집안 봉제사를 핑개로 정신적으로 황폐한 처지로 있습니다
핑개아닌 핑개를 대고 잇으니 이해 바랍니다
헌데유 저는 이런것을 보았습니다 8-9살때 동래 아이들 쫓아서 박 태선 장노님 ! 생각 나시죠?
부흥회에 전도를 받아서 가게 되였는데 밤이라 그땐 가로등이 그리 10000지 않았던 인천이였습니다
그때 전도관이 송림동 전에는 옛날 인천여고 정문 지나서 인천여중 들어가는골목지나서 홍예 문이 보일때 제고 들어 가기 직전 오른쪽에 일본인 김치공장? 짠지공장이였던 자리에 임시로 있었습죠[아! 인천을 그리면서~~~]
쇠님도 그지역은 잘 생각 나실것입니다 제가 금곡동을 살았는데 문화극장 지나서 배다리 지나
동인천역지나서 옛 인천여고 정문지나야만 그 임시 전도관 건물이 나타나는데 어린 나이에 익숙하지 않은
밤길을 동무따라 강남 간것보다는 그때 담임 선생님이 전도관을 열심히 나가시는데 사이 사이 전도를
하시는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선생님한테 눈에 뜨일려고 감람나무 오셨네! 에 참여했는데 집회가 끝나고
담임 선생님한테 눈도장찍고 집으로 오는길은 갈때와는 달리 11시경에다 그 시간때는 상가마져 불을꺼서
아무것도 보이는것이 없는 밤에 그냥 어림으로 적막을 헤치며 집에 왔었죠 그런데 그때 집회에 참여한 어린아이들이 그분에 말씀가운데 강하게 역사하면 그뜨거운 공기 속에서 눈이 나리는것을 두 손으로 받는것이였습니다 헌데 보지 못하는 저는 은근히 선생님 뵐 면목이 없는것이였습니다 저만 성령을 못 받느것이였죠
그때 같이간 제 남동생도 받더라고요 아이고 쇠님 제가 그만 하차하여야 도기에 내일 계속 안녕
거기에 중고등때는 반사가 되여 여름 방학엔 자유공원에 아이들을 죽 몰고 올라가서
북치고 장구치고 전도 하는 모습을 우리학교 아이들한테 뜨여 제가 얼마나 그때
망신스러웠는지요!!! 그것뿐인감요 새벽기도 갈땐 곤히 자는 저를 깨우는것입니다
대문 잠그라고 ! 그것까지는 OK ! 장마때 깨끗이 제가 다려준 교복을 입고 교회를 가면
우산이 하나뿐이라 그 우산이 혹 내차례가 않될까 걱정이 되여 빨리와! 하고 소리를 꾁!
질렀더니 난 우산 없이 비를 피해가요 ~ 하는것 아니겠어요 그래도 소리질러 덴것도 미안하고
교복 빨아델 것도 힘이 들어 우산을 펴주면 거절하고 정말 우산없이 장마비속에 성경끼고
비속을 헤치고 가더라고요 한 30분 거리라서 엄청 젖었으리라는 생각과는 달리 동생은 돌아올때
보면 교복이 젖은자죽이 없고 빳빳하게 그데로 있는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죠 어떻게 장마비에
우산 없이 30분씩이나 걷는데 옷이 말짱하냐고 물었죠 동생 왈~ 누나 ! 비를 피하도록 간구해요
그렇케 어린 나이에 남이 못하는 체험을 하더라고요 그후 동생은 직장인이 되였어요 한국은 워낙
술 문화가 특징이 있고 졸게가 상관에 술잔을 거절 못하던때라 술에취해서 삼일예배에 참여하여
뒤에서 예배도중 딱꼭질을 한는 추태를 보이니 그 얼마나 웃우게 거리겠냐만서도 그래도 늦어도
취했어도 교회 자리를 비우는일이 없는 동생 ! 더욱 야기꺼리는 고1때 저희 친정 아버님 돌아가시고 삼오제가
일요일이였는데 상복을 입은 장남이 없어졌기에 저는 짐작을했죠 아니나! 시골 십리길을 상복입고
가서 예배드리고 개울에 젖은 짚신 신고 성경 옆에 끼고 묘를 향해 올라 오더라고요 그런 동생 ~ 물론
지금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 교회를 섬기고 평생을 동샐한테 양보 내지 주눅이 들어 살아 왔습니다
제가 5째 딸인데 그 남동생을 보았기에 어릴땐 주위가 모두 그 동생으로 인하여 엮어졌고 커서는 목회자에
누나로서 모두들 제 신앙을 목사로 보는데 그렇지 못한것이죠 어떤때는 그런것에서 자유가 되고 싶지만
아직도 동생은 대여섯해를 더 목회를 할것 같군요
쇠님이시여 ! 지금도 주님은 기다리시고 계십니다 두손 벌리시고 "양국아 내가 여기 있노라 " 라고~~~
지울까 하다가 그냥 두었습니다 미국은 내일이 추수 감사절이라 흩어졌던 친척들이 모이고 터키를 굽고
분주하군요 저희조카들도 영국 버지니아 엘에이에서 왔고 제 아들은 뉴욕에서 와서 사촌들끼리
만나서 지세며 뜨겁군요 쇠님 그분 음성을 들으세유 섬미나 그렇지? 안녕
그러셨군요?
내가 씨애틀에 갔을때 호문언니가 동생목사님이 섬기시는 교회에서
여러가지로 많이 헌신하시는 모습을 보았지요.
목사님의 누나로서 뒤에서 말없이 보사하시는 모습 참 은혜스러웠습니다.
남동생 둘이 다 목사님이시니 참 축복받은 집안이세요.
장국오라버니가 중등부 회장까지 맡아 섬겼다니 정말 놀랍네요.
신앙의 뿌리가 아직 살아있어 언젠가는 다시 교회에 나가시게 되리라 믿어요.
이재화오빠도 저랑 함께 교회에 다닌적이 있었지요.
지금은 주일날은 낚시다니시고 해외출정이 너무 잦아 교회에 못 나가시고 계시지만
새언니가 신앙이 좋으신 권사님이시니 언젠가는 꼭 함께 교회에 나가시게 되리라 믿습니다.
이 방이 무슨 "신앙간증의 방"같군요~~~
몹씨도 훈훈합니다.
이정숙과 한동안 전화하고 소식 전한다.
몇년전인가 노미란데 결혼식장에서 만나고
뒷풀이에서 재밌게 놀고, 윤숙자가 준 참기름 2병 나누어 주며
같이 차 마시고 김정숙, 이정숙 같이 만나고
오늘 오랫만에 반가운 얘기 많이 하였네.
양국씨!
그랬군요
이곳에서 그때 그 사람들을 혹시 찾을려나...
그때 아련한 이야기에 취하고
만나도 너무 반가울테인데..
호문아!
남동생 2분이 목사님이시라고
어이구 훌륭하시네
춘자에겐 또 한번 글 쓰겠네.
누가 찾아와서...
금방이라도 눈이 한바탕 쏟아질 것 같더니만
가랑비가 내리네요.
선민언니 덕분에 두루두루 잘 구경했어요.
학창시절엔 그리도 커 보이던 홍예문도
얼마전에 휙 지나가면서 보니 너무나 작더군요.
모두들 그리 아름다운 추억이 담긴
인천은 영원한 고향이 아닐 수 없지요.
따끈한 커피 한 잔 드셔요.

호문씨!!
선민씨!!
춘자 동상!!
마당쇠의 신앙에 대해 관심갖어 주시니 고맙습니다
이곳에 창영출신이 많으니 창영학교앞 꿀꿀이 죽 얘기를 아니 할 수 없군요
당진에서 올라와 중1학년 때는 숭의동 사범학교 앞에서
인척 형들과 자치를 할 때인데 배가 고프면
창영학교 앞 철길옆 골목길로 꿀꿀이 죽을 사 먹어러 가곤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제고 동창을 만나면 많이 합니다만)
그곳을 간 것은 인천 친구들의 배려로 처음 간 것이지만
처음 시식에는 엄청난 인내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배가 고프고 먹는 회수가 많아 지면서 입맛도 들더군요
악담을 하는 사람은 그 음식에 면도날이 나왔다고 하지만....
그후 80년대에 들어와 의정부에서 부대찌개가 맛있다고 소문이 자자 했지만
음식명 앞에 미군 부대찌개라는 명칭이 붙는 바람에 창영학교앞 꿀꿀이 죽과 연관이 돼
부대찌개를 한동안 멀리 한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맛있게 먹지만....
숭의동에서 비포장 도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전동 학교까지 등교하느라
먼지에 눈병이 자주 난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시절엔 짚차을 개조한 합승 승합차가 씽씽거리고 달린 때 입니다
이런 추억이 많은 인천이지만 시골 초등학교 출신이여서 인지는 모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인천에 간 적이 드물고 해서 창영교회나 사회관을 찾을 기회가
없어서 변한 모습을 볼 수 없었는데
선민씨가 몇장의 사진을 보여 주셧지만 나로서는 학창시절 6년을
돼 돌아 보게 하였습니다
선민씨!!
감사!! 감사!!
창영교회하면 생각 나는것은 초등시절 크리스마스에 사탕 받으러
일년에 한번 가보는 곳으로 기억이.
양구기는 아무리 마당쇠 이지만, 옆구리에 성경책과 찬송가를 끼고 있으면,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전형적인 목사님 타입 이지요 ^^
계속 교회를 다녔으면 지금쯤 훌륭한 목사님이 되었을 것으로 확신 합니다.
헤아리면 심부름을 그 곳에 갔습죠 철길 바로 옆에 꿀꿀이 죽과 함께 생선 땜뿌라를 부그부글
튀기는것을 보노라니 엄청 먹음직스러워서 침을 꿀꺽 삼키기도 했습니다 외출때는 교복을 입으라는
학교 규칙데로 나비 넥타이를 메고 사먹을수가 없는 입장이였습니다 저는 꿀꿀이 죽에서 예쁜 핀이
나왔다는 야기를 들은적이 있어서 행여 나 했으나 없더라고요 조카는 역시 그 음식도 못 먹더라고요
저도 비위가 상해서 먹을수가 없었지만 지금 제가 그 음식에 원조 동래에서 사는것 아니겠어요
생각하니 그 꿀꿀이죽에 들어 있던것은 콩과 쏘세지 그리고 햄등등 이였던 생각이 나는군요
어제는 이곳 추석 [추수 감사절이라서] 터키와 함께 바로 그 꿀꿀이 죽 같은 음식으로 배를
눌러 체웠습니다
택님! 저도 동감이 가는군요 60이 너머서 목사 안수 받는분들 가끕 뵙거던요
증말 그 타입입니다 쇠님은~~
춘자후배 ! 재화 옵빠와는 어느 교회를 섬겼는지 ? 증말 이방이 신앙간증 방 같구먼 ~
섬미나 ! 내 동생들 땜시 아주 조심스러울때가 있지 ~
이렇케 인천을 둘러 둘러 사진으로 보니 기냥 그리움뿐이군
이 기회에 쇠님을 전도할까? 이글을 읽으시고 필이 꽃혀야 할텐데 ~ 모두 안녕
우리 동창들 어쩜 이렇게 씩씩하고 활기차게 당당하게 살아갈까....더욱 성숙된 모습이 보이는것 같아 감사 감사 또 감사...
특별히 병숙이 소식 궁금했는데 미국에서 사모역할한다니 반갑구나.. 날 기억하고 있을까? 너의 엄마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리고 특별히 너희집 아이스케키가 가장 부러웠단다. 아름다운 추억은 역시 우리의 마음을 평온케 해 준다...
정말 반갑다. 친구들... I ♥ YOU
우리 동기중 송씨가 7명 있었지
송 미선 : 인천에가서 만나보기도 했지만 매일 홈에서 만나고
송 희정 : 뜻하지 않게 여기사는 12회 후배가 희저이를 잘 알기에 한국 방문길에 깻잎 장아치를 보내여
한 2년을 잘먹었지 그래서 전화해서 목소리교환도 했고 변한 사진도 여기 홈에 올려져 보았고~
송 영신 : 뉴욕에서 간호사로서 서 순석 선생님과 같은 지역에 살고 같이 늙는다나 ~
송 미영 송혜숙 송 숙희 한번도 소식을 접하지 못했지 송씨 단합 하면 우껴 ? 증말 반가워~
너도 시애틀 올일 있으면 들러 253 332 9388 넌 2박 3일 책임져준다 미국에선 김 호문으로 통해 안녕
반갑다!~~
나 기억 할련지?~~`
워낙 학교 다닐때 존재가 미약해서리.......
먼저번에 송미영에게 전화왔었는데
송영숙 한테 걸은 전화가 잘못 걸려와 한참 이야기 나누었는데
송미영이랑은 통화했는지?~~~
미영이랑 꼭 통화해 보기 바란다.
글그 보니 송씨도 꽤 많구먼~~~
송숙희 소식 정말 궁굼하다.
미국에서 의사 선생님 잘하고 있으려나?~~~
미국에서???~~~
영신이 지금의 날 보면 뭐라구 할까?
세월의 흐름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나의 얼굴을 보면....
예전에 고교시절~~
답동성당 메리놀 도서관에 공부 핑게대고 놀러 다닐때
내 앞자리에서 열심히 공부하던 영신이가 뜬금없이 하는말
"미선아~~~
넌 하나 하나 뜯어 보면 이쁜것 같은데 왜 안 이쁜거니?~~~"
지금도 잊혀지질 않네!
무심히 던진말은 영신이는 기억 못하고 있겠지.....(:f)::$
지난번에 재선이에게서 전화가 와서 미영이 소식은 들었단다.
호문이는 재선이장남 결혼식때 잠깐 보았는데 학교다닐때의 그 이미지가 그대로 있더구나.
그래 시애틀에 가면 너에게 갈께 그때가 언제쯤 될찌는 몰라도...
호문이가 생각한대로 송씨가 여럿 있네. 宋모임을 가져야 할까?
참! 팀엄마가 4기라며? <6남자와 산 이야기>저자인 이은성이..
내가 다니는교회(수원중앙침례교회)에 팀이 여러번 왔었는데도 몰랐는데 동영상보고 알았다.
모두들 곳곳에서 아름답게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 보기좋다.
언제나 너희들을 생각하며 훈훈한 마음을 안고 살아가자.. 샬~롬♥(:ab)
정말 반갑다.
이 해가 다 가기전에 글 잘 쓰는 친구 한명 또 모시게 되어
정말 고맙다.
얼굴은 기억이 잘 안난다 해도 우린 반가운 친구야~~~~~
동창회날 꼭 와야 돼~
우린 손에 손잡고 그대 이름도 멋진 송명순
(요즘은 명순이가 아주 귀한이름 이지 그치...종심아!) 기다릴깨~
우리컴엔 송씨가 (:y)(:y)(:y) 의뜸이야.
내가 이 글을 잘라 하는 지금에야 발견했네.
쏘오리.
이름은 기억 나는데
암만 머리를 짜도
모습이 영 떠오를질 않네.
내일 동창회에 꼭 참석하여
콤에서 찾아보게 되기를 기대한다.
미선아,
일곱 개의 촛불이 깜박이니
한동안 꺼지지 말아야지?
며칠전 전화를 걸어보니 미서니가 받더라고
수첩에 미서니 전화가 찍혔네.
종심이를 비롯하여 궁금하지 않게.
인천을 다녀오며 울 모든 친구들의 고향인데,,,,,
첫번째 발걸음이 창영교회이었고....창영초등학교를 보며 종심 혜경 병숙의 초등학교인데
인천 성공회, 홍예문(광서니 생각남), 인일여고 제고를 바라보고
우리모임 회장님께서 쭈욱 설명을 하시며
제고는 우리모교(그분 제고, 서울대출신) 인일여고는 한선민 모교입니다.
(40여명중 인천 출신이 2명이라 고향동생이라며 챙기시더라고)
홍예문은 완성하기까지 일본 사람들이 3년이나 걸렸다나?
친구들 보여 줄려고 무척 많이 셧다를 눌러 댓지만 다 보일순 없고.
특히 해외 친구들!
종심이(창영출신이라)를 비롯하여 많이 생각났음.
창영교회 여선교사 기숙사는 백여년전에 목욕탕과 수세식 변기가 있었다 해
모두들 놀랐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