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몸의 상태가 좋지를 않아 조제실에서 휴식을 취할 때가 많다

며칠전에도 한가해서 쉬고 있는데 후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전산 아가씨가 맞이한다.
"어서 오세요. 뭘 드릴까요?"
"박카스 한 병 주세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이다.
난 그냥 누워 있었다.
조제가 아니므로 나가지 않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예의 그 조용한 목소리가 들린다.
"약사님은 안 계셔요?"
"녜, 안에 계신데요"

나는 슬그머니 일어나 나가 보았다.
어쩌다 오는 그 남자는 내가 나오는 것을 모른체 후문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가 나가자마자 아가씨는 나를 처다 보고 킬킬거리고, 나도 함께 멋쩍게 웃는다.
이제까지 그 사람이 나를 찾는 질문을 한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내가 보이지 않으니 어디를 갔는지 물어본 것이다.

이 사람이 우리 약국에 오기 시작한 것이 거의 6개월이 가까워 온다.
그는 키가 자그만하고 눈이 똥그란, 마음이 착하게 생긴 30대 중반의 사람이다.
그리 못생기지도 않은 얼굴인데 그저 조용하니 약만 사가지고 갔다.
그것도 박카스나 판피린 한 두병만 사가지고 간다.

한 가지 특징이 있다면 약국에 올 때마다 나를 뚫어지게 처다 본다는 것이다.
보통의 남자라면 우선은 여자를 보는 것이 통례인데 이 사람은 아가씨는 안중에도 없고 그저 나만 처다 본다.
나랑 눈이라도 마주치면 얼른 눈길을 돌리곤 하는데  기회를 봐서 나 모르게 다시 힐끔 힐끔 훔쳐 보곤한다.
그렇다고 말을 붙이는 것도 아니고 그저 가만히 보고만 있다가 내가 처다보면 당황해 하면서
얼굴을 약간 붉히며 눈을 내렸다가 약간의 알 수없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나를 슬쩍 쳐다본다.

약국에 처음 왔을 때부터 그 눈빛이 심상치 않았던지 눈치 빠른 우리 아가씨는 그 날부터 날 놀렸다.
"그 아저씨는 약국장님이 마음에 드나 봐요"
"엥?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릴...."

그 후부터 나도 그를 눈여겨 보면서 가능한 마주치지 않으려고 하였다.


지금부터 한 3년 전 쯤의 일이 생각이 난다.

부천시 송내에 있는 약국에 있던 시절, 어느 날 송내역에서 전철을 타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부천역에서 나보다 몇 살 정도는 적어보이는 양복을 입은, 허름해 보이지 않는 중년의 신사가
올라타더니 열차안을 휘둘러 보다가 내가 앉아 있는 옆에 앉았다.
내가 앉은 자리는 긴 좌석의 거의 중간쯤이었고 좌우에는 비어 있었기에
구태여 내 옆에 바짝 붙어서 앉을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바로 내 옆에 앉았다.

다음역인 역곡에서 제법 많은 사람들이 탔기에 빈 자리가 채워졌으나 그렇다고 엉덩이를 붙여가면서 앉을 정도로
붐비지는 않았는데 그 사람은 승객들이 자리를 메우는 것을 기회로 나의 살과 맞닿을 정도로 밀착하여 앉았다.

난 대학교 때 기차 통학 할 때부터 천성적으로 옆자리에 여자가 앉으면 기분이 좋았고
모르는 남자들이 끼어들면 가능한 서로 접하지 않도록 피하곤 하였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 사람이 무안하지 않도록, 신사다운 매너로 점잖게 약간의 간격을 두고 옆으로 옮겨 앉았다.

그리고는 그 다음부터 그 사람을 의식하게 되었다.
그 사람은 가끔씩  나를 처다 보고 있었다.  
나는 처음에는 그 사람이 그저 습관적으로 주위를 살피는 줄 알고 잠자코 있었으나
처다 보는 횟수가 잦아짐에 따라 은근히 신경이 쓰이고 여자도 아닌 남자가 자꾸 처다보는 것이 기분도 좋지않고 하여
주의를 줄 의향으로 한 번 고개를 돌려 그 사람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 보았다.

자꾸 내 얼굴 훔쳐 보지 말라는 무언의 시위를 한 것이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짐짓 모른 척을 하면서 반대쪽을 바라본다.
그러더니 잠시 후에 다시 바짝 곁으로 다가와 붙어 앉는 것이 아닌가?

문득 이 사람이 호모가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다시 점잖게 옆으로 한 뼘 정도 옮겨 앉으며 차갑고 냉소띤 인상을 쓰면서 앞만 보고 있다가
열차가 구로역을 출발하자 마자 일어나서 앞 칸 차량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뒤에서 들리는 인기척이나 느낌으로는 이 사람도 일어나 나를 쫓아 오는 것 같았다.
조금 속도를 올려 빠른 걸음으로 계속 앞으로 가니, 따라서 재빠르게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나는 신도림역에서 양천구청으로 가는 지하철을 바꾸어 타야 한다.
그러려면 신도림역 지상 플랫트 홈에서 내려  지하 플랫트홈으로 내려가야 한다.
신도림역은 아마 우리나라에서 가장 붐비는 역일 것이다.
아침 러시 아워에는 그야말로 사람들에 밀려서 다녀야 하는 곳인데 저녁 때에도 엄청 많은 인파들이 붐빈다.

늙은 남자가 나를 쫓아 온다고 단정을 하니 기분이 나빠지면서 왠지 찝찝해져서 얼른 이 사람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빠르게 지하 계단을 내려 오면서 잠깐 기둥 옆으로 몸을 숨기고그 사람이 따라 오는지 살펴보았다.
황급하게 계단을 뛰다싶이 내려오던 그 사람, 내가 보이지 않자 좌우를 살피고 있다.

나혼자만의 착각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아마도 나를 뒤쫓아 오다가 많은 인파속에서
나를 순간적으로 잃어버리고는 어디로 튀었는지 찾고 있는 듯싶었다.
나는 반대편 계단을 내려가 집으로 가는 플랫트 홈으로 갔다.
양천 구청역에 내려서도 좌우를 둘러보면서 그 사람이 쫓아오는지 확인을 하였다.

아니 50이 넘은 남자를 쫓아 다니다니 이런 황당한 일이 다 있나?
모르긴 하여도 그 사람 호모임에 틀임이 없다는 생각이 자꾸만 났다.
왠지 기분이 영 개운치가 않아 그 현실이 싫어 죽겠다.

아기씨와 농담을 하면서 그 당시 며칠동안 찝찝한 마음으로 지냈던 기억이 떠 올랐다.


아가씨가 놀린다.
"약국장님을 좋아하는가 봐요.
우리 약국에 올 때마다 약국장님만 처다 보고 그랬잖아요.
오늘은 안 보이시니까 어디 가셨냐고 물어보기까지 하구요.
평소에는 말도 없이 보기만 하다가 안계시니까 궁금했던 모양이에요" 하면서 몸을 흔들며 크게 웃는다.

나도 따라 웃으면서 "요사이 심심한테 애인으로 만들까" 했더니 아가씨가 다시 묻는다.
"그럼 누가 여자가 되는 거예요?"


예쁜 여자가 전철에서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쫓아와도 무서울텐데 남자가 지겹게 쫓아다닌다면?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고 두려워진다.


하긴 지금부터 25년전 태평양화학이라는 회사에 들어가 신입사원 교육 받을 때에 지도하던 남자 사원중에서
양성적인 성격의 사람으로부터 난생 처음 약간 야리꾸리한 대접을 당한 경험도 있었다.
그러고보면 나에게는 여자한테보다는 남자들한테 뭔가 끌리는 매력이라도 지니고 있단 말인가?


3 년전의 그 남자는 적극적이어서 낌새도 즉시 알아차렸고 몇 시간의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요 남자는 노골적인 표시도 없이 은근히 야릇한 눈길만 주면서 심심하면 나타날 모양이다.

이 사람 앞으로도 약국에 자주 올 텐데 나 어떻게 하면 좋아요?

그 와중에서도 내가 남자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당하는 쪽이라는 것으로 다소 위안을 삼아야 할까나?


(3 년전 일어났던 일을 그 날 집사람한테 조심스럽게 이야기 했더니 돌아오는 말씀이
"여봇~   착각하지 마세요!!!!!!
그래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그저 가슴속에 묻어두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