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동에 들어오니 내집에 온 듯 마음이 편하다.
일기 쓰듯 혼잣말 하듯 3동을 거닐며 좀 쉬고 싶구나.

언제 였더라.......
여리기님께서 털쉐터 이야기를 쓰시자 3동에 대박이 터졌다.
여리기님의 글은 단번에 수많은 독자를 확보하며 인기는 하늘을 찌를 만큼 급상승하였다.
나도 독자 의 한사람으로서 댓글을 달며, 아련한 기억에 떠오르는 나의  '파란 바지 이야기'를 얼핏 내비쳤었다.

오늘 울집 마당에 매화는 한창인데
마당 한가득 퍼져나오는 매화 향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그 시절의 파란바지처럼 조금 외롭고 꿀꿀하다.

이럴 때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오늘은 그 '파란 바지'를 다시 꺼내 입어보기로 한다.
.................................................................................................................................................

                         파란바지 이야기


중학교에 입학하자 초등학교 시절과는 다르게 교복이란 걸 입게 되었다.
3월 입학이라 동복부터 입게 되어 있었고 나 역시 양장점에 가서 동복을 맞추었다.
상의는 동그란 칼라가 달렸었던 것으로 기억되고 그 칼라에 가는 끈을 둘러서 목 아래에
나비모양 리본을 묶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하의는 (3월이니까 )스커트였다.
3년 동안 입어야 한다고 매우 크게 맞추어서 스커트는 허리를 몇 번 접어서 입어야 했고
상의는 어깨가 팔뚝까지 흘러내리도록 꼴불견이었지만 그래도 교복을 입고 보니 어깨가 으쓱거렸다.
중학생이 된 것으로 무슨 큰 신분상승 을 이룬 것처럼 나의 기분은 하늘을 날았다.
그리고 나의 이러한 신분상승을 아무 설명 필요없이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것이 바로 교복이었기에
나는 교복을 입을 때마다 즐거웠다.

여름이 오자 우리는 하복을 입었다.
상의 동복을 벗고 그동안 입었던 스커트는 그대로 두고 상의만 하얀 하복으로 다시 맞춰 입었다.
배다리 중앙시장 양장점들은 교복철만 되면 학생들로 붐볐다.
나도 로즈 양장점이란 곳에서 하복을 맞춰 찾아 입었다.  여름 내내 아니 겨울이 오기까지 나는 여전히 행복했다.
그 시절에는 춘추복이란 것이 없어서 동복과 하복이 바뀌어야 하는 시점에는 추울 땐 앞이 터진 스웨터를
걸치고 다니거나 하면서 교복과 사복 사이를 넘나들며 환절기를 스리슬쩍 어물쩡 보냈다.

그런데 교복 속에서 자신의 신분상승을 확인하고 확인하며 날마다 즐겁게 등교길에 오르던 나에게
매서운 겨울이 찾아오자 먹구름이 몰아쳤다.
상의 동복은 그대로 입지만 이제 하의를 바지로 바꾸어야 했던 것이다. 인일 여고 시절에는 찬바람 부는
겨울에도 우리는 아름다운 종아리를 그대로 내보이며 한 겨울에도 스커트를 입고 다녔지만
중학교때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당연히 바지를 맞추러 배다리 중앙시장 로즈 양장점으로 엄마가 나를 데리고 가실 줄 았았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오산이었다. 우리 집은 딸부자집이었다. 인천여고 2학년이 된 큰 언니가
바지가 작아서 못 입게 된 것이 화근이었다. 어쩔 수 없이 언니에게 새 바지를 맞춰줘야 함으로
나에게는 언니가 입던 교복 바지를 우라까이 해 줄테니 그것을 입으라는 것이었다.
우라까이 하면 새 거나 다름이 없게 된다는 설명이 뒤를 따랐다.
우리 세대는 다 아는 말이지만 우라까이란 (일본어겠죠?) 옷을 뒤집어 다시 만드는 일이었다.

나는 좀 싫었지만 새 거나 다름없게 된다는 말에 일말의 희망을 걸었다.
우리 집은 대가족이어서 옷을 대물림 받아 입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기에
우리 작은 언니가 둘째 고모의 교복을 물려받아 입었듯이(같은 고등학교니까)
그리고 우리 큰 언니가 큰 고모의 옷을 물려 받아 입었듯이
딸 중 막내인 나도 그래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상의는 학교가 다르므로 교복 모양도 달라서 할 수 없이 맟춰 줄 수밖에 없었지만
바지는 모양이 거의 비슷하니 너도 끽 소리 말고 물려 입어야  한다는 어머니의 거역할 수 없는 논리 앞에
나는 그야말고 끽소리 한번 못하고 무너져버렸다.

우라까이 해온 바지를 본 나의 눈은 아마도 안경원숭이처럼 커져 있었을 것이다.
언니가 입고 다닐 때는 무심히 보아서 몰랐는데 아무리 뒤집어 만든 바지였지만 색깔이 달랐다.
우리의 교복은 흔히 ‘곤색’이라고 잘못 말하는 감색이었고 천은 대개가 ‘구레빠’ 또는 ‘사지’ 라고 불리는
질긴 천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천이야 좀 다르거나 말거나 내 바지의 색깔은 감색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푸른 색이 감돌아 상의와 같이 입으면 너무나 현격한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내 눈치를 모를 리 없었다.
“괜찮아. 뭐 색깔이 약간 다를 뿐인데 뭘 그러니. 그래도 사지 천으로 만든 바지니 한 삼년쯤 빵꾸날 일은 읎을 거다.”
나는 어렸지만 엄마의 심정을 안다. 나의 어머니는 대가족의 맡며느리로서 나이 어린 시동생들과 시누이들,
그리고 겨우 10살 위인 시어머니를 모셔야하는 입장에 계셨기 때문에 우리 남매들에게 조금이라도 특별 대우를 했다간
매우 난처한 입장에 빠지는 위험스러운 처지에 있었다.

나는 엄마를 생각하면서 파란바지를 암말 없이 입고 학교에 다니기로 입술을 악물며 다짐했다.
그리고 정말 말없이 그 상의와 하의의 엄청난 색깔차이를 견뎌내며 아침과 저녁의 등하교길을 오르내렸다.
붉은 벽돌로 지은 공장들과 인천여고 사이의 자유공원으로 가는 길이 나의 등굣길이었는데
그 길은 누구나 알고 있듯이 등하교 시간이면 새까맣게 열을지어 오르내리는 학생들로 가득했다.
우리 인천여중 학생들뿐 아니라 이웃의 인성여중 여고 학생들도 있었을 터이고 인중과 제고를 다니는
남학생들도 만만치 않게 많았다.  

파란바지를 입고 그 새까만 학생들의 대열에 끼어 등교깃을 오를 때마다 나는 나의 바지가 너무 눈에 틔는 것 같아
견딜 수 없는 수치심에 시달렸다. 수치심이 목에까지 차오르면 나는 하는 수 없이 엄마의 얼굴을 떠올리며
입술을 악다물었다.
“괜찮아, 바지 따위가 뭔데...”
입술을 자주 악다물다보니 내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나는 점점 파란 바지를 입고 있지 않은 친구들 사이에
끼어 있고 싶지 않았다. 오로지 홀로 파란 바지를 입고 있는 나는 학교 생활이 점점 즐겁지 않았고
공부도 시들해졌고 홀로 모든 불행을 지닌 아이처럼 늘 숨을 자리가 그리웠다.    

그러나 나는 고집이 있는 편이었다. 이제는 집안 사정이고 어머니의 처지고 무엇이고 간에 스스로 다짐한
파란바지를 결코 포기할 수도 없었다. 매서운 겨울 바람 속을 나는 파란 바지로 견뎌내면서 스커트를 입던
지난 봄, 여름, 가을을 마냥 그리워했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그 파란바지의 원 주인인 큰 언니로부터 나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등굣길이 비슷한 우리 자매는 맛나당 빵집(맞나?)이 있던 작은 사거리의 예전 인천여고 교문자리까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걸어가곤 했었는데 그날은 언니가 나에게 먼저 후딱 가버리거나 자기가 간 다음
한참 후에 집을 떠나거나 하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혹시 등굣길에 함께 가게 되어도 내가 언니의 동생인
척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자신이 수치심에 시달리며 입고 다녔던 바로 그 파란바지를 대물림하여 자기 동생이 입고 다니게 된 사실이
친구들에게 알려지는 것이 언니는 싫은 거였다. 챙피하다는 거였다. 나를 보면서 언니는
자신의 수치를 보는 것 같아 괴로웠던 것이다.
언니의 속내야 어떻든 내 가슴은 큰 충격으로 거의 무너질 지경이었다. 나는 입을 악물고 변소깐에 가서 울었다.
소리 없이 끄억끄억 울었다. 언니의 한마디 말로 인하여 나는 더할 수 없는 수치심에 시달렸고 심지어는
마치 그 파란바지가 죄수복처럼 느껴졌다.

봄이 와서 파란바지를 벗고 다른 친구들과 똑같은 색깔의 스커트를 다시 입었지만 나는 파란바지 이전으로
돌아가지지는 않았다. 친구들 사이에 섞여 있어도 나는 홀로였다.  
다시 겨울이 오는 것이 싫어서 원형교사 옥상에 올라가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곤 했다.

지금도 외로움을 느낄 때는 하늘을 바라본다.
수치심이 느껴지거나 세상 사에 마음이 휘둘려 번거로워질 때도 하늘을 본다.
청명한 날의 파란 하늘을 바라보면 마음이 맑아지고 가벼워진다. 하늘을 바라보며 번거로운 마음을 비우고나면
마음이 넓어지고 자유로와져서 좋다.

그 옛날 나의 파란바지가 내 성격을 소심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파란바지가 아니었으면
나는 하늘을 바라보는 습관을 갖지 못했을지 모른다. 하늘을 바라보면서 나는 나에게 닥쳐오는
본의 아닌 실수 따위에서 오는 수치심을 극복하고 나에게 주어지는 작고 큰 상처들을 치유해나갔던 것이 틀림없다.

오늘 하늘은 군데군데 구름이 떠 갈 뿐 맑고 푸르다. 햇빛도 랑랑하다.  
봄볕에 기지개 한 번 켜본다.
앞으로도 이따금 마음이 번거로워지면
하늘빛을 닮은 내 마음 속의 파란바지를 꺼내 입어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