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회 | 포토갤러리 | - 게시판담당 : 한선민
글 수 2,982
3동에 들어오니 내집에 온 듯 마음이 편하다.
일기 쓰듯 혼잣말 하듯 3동을 거닐며 좀 쉬고 싶구나.
언제 였더라.......
여리기님께서 털쉐터 이야기를 쓰시자 3동에 대박이 터졌다.
여리기님의 글은 단번에 수많은 독자를 확보하며 인기는 하늘을 찌를 만큼 급상승하였다.
나도 독자 의 한사람으로서 댓글을 달며, 아련한 기억에 떠오르는 나의 '파란 바지 이야기'를 얼핏 내비쳤었다.
오늘 울집 마당에 매화는 한창인데
마당 한가득 퍼져나오는 매화 향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그 시절의 파란바지처럼 조금 외롭고 꿀꿀하다.
이럴 때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오늘은 그 '파란 바지'를 다시 꺼내 입어보기로 한다.
.................................................................................................................................................
파란바지 이야기
중학교에 입학하자 초등학교 시절과는 다르게 교복이란 걸 입게 되었다.
3월 입학이라 동복부터 입게 되어 있었고 나 역시 양장점에 가서 동복을 맞추었다.
상의는 동그란 칼라가 달렸었던 것으로 기억되고 그 칼라에 가는 끈을 둘러서 목 아래에
나비모양 리본을 묶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하의는 (3월이니까 )스커트였다.
3년 동안 입어야 한다고 매우 크게 맞추어서 스커트는 허리를 몇 번 접어서 입어야 했고
상의는 어깨가 팔뚝까지 흘러내리도록 꼴불견이었지만 그래도 교복을 입고 보니 어깨가 으쓱거렸다.
중학생이 된 것으로 무슨 큰 신분상승 을 이룬 것처럼 나의 기분은 하늘을 날았다.
그리고 나의 이러한 신분상승을 아무 설명 필요없이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것이 바로 교복이었기에
나는 교복을 입을 때마다 즐거웠다.
여름이 오자 우리는 하복을 입었다.
상의 동복을 벗고 그동안 입었던 스커트는 그대로 두고 상의만 하얀 하복으로 다시 맞춰 입었다.
배다리 중앙시장 양장점들은 교복철만 되면 학생들로 붐볐다.
나도 로즈 양장점이란 곳에서 하복을 맞춰 찾아 입었다. 여름 내내 아니 겨울이 오기까지 나는 여전히 행복했다.
그 시절에는 춘추복이란 것이 없어서 동복과 하복이 바뀌어야 하는 시점에는 추울 땐 앞이 터진 스웨터를
걸치고 다니거나 하면서 교복과 사복 사이를 넘나들며 환절기를 스리슬쩍 어물쩡 보냈다.
그런데 교복 속에서 자신의 신분상승을 확인하고 확인하며 날마다 즐겁게 등교길에 오르던 나에게
매서운 겨울이 찾아오자 먹구름이 몰아쳤다.
상의 동복은 그대로 입지만 이제 하의를 바지로 바꾸어야 했던 것이다. 인일 여고 시절에는 찬바람 부는
겨울에도 우리는 아름다운 종아리를 그대로 내보이며 한 겨울에도 스커트를 입고 다녔지만
중학교때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당연히 바지를 맞추러 배다리 중앙시장 로즈 양장점으로 엄마가 나를 데리고 가실 줄 았았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오산이었다. 우리 집은 딸부자집이었다. 인천여고 2학년이 된 큰 언니가
바지가 작아서 못 입게 된 것이 화근이었다. 어쩔 수 없이 언니에게 새 바지를 맞춰줘야 함으로
나에게는 언니가 입던 교복 바지를 우라까이 해 줄테니 그것을 입으라는 것이었다.
우라까이 하면 새 거나 다름이 없게 된다는 설명이 뒤를 따랐다.
우리 세대는 다 아는 말이지만 우라까이란 (일본어겠죠?) 옷을 뒤집어 다시 만드는 일이었다.
나는 좀 싫었지만 새 거나 다름없게 된다는 말에 일말의 희망을 걸었다.
우리 집은 대가족이어서 옷을 대물림 받아 입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기에
우리 작은 언니가 둘째 고모의 교복을 물려받아 입었듯이(같은 고등학교니까)
그리고 우리 큰 언니가 큰 고모의 옷을 물려 받아 입었듯이
딸 중 막내인 나도 그래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상의는 학교가 다르므로 교복 모양도 달라서 할 수 없이 맟춰 줄 수밖에 없었지만
바지는 모양이 거의 비슷하니 너도 끽 소리 말고 물려 입어야 한다는 어머니의 거역할 수 없는 논리 앞에
나는 그야말고 끽소리 한번 못하고 무너져버렸다.
우라까이 해온 바지를 본 나의 눈은 아마도 안경원숭이처럼 커져 있었을 것이다.
언니가 입고 다닐 때는 무심히 보아서 몰랐는데 아무리 뒤집어 만든 바지였지만 색깔이 달랐다.
우리의 교복은 흔히 ‘곤색’이라고 잘못 말하는 감색이었고 천은 대개가 ‘구레빠’ 또는 ‘사지’ 라고 불리는
질긴 천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천이야 좀 다르거나 말거나 내 바지의 색깔은 감색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푸른 색이 감돌아 상의와 같이 입으면 너무나 현격한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내 눈치를 모를 리 없었다.
“괜찮아. 뭐 색깔이 약간 다를 뿐인데 뭘 그러니. 그래도 사지 천으로 만든 바지니 한 삼년쯤 빵꾸날 일은 읎을 거다.”
나는 어렸지만 엄마의 심정을 안다. 나의 어머니는 대가족의 맡며느리로서 나이 어린 시동생들과 시누이들,
그리고 겨우 10살 위인 시어머니를 모셔야하는 입장에 계셨기 때문에 우리 남매들에게 조금이라도 특별 대우를 했다간
매우 난처한 입장에 빠지는 위험스러운 처지에 있었다.
나는 엄마를 생각하면서 파란바지를 암말 없이 입고 학교에 다니기로 입술을 악물며 다짐했다.
그리고 정말 말없이 그 상의와 하의의 엄청난 색깔차이를 견뎌내며 아침과 저녁의 등하교길을 오르내렸다.
붉은 벽돌로 지은 공장들과 인천여고 사이의 자유공원으로 가는 길이 나의 등굣길이었는데
그 길은 누구나 알고 있듯이 등하교 시간이면 새까맣게 열을지어 오르내리는 학생들로 가득했다.
우리 인천여중 학생들뿐 아니라 이웃의 인성여중 여고 학생들도 있었을 터이고 인중과 제고를 다니는
남학생들도 만만치 않게 많았다.
파란바지를 입고 그 새까만 학생들의 대열에 끼어 등교깃을 오를 때마다 나는 나의 바지가 너무 눈에 틔는 것 같아
견딜 수 없는 수치심에 시달렸다. 수치심이 목에까지 차오르면 나는 하는 수 없이 엄마의 얼굴을 떠올리며
입술을 악다물었다.
“괜찮아, 바지 따위가 뭔데...”
입술을 자주 악다물다보니 내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나는 점점 파란 바지를 입고 있지 않은 친구들 사이에
끼어 있고 싶지 않았다. 오로지 홀로 파란 바지를 입고 있는 나는 학교 생활이 점점 즐겁지 않았고
공부도 시들해졌고 홀로 모든 불행을 지닌 아이처럼 늘 숨을 자리가 그리웠다.
그러나 나는 고집이 있는 편이었다. 이제는 집안 사정이고 어머니의 처지고 무엇이고 간에 스스로 다짐한
파란바지를 결코 포기할 수도 없었다. 매서운 겨울 바람 속을 나는 파란 바지로 견뎌내면서 스커트를 입던
지난 봄, 여름, 가을을 마냥 그리워했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그 파란바지의 원 주인인 큰 언니로부터 나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등굣길이 비슷한 우리 자매는 맛나당 빵집(맞나?)이 있던 작은 사거리의 예전 인천여고 교문자리까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걸어가곤 했었는데 그날은 언니가 나에게 먼저 후딱 가버리거나 자기가 간 다음
한참 후에 집을 떠나거나 하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혹시 등굣길에 함께 가게 되어도 내가 언니의 동생인
척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자신이 수치심에 시달리며 입고 다녔던 바로 그 파란바지를 대물림하여 자기 동생이 입고 다니게 된 사실이
친구들에게 알려지는 것이 언니는 싫은 거였다. 챙피하다는 거였다. 나를 보면서 언니는
자신의 수치를 보는 것 같아 괴로웠던 것이다.
언니의 속내야 어떻든 내 가슴은 큰 충격으로 거의 무너질 지경이었다. 나는 입을 악물고 변소깐에 가서 울었다.
소리 없이 끄억끄억 울었다. 언니의 한마디 말로 인하여 나는 더할 수 없는 수치심에 시달렸고 심지어는
마치 그 파란바지가 죄수복처럼 느껴졌다.
봄이 와서 파란바지를 벗고 다른 친구들과 똑같은 색깔의 스커트를 다시 입었지만 나는 파란바지 이전으로
돌아가지지는 않았다. 친구들 사이에 섞여 있어도 나는 홀로였다.
다시 겨울이 오는 것이 싫어서 원형교사 옥상에 올라가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곤 했다.
지금도 외로움을 느낄 때는 하늘을 바라본다.
수치심이 느껴지거나 세상 사에 마음이 휘둘려 번거로워질 때도 하늘을 본다.
청명한 날의 파란 하늘을 바라보면 마음이 맑아지고 가벼워진다. 하늘을 바라보며 번거로운 마음을 비우고나면
마음이 넓어지고 자유로와져서 좋다.
그 옛날 나의 파란바지가 내 성격을 소심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파란바지가 아니었으면
나는 하늘을 바라보는 습관을 갖지 못했을지 모른다. 하늘을 바라보면서 나는 나에게 닥쳐오는
본의 아닌 실수 따위에서 오는 수치심을 극복하고 나에게 주어지는 작고 큰 상처들을 치유해나갔던 것이 틀림없다.
오늘 하늘은 군데군데 구름이 떠 갈 뿐 맑고 푸르다. 햇빛도 랑랑하다.
봄볕에 기지개 한 번 켜본다.
앞으로도 이따금 마음이 번거로워지면
하늘빛을 닮은 내 마음 속의 파란바지를 꺼내 입어보련다.
일기 쓰듯 혼잣말 하듯 3동을 거닐며 좀 쉬고 싶구나.
언제 였더라.......
여리기님께서 털쉐터 이야기를 쓰시자 3동에 대박이 터졌다.
여리기님의 글은 단번에 수많은 독자를 확보하며 인기는 하늘을 찌를 만큼 급상승하였다.
나도 독자 의 한사람으로서 댓글을 달며, 아련한 기억에 떠오르는 나의 '파란 바지 이야기'를 얼핏 내비쳤었다.
오늘 울집 마당에 매화는 한창인데
마당 한가득 퍼져나오는 매화 향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그 시절의 파란바지처럼 조금 외롭고 꿀꿀하다.
이럴 때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오늘은 그 '파란 바지'를 다시 꺼내 입어보기로 한다.
.................................................................................................................................................
파란바지 이야기
중학교에 입학하자 초등학교 시절과는 다르게 교복이란 걸 입게 되었다.
3월 입학이라 동복부터 입게 되어 있었고 나 역시 양장점에 가서 동복을 맞추었다.
상의는 동그란 칼라가 달렸었던 것으로 기억되고 그 칼라에 가는 끈을 둘러서 목 아래에
나비모양 리본을 묶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하의는 (3월이니까 )스커트였다.
3년 동안 입어야 한다고 매우 크게 맞추어서 스커트는 허리를 몇 번 접어서 입어야 했고
상의는 어깨가 팔뚝까지 흘러내리도록 꼴불견이었지만 그래도 교복을 입고 보니 어깨가 으쓱거렸다.
중학생이 된 것으로 무슨 큰 신분상승 을 이룬 것처럼 나의 기분은 하늘을 날았다.
그리고 나의 이러한 신분상승을 아무 설명 필요없이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것이 바로 교복이었기에
나는 교복을 입을 때마다 즐거웠다.
여름이 오자 우리는 하복을 입었다.
상의 동복을 벗고 그동안 입었던 스커트는 그대로 두고 상의만 하얀 하복으로 다시 맞춰 입었다.
배다리 중앙시장 양장점들은 교복철만 되면 학생들로 붐볐다.
나도 로즈 양장점이란 곳에서 하복을 맞춰 찾아 입었다. 여름 내내 아니 겨울이 오기까지 나는 여전히 행복했다.
그 시절에는 춘추복이란 것이 없어서 동복과 하복이 바뀌어야 하는 시점에는 추울 땐 앞이 터진 스웨터를
걸치고 다니거나 하면서 교복과 사복 사이를 넘나들며 환절기를 스리슬쩍 어물쩡 보냈다.
그런데 교복 속에서 자신의 신분상승을 확인하고 확인하며 날마다 즐겁게 등교길에 오르던 나에게
매서운 겨울이 찾아오자 먹구름이 몰아쳤다.
상의 동복은 그대로 입지만 이제 하의를 바지로 바꾸어야 했던 것이다. 인일 여고 시절에는 찬바람 부는
겨울에도 우리는 아름다운 종아리를 그대로 내보이며 한 겨울에도 스커트를 입고 다녔지만
중학교때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당연히 바지를 맞추러 배다리 중앙시장 로즈 양장점으로 엄마가 나를 데리고 가실 줄 았았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오산이었다. 우리 집은 딸부자집이었다. 인천여고 2학년이 된 큰 언니가
바지가 작아서 못 입게 된 것이 화근이었다. 어쩔 수 없이 언니에게 새 바지를 맞춰줘야 함으로
나에게는 언니가 입던 교복 바지를 우라까이 해 줄테니 그것을 입으라는 것이었다.
우라까이 하면 새 거나 다름이 없게 된다는 설명이 뒤를 따랐다.
우리 세대는 다 아는 말이지만 우라까이란 (일본어겠죠?) 옷을 뒤집어 다시 만드는 일이었다.
나는 좀 싫었지만 새 거나 다름없게 된다는 말에 일말의 희망을 걸었다.
우리 집은 대가족이어서 옷을 대물림 받아 입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기에
우리 작은 언니가 둘째 고모의 교복을 물려받아 입었듯이(같은 고등학교니까)
그리고 우리 큰 언니가 큰 고모의 옷을 물려 받아 입었듯이
딸 중 막내인 나도 그래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상의는 학교가 다르므로 교복 모양도 달라서 할 수 없이 맟춰 줄 수밖에 없었지만
바지는 모양이 거의 비슷하니 너도 끽 소리 말고 물려 입어야 한다는 어머니의 거역할 수 없는 논리 앞에
나는 그야말고 끽소리 한번 못하고 무너져버렸다.
우라까이 해온 바지를 본 나의 눈은 아마도 안경원숭이처럼 커져 있었을 것이다.
언니가 입고 다닐 때는 무심히 보아서 몰랐는데 아무리 뒤집어 만든 바지였지만 색깔이 달랐다.
우리의 교복은 흔히 ‘곤색’이라고 잘못 말하는 감색이었고 천은 대개가 ‘구레빠’ 또는 ‘사지’ 라고 불리는
질긴 천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천이야 좀 다르거나 말거나 내 바지의 색깔은 감색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푸른 색이 감돌아 상의와 같이 입으면 너무나 현격한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내 눈치를 모를 리 없었다.
“괜찮아. 뭐 색깔이 약간 다를 뿐인데 뭘 그러니. 그래도 사지 천으로 만든 바지니 한 삼년쯤 빵꾸날 일은 읎을 거다.”
나는 어렸지만 엄마의 심정을 안다. 나의 어머니는 대가족의 맡며느리로서 나이 어린 시동생들과 시누이들,
그리고 겨우 10살 위인 시어머니를 모셔야하는 입장에 계셨기 때문에 우리 남매들에게 조금이라도 특별 대우를 했다간
매우 난처한 입장에 빠지는 위험스러운 처지에 있었다.
나는 엄마를 생각하면서 파란바지를 암말 없이 입고 학교에 다니기로 입술을 악물며 다짐했다.
그리고 정말 말없이 그 상의와 하의의 엄청난 색깔차이를 견뎌내며 아침과 저녁의 등하교길을 오르내렸다.
붉은 벽돌로 지은 공장들과 인천여고 사이의 자유공원으로 가는 길이 나의 등굣길이었는데
그 길은 누구나 알고 있듯이 등하교 시간이면 새까맣게 열을지어 오르내리는 학생들로 가득했다.
우리 인천여중 학생들뿐 아니라 이웃의 인성여중 여고 학생들도 있었을 터이고 인중과 제고를 다니는
남학생들도 만만치 않게 많았다.
파란바지를 입고 그 새까만 학생들의 대열에 끼어 등교깃을 오를 때마다 나는 나의 바지가 너무 눈에 틔는 것 같아
견딜 수 없는 수치심에 시달렸다. 수치심이 목에까지 차오르면 나는 하는 수 없이 엄마의 얼굴을 떠올리며
입술을 악다물었다.
“괜찮아, 바지 따위가 뭔데...”
입술을 자주 악다물다보니 내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나는 점점 파란 바지를 입고 있지 않은 친구들 사이에
끼어 있고 싶지 않았다. 오로지 홀로 파란 바지를 입고 있는 나는 학교 생활이 점점 즐겁지 않았고
공부도 시들해졌고 홀로 모든 불행을 지닌 아이처럼 늘 숨을 자리가 그리웠다.
그러나 나는 고집이 있는 편이었다. 이제는 집안 사정이고 어머니의 처지고 무엇이고 간에 스스로 다짐한
파란바지를 결코 포기할 수도 없었다. 매서운 겨울 바람 속을 나는 파란 바지로 견뎌내면서 스커트를 입던
지난 봄, 여름, 가을을 마냥 그리워했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그 파란바지의 원 주인인 큰 언니로부터 나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등굣길이 비슷한 우리 자매는 맛나당 빵집(맞나?)이 있던 작은 사거리의 예전 인천여고 교문자리까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걸어가곤 했었는데 그날은 언니가 나에게 먼저 후딱 가버리거나 자기가 간 다음
한참 후에 집을 떠나거나 하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혹시 등굣길에 함께 가게 되어도 내가 언니의 동생인
척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자신이 수치심에 시달리며 입고 다녔던 바로 그 파란바지를 대물림하여 자기 동생이 입고 다니게 된 사실이
친구들에게 알려지는 것이 언니는 싫은 거였다. 챙피하다는 거였다. 나를 보면서 언니는
자신의 수치를 보는 것 같아 괴로웠던 것이다.
언니의 속내야 어떻든 내 가슴은 큰 충격으로 거의 무너질 지경이었다. 나는 입을 악물고 변소깐에 가서 울었다.
소리 없이 끄억끄억 울었다. 언니의 한마디 말로 인하여 나는 더할 수 없는 수치심에 시달렸고 심지어는
마치 그 파란바지가 죄수복처럼 느껴졌다.
봄이 와서 파란바지를 벗고 다른 친구들과 똑같은 색깔의 스커트를 다시 입었지만 나는 파란바지 이전으로
돌아가지지는 않았다. 친구들 사이에 섞여 있어도 나는 홀로였다.
다시 겨울이 오는 것이 싫어서 원형교사 옥상에 올라가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곤 했다.
지금도 외로움을 느낄 때는 하늘을 바라본다.
수치심이 느껴지거나 세상 사에 마음이 휘둘려 번거로워질 때도 하늘을 본다.
청명한 날의 파란 하늘을 바라보면 마음이 맑아지고 가벼워진다. 하늘을 바라보며 번거로운 마음을 비우고나면
마음이 넓어지고 자유로와져서 좋다.
그 옛날 나의 파란바지가 내 성격을 소심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파란바지가 아니었으면
나는 하늘을 바라보는 습관을 갖지 못했을지 모른다. 하늘을 바라보면서 나는 나에게 닥쳐오는
본의 아닌 실수 따위에서 오는 수치심을 극복하고 나에게 주어지는 작고 큰 상처들을 치유해나갔던 것이 틀림없다.
오늘 하늘은 군데군데 구름이 떠 갈 뿐 맑고 푸르다. 햇빛도 랑랑하다.
봄볕에 기지개 한 번 켜본다.
앞으로도 이따금 마음이 번거로워지면
하늘빛을 닮은 내 마음 속의 파란바지를 꺼내 입어보련다.
2006.04.10 18:44:16 (*.194.13.205)
형옥아 !!
심각했던 너의 어린시절의 그 파란바지 이야기가 왜 이리 재미있고,
우울해서 웃을일이 없던 나에게 호탕하게 웃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구나...
지금은 우습지만,
그당시에는 얼마나 심각한 문제 였었겠니 ? 너만아는..
옷,
하면, 나도 빼 놓을 수 없는 사건이 있었단다...
우리는 칠남매,
어느날 우리 아버지께서 굉장히 털이 많이달린 따뜻한 남자 잠바를
사오셨지,
좀 여성스럽지 못하게 보이는 나를 주려고 말야..
따뜻하면 됐지 모양은 무슨 하시면서 , 학교에 갈때 입으라는거야...
초등학교 4학년정도 됐을까 ?
거역하기 무서운 아버지 앞이라 말도 못하고,
아침에는 그걸 입고 가다가 한 5분뒤에는 벗어서 들고 다녔다는거 아냐...
추위에 덜덜 떨어도 말야... 그때도 어른들이 보기엔 아무거나 입을 줄 알았지만
얼마나 챙피한지, 추위에 떠는게 낫지,
죽어도 못 입겠는 거야...
집에 다와서는 걸치고, 이렇게 고생을 하고 다녔다는거 아냐.....
지금 생각하니, 너무 우습다...그치 ?? 형옥아 크게 두번 웃게 해 주어서 고맙다... (:l)
심각했던 너의 어린시절의 그 파란바지 이야기가 왜 이리 재미있고,
우울해서 웃을일이 없던 나에게 호탕하게 웃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구나...
지금은 우습지만,
그당시에는 얼마나 심각한 문제 였었겠니 ? 너만아는..
옷,
하면, 나도 빼 놓을 수 없는 사건이 있었단다...
우리는 칠남매,
어느날 우리 아버지께서 굉장히 털이 많이달린 따뜻한 남자 잠바를
사오셨지,
좀 여성스럽지 못하게 보이는 나를 주려고 말야..
따뜻하면 됐지 모양은 무슨 하시면서 , 학교에 갈때 입으라는거야...
초등학교 4학년정도 됐을까 ?
거역하기 무서운 아버지 앞이라 말도 못하고,
아침에는 그걸 입고 가다가 한 5분뒤에는 벗어서 들고 다녔다는거 아냐...
추위에 덜덜 떨어도 말야... 그때도 어른들이 보기엔 아무거나 입을 줄 알았지만
얼마나 챙피한지, 추위에 떠는게 낫지,
죽어도 못 입겠는 거야...
집에 다와서는 걸치고, 이렇게 고생을 하고 다녔다는거 아냐.....
지금 생각하니, 너무 우습다...그치 ?? 형옥아 크게 두번 웃게 해 주어서 고맙다... (:l)
2006.04.10 21:27:59 (*.85.62.107)
정우야
지금은 웃음이나도 사춘기때는 그렇지안아
어른들은 그렇게 신경을 못쓰더라
특히 막내는..
첫아이는 소중해서 그렇고
둘째는 남자애라서 그렇고
막내는 귀엽지만 대개 막기른다는 느낌이들더라
지금도 자기는 왜태어났는냐고 물어온단다
넘 미안해
울친척이 4남1녀인데
도시락을 싸면 제일착한 3째가 양보를 잘해서 제일잘 못해주었는데
언제나 까다로운 아이에게 잘하게되더래
그런데 외대를 나오고 과테말라에서 일하다가 모자도안쓰고 오토바이타고 달리다가 죽었단다
죽고나서 형들에게 양보만하던 아들이 얼마나 생각나는지 알려왔드라
정우야
숙경이가 경주에서 사진 찍은거좀 보내달래
자기 이메일을 알아야 하는데 홈피에 들어오려면 1달은 걸린다는군
정우 이엘을 여기 적어놓면 숙경이가 보고 연락할거야
지금은 웃음이나도 사춘기때는 그렇지안아
어른들은 그렇게 신경을 못쓰더라
특히 막내는..
첫아이는 소중해서 그렇고
둘째는 남자애라서 그렇고
막내는 귀엽지만 대개 막기른다는 느낌이들더라
지금도 자기는 왜태어났는냐고 물어온단다
넘 미안해
울친척이 4남1녀인데
도시락을 싸면 제일착한 3째가 양보를 잘해서 제일잘 못해주었는데
언제나 까다로운 아이에게 잘하게되더래
그런데 외대를 나오고 과테말라에서 일하다가 모자도안쓰고 오토바이타고 달리다가 죽었단다
죽고나서 형들에게 양보만하던 아들이 얼마나 생각나는지 알려왔드라
정우야
숙경이가 경주에서 사진 찍은거좀 보내달래
자기 이메일을 알아야 하는데 홈피에 들어오려면 1달은 걸린다는군
정우 이엘을 여기 적어놓면 숙경이가 보고 연락할거야
2006.04.10 22:29:45 (*.235.100.22)
형오기언니! 드디어 활자루다 만들어 버리셨네요.
전 맏딸이라 얻어입은 일 없는데 3년 밑인 여동생은 교복 얻어입은 일로 한이 맺혀서 지금도 그때 얘기를 하면 울먹거린답니다.
저희 경우에는 딱 3년 차이니까 제가 인일 들어갈 때 동생이 인천여중 들어오게 됬쟎아요?
근데 전 몸이 커져서 3년을 입을 수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엄마가 3학년에 다시 한벌을 맞춰 주셨어요.
그래서 엄마가 동생보고도 어차피 3년 못 입으니까 1년만 헌 옷 입으면 2학년에 새로 해준다고 했는데 동생이 얼마나 서러워 하든지 아마 몇달 지나서 해줬을거에요.
게다가 교과서는 신학기에 비닐로 다 싸서 썼기떄문에 새책이나 다름없었거든요.
그거 쓰라고 했다고 또 난리를 쳐서 그것도 단한 번으로 끝나고 다 새로 사주셨는데 문제는 다른 곳에서 생겼답니다.
가사시간에 맨처음 에프론을 만들쟎아요? 바이어스를 둘러서 말이에요.
그 바이어스가 제가 쓰고 남은게 상당히 많이 있었지요.
그래서 에프론 재료만 새로 사고 바이어스는 남은걸로 쓰라고 하고 동생도 그건 새거니까 그러기로 했어요.
그런데 에프론이 완성되고 바이어스를 주욱 둘러 가는데 글쎄 그만 ...........
마지막 20센티정도가 모자라는거에요. 3년 전에 산 천이니까 같은 것도 없고. 그다음은 저도 생각이 안나는데 만든것을 다 뜯고 새로 다시 했는데 아마도 엄마가 다 만들어 주셨겠지요.
지금 생각해도 바보스러운게 한번 재어 보고 했으면 될것을!
아니면 그부분을 배색을 잘 해서 멋스럽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좌우지간 그 사건 이후로 우리 엄마는 절대로 그동생에게 뭐 물려 받으라는 소리를 안하시게 됬지만
그동생은 지금까지 그일을 슬퍼하고 있답니다(억울해한다는게 맞나?)
우리도 그문제만큼은 그애 편들어줬는데 50 이 다되서도 그러니까 좀 염증이 났거든요.
그런데 형옥언니 글 보니까 역시 그런 일이 평생을 가는가 싶네요.
언니 진난 번에 이야기 하실 때와 똑같은 걸 보니 정말 가슴에 각인되셨나봐요?
맏딸로 태어난 게 공연히 미안스러워집니다.(:l)
전 맏딸이라 얻어입은 일 없는데 3년 밑인 여동생은 교복 얻어입은 일로 한이 맺혀서 지금도 그때 얘기를 하면 울먹거린답니다.
저희 경우에는 딱 3년 차이니까 제가 인일 들어갈 때 동생이 인천여중 들어오게 됬쟎아요?
근데 전 몸이 커져서 3년을 입을 수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엄마가 3학년에 다시 한벌을 맞춰 주셨어요.
그래서 엄마가 동생보고도 어차피 3년 못 입으니까 1년만 헌 옷 입으면 2학년에 새로 해준다고 했는데 동생이 얼마나 서러워 하든지 아마 몇달 지나서 해줬을거에요.
게다가 교과서는 신학기에 비닐로 다 싸서 썼기떄문에 새책이나 다름없었거든요.
그거 쓰라고 했다고 또 난리를 쳐서 그것도 단한 번으로 끝나고 다 새로 사주셨는데 문제는 다른 곳에서 생겼답니다.
가사시간에 맨처음 에프론을 만들쟎아요? 바이어스를 둘러서 말이에요.
그 바이어스가 제가 쓰고 남은게 상당히 많이 있었지요.
그래서 에프론 재료만 새로 사고 바이어스는 남은걸로 쓰라고 하고 동생도 그건 새거니까 그러기로 했어요.
그런데 에프론이 완성되고 바이어스를 주욱 둘러 가는데 글쎄 그만 ...........
마지막 20센티정도가 모자라는거에요. 3년 전에 산 천이니까 같은 것도 없고. 그다음은 저도 생각이 안나는데 만든것을 다 뜯고 새로 다시 했는데 아마도 엄마가 다 만들어 주셨겠지요.
지금 생각해도 바보스러운게 한번 재어 보고 했으면 될것을!
아니면 그부분을 배색을 잘 해서 멋스럽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좌우지간 그 사건 이후로 우리 엄마는 절대로 그동생에게 뭐 물려 받으라는 소리를 안하시게 됬지만
그동생은 지금까지 그일을 슬퍼하고 있답니다(억울해한다는게 맞나?)
우리도 그문제만큼은 그애 편들어줬는데 50 이 다되서도 그러니까 좀 염증이 났거든요.
그런데 형옥언니 글 보니까 역시 그런 일이 평생을 가는가 싶네요.
언니 진난 번에 이야기 하실 때와 똑같은 걸 보니 정말 가슴에 각인되셨나봐요?
맏딸로 태어난 게 공연히 미안스러워집니다.(:l)
2006.04.11 05:24:59 (*.108.144.31)
형옥이언니!
갑자기 형옥이언니가 하늘을 바라보며 가슴 아팠던 파란바지가
생각났는지 마음이 조금 아프네요.
외롭고 답답할 때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그 순수하고 착한 마음은 사진에서
뵈온 형옥언니와 매취가 잘 돼네요.
하늘은 넓고 우리의 마음을 잘 헤아리지요.
오해없이 내 속 깊은 곳의 진실을 알아주죠.
언니의 "파란바지"글 감동 받으며 잘 읽었읍니다.
언니!
우리 차 한잔해요.(:l)(:l)(:l)(:l)(:l)(:l)(:l)(:l)
갑자기 형옥이언니가 하늘을 바라보며 가슴 아팠던 파란바지가
생각났는지 마음이 조금 아프네요.
외롭고 답답할 때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그 순수하고 착한 마음은 사진에서
뵈온 형옥언니와 매취가 잘 돼네요.
하늘은 넓고 우리의 마음을 잘 헤아리지요.
오해없이 내 속 깊은 곳의 진실을 알아주죠.
언니의 "파란바지"글 감동 받으며 잘 읽었읍니다.
언니!
우리 차 한잔해요.(:l)(:l)(:l)(:l)(:l)(:l)(:l)(:l)
2006.04.11 09:21:17 (*.133.152.178)
인숙아, 정우야,
졸고를 읽어주고 댓글 써주어 고맙구나.
그대들이 있어 이 봄날 나의 외로움이 조금은 가시는 걸.ㅎㅎㅎ(x1)
유명옥 후배님,
지난 토욜에 꽃뜨루 찾아 주셔서 무지 반가웠고
게다가 날 데리고 미스티까지 가서 피아노 연주 들려주어서
무지무지 즐겁고 행복했다오.
주신 책 잘 읽어볼게요.
글구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꽃뜨루 4층에서 번개 하게되면
오셔서 피아노 연주해주세요. 비록 피아노는 고물에 소리도 좋지 않지만유.
그대의 멋진 연주솜씨라면 모든 걸 카바하고도 남을 거예요. ㅎㅎㅎ
미국땅의 춘자 후배님,
그대는 내 가슴 속을 훤히 들여다 보고 계시누만요. ::´(::´(::´(
맞아요, 하늘은 넓고 우리의 마음을 잘 헤아리지요.
춘자 후배의 마음도 하늘을 닮은 양,
어찌 형오기 속내를 그리 훤히 꿰고 계시당가요?
언젠가 그대와 내가 둘이 앉아
정말로 찡~~~ 한 차 한잔 나눌 날 있을 거예요. (:l)(:l)(:l)
졸고를 읽어주고 댓글 써주어 고맙구나.
그대들이 있어 이 봄날 나의 외로움이 조금은 가시는 걸.ㅎㅎㅎ(x1)
유명옥 후배님,
지난 토욜에 꽃뜨루 찾아 주셔서 무지 반가웠고
게다가 날 데리고 미스티까지 가서 피아노 연주 들려주어서
무지무지 즐겁고 행복했다오.
주신 책 잘 읽어볼게요.
글구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꽃뜨루 4층에서 번개 하게되면
오셔서 피아노 연주해주세요. 비록 피아노는 고물에 소리도 좋지 않지만유.
그대의 멋진 연주솜씨라면 모든 걸 카바하고도 남을 거예요. ㅎㅎㅎ
미국땅의 춘자 후배님,
그대는 내 가슴 속을 훤히 들여다 보고 계시누만요. ::´(::´(::´(
맞아요, 하늘은 넓고 우리의 마음을 잘 헤아리지요.
춘자 후배의 마음도 하늘을 닮은 양,
어찌 형오기 속내를 그리 훤히 꿰고 계시당가요?
언젠가 그대와 내가 둘이 앉아
정말로 찡~~~ 한 차 한잔 나눌 날 있을 거예요. (:l)(:l)(:l)
2006.04.11 09:46:05 (*.46.165.16)
형옥아! 네 글을 읽으면 마치 네가 하는 찻집에서 차를 마시면서 나누는 담소같은 생각이 든다.
그래말야. 우리가 학교 다닐땐 무엇이든지 다 아껴 써야 하는 시대라 교복을 "우라 까이" 해서 입곤했지.
그리고 언니가 입던 교복을 물려입느건 당연한 일이고...
난 다행이 첫째라 교복은 늘 맞추어 입었지만 , 그 교복이 닳아 바져서 색도 낡고, 보풀이 일도록
새로 맞춰 달라는 소릴 못하고 보냈던 생각이 난다. 오랬만에 옛날 생각에 젖게 해주어서 고마워..
그래말야. 우리가 학교 다닐땐 무엇이든지 다 아껴 써야 하는 시대라 교복을 "우라 까이" 해서 입곤했지.
그리고 언니가 입던 교복을 물려입느건 당연한 일이고...
난 다행이 첫째라 교복은 늘 맞추어 입었지만 , 그 교복이 닳아 바져서 색도 낡고, 보풀이 일도록
새로 맞춰 달라는 소릴 못하고 보냈던 생각이 난다. 오랬만에 옛날 생각에 젖게 해주어서 고마워..
2006.04.11 10:18:45 (*.85.62.107)
형옥아
네진심을 글로 표현못해 미안해
아마도 어릴적부터 너의 고운 본심을 키우기에는 수많은 가시덤불이 있엇구나
그곳에서 여린네마음이 상처받고 자신을 사랑하는법을 자연을보면서 다독였으니
그과정을 거쳐서 지금의 너가된것이야
지금의 너가 얼마나 멋진지
춘자후배도 좋아하잔니
나도 널좋아하고
글솜씨가 있으면 마음의 응어리들을 저렇게 표현해봄 좋으련만 흑흑흑
중학교때 우리 바지안입었다
치마입었지
얘들아 안그러냐?
네진심을 글로 표현못해 미안해
아마도 어릴적부터 너의 고운 본심을 키우기에는 수많은 가시덤불이 있엇구나
그곳에서 여린네마음이 상처받고 자신을 사랑하는법을 자연을보면서 다독였으니
그과정을 거쳐서 지금의 너가된것이야
지금의 너가 얼마나 멋진지
춘자후배도 좋아하잔니
나도 널좋아하고
글솜씨가 있으면 마음의 응어리들을 저렇게 표현해봄 좋으련만 흑흑흑
중학교때 우리 바지안입었다
치마입었지
얘들아 안그러냐?
2006.04.11 10:33:02 (*.133.152.178)
인수가~
좋은 아침!!!!
손주녀석 데리고 놀이방에 갈 시간이 가까운데
먼저 컴 한번 열어봤지.
우리 중학교 때 초겨울까지는 동복에 스커트를 입다가
날씨가 더 추워지면 바지로 바꿔 입었당게로.
치마만 입은 건 고등학교 때라니까.
바지에 대한 상처가 없으니까 바지 입었던 것도 기억에 없구먼 그려. ㅎㅎㅎ(x18)
성애야, 반가워.
너는 첫째라서 새 교복 입는 행운을 누렸구나.
하지만 첫째라서 힘든 점들도 참 많았을 거야.
첫째 안 해본 나는 첫째의 힘든 것 잘 알 턱이 없고
막내가 힘든 것만 말하게 되는구나.
성애야,
첫째로서의 힘들었던 점을 차 마시며 담소하듯
여기에 솔솔 풀어내 보면 재밌겠다 싶으네.
기대해도 좋을까요? (:f)
좋은 아침!!!!
손주녀석 데리고 놀이방에 갈 시간이 가까운데
먼저 컴 한번 열어봤지.
우리 중학교 때 초겨울까지는 동복에 스커트를 입다가
날씨가 더 추워지면 바지로 바꿔 입었당게로.
치마만 입은 건 고등학교 때라니까.
바지에 대한 상처가 없으니까 바지 입었던 것도 기억에 없구먼 그려. ㅎㅎㅎ(x18)
성애야, 반가워.
너는 첫째라서 새 교복 입는 행운을 누렸구나.
하지만 첫째라서 힘든 점들도 참 많았을 거야.
첫째 안 해본 나는 첫째의 힘든 것 잘 알 턱이 없고
막내가 힘든 것만 말하게 되는구나.
성애야,
첫째로서의 힘들었던 점을 차 마시며 담소하듯
여기에 솔솔 풀어내 보면 재밌겠다 싶으네.
기대해도 좋을까요? (:f)
2006.04.11 11:12:35 (*.172.219.180)
인중 다닐때 집에 와선 바지는 갈아 입던 기억이.. 요즘의 청바지(파란바지)인데 그 바지가 지금도 유행 할 줄은 그 누가 알았을가요? (<-형오기씨 염장 질르는 이야기 아님 ^^) 그 당시 여자는 그런바지(부루진)를 입지 않았던 기악이 나는군요. 그 때의 그 파란바지가 사려깊고 정서적인 현재의 형오기를 만들었다 생각 되어 지기도 하는군요 ^^
2006.04.11 12:56:13 (*.18.145.222)
드디어 형오기님의 <파란 바지>가 출시되었군요.
그렇군요.
남들이 생각하기에는 전혀 크게 마음 아파할 일이 아닌 것 같은 것도
당사자에게는 두고 두고 깊은 상처로서, 흔적을 남기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군요.
다시 한 번
행동이나 말 한마디에 상대방이 마음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겠다고 다짐합니다.
배다리 중앙시장이니 "로즈 양장점" 이니 하는 단어가 나오니 불현듯 그 시절이 눈앞에 그려집니다.
형오기님은 참말로 심성이 고우셨군요.
그리고 고집도 아주 없지는 않으셨구요.
용케도 잘 참으셨기에 이렇게 여러분들과 함께 옛날 이야기 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봄이 와서 파란바지를 벗고 다른 친구들과 똑같은 색깔의 스커트를 다시 입었지만 나는 파란바지 이전으로
돌아가지지는 않았다. 친구들 사이에 섞여 있어도 나는 홀로였다>
왠지 위 문장은 청춘시절의 방황이랄까 그런 소설을 많이 쓴 헤르만 헷세의 글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떠 오르는군요.
그래서 그런지 싸~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옛글을 다시 읽는 듯한 정다운 기분도 듭니다.
<지금도 외로움을 느낄 때는 하늘을 바라본다.>
보통은
외롭거나 힘들 때에는 별들이 총총하게 빛나는,
아님 초생달이나 그믐달이 외롭게 떠 있는 밤 하늘을 바라보면서 마음을 추스린다고들 하는데
형오기님은
청명한 날의 파란 하늘을 바라보면서
마음을 비우고, 마음을 넓히며, 맑은 마음을 가지려고 하신다는 것
더구나 그 자유스러움을 얻으려 하신다.......
보기가 좋으며 저희들도 정신이 밝아지는 듯 합니다.
2006.04.11 13:05:09 (*.85.62.107)
형오기의글을 읽으며
어떤교회가 생각났다
서울로 이사와서 어느교회를갈까 망서리던중 기독방송에나온 여자 목사님의 1달 강의를듣고
그교회로등록을했지
1주일에 30명씩 새신자가 몰려오는데 대단하더라구
아직교회를 못지어서 학교를 빌려서 예배를 보구있었는데
어느날 찬양을 드리러나온 10명중 한사람에게 마이크가 돌아갔는데
40대남자였어
중학때부터 자기는 못생겼다는것에 깊은 열등감을 가졌는데 도무지 청년이 되어서도 그사실로부터 벗어날수없었데
오는 그열등감을 여러분앞에 내어놓는다면서 저정말 못생겼읍니까
하고말하는거야
모두다 아니요 하고 소리쳤지
그런데 그남자신도가 얼마나 친근감이드는지 말이야
나중알고보니 그교회의 특징이 자기의 가장 약점을 대중앞에서 내보이면서 발표하면 그때부터 자유로와 진다는거야
새로운 발상이기도 하였는데 학교가 너무 추워서 그리고 내가 10년만 젊었더라면
같이동조하겠든데 다른곳으로 옮기고 말았지
형오기가 오늘따라 더욱돋보이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내이야기를 너에게 말하면 대신써줄껴?
어떤교회가 생각났다
서울로 이사와서 어느교회를갈까 망서리던중 기독방송에나온 여자 목사님의 1달 강의를듣고
그교회로등록을했지
1주일에 30명씩 새신자가 몰려오는데 대단하더라구
아직교회를 못지어서 학교를 빌려서 예배를 보구있었는데
어느날 찬양을 드리러나온 10명중 한사람에게 마이크가 돌아갔는데
40대남자였어
중학때부터 자기는 못생겼다는것에 깊은 열등감을 가졌는데 도무지 청년이 되어서도 그사실로부터 벗어날수없었데
오는 그열등감을 여러분앞에 내어놓는다면서 저정말 못생겼읍니까
하고말하는거야
모두다 아니요 하고 소리쳤지
그런데 그남자신도가 얼마나 친근감이드는지 말이야
나중알고보니 그교회의 특징이 자기의 가장 약점을 대중앞에서 내보이면서 발표하면 그때부터 자유로와 진다는거야
새로운 발상이기도 하였는데 학교가 너무 추워서 그리고 내가 10년만 젊었더라면
같이동조하겠든데 다른곳으로 옮기고 말았지
형오기가 오늘따라 더욱돋보이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내이야기를 너에게 말하면 대신써줄껴?
2006.04.11 14:06:08 (*.17.204.40)
꽃뜨루에서 만나 형옥언니를 부추겨서 일명, '파란바지' 스토리를 빨리 올리라고 해놓고는 쪼끔 그 얘기의 맛을 미리 봤지요.
이렇게 많은 선배님들께서도 앞다투어 그러한 기억에 대해 낱낱히 밝혀주시고,
특히 명옥언니도 사정은 다르지만(가해자) 씩씩하게 올려주셔서..... 저도 여러가지중 한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어요.
일명 <카라 넓은, 딱딱하고 보온성 없는 겨울오바>입니다.- 제목이 길지요?
저도 5년 위의 큰언니와 연년생인 작은 언니가 있는데, 당연히 저는 선도 안보고 그냥 데려간다는 셋째딸입니다.
세자매가 각각 다른 학교에 다니다 보니 웃옷은 다 다르지만 치마는 똑같았어요.
그렇지만 막내딸이 인천여중에 척 붙자 기분좋게 사시사철 교복은 제 것으로 맞춰 주시고(중앙시장의 미광라사),
응당 언니들의 치마는 제 스패어가 되어 제 것을 빨때는 언니 것을 입고 가는 여유도 있었죠.
문제는,
겨울이었어요.
제일 큰언니는 이미 여고를 졸업 했으니 작은 언니는 그 이전에 두어번 큰언니의 카라가
무쟈게 넓은(어깨를 다 덮음)오바를 입어냈고, 날씬하고 예쁜 작은 언니는 곧 그 당시 유행인 스탠카라로
예쁜 (등 뒤에는 허리부분에 양쪽으로 단추를 달고 그 사이를 벨트로 장식이 된) 오바를 사주셨지요.
우라까이?
그런거 없었어요.
자연스레 저는 그 카라가 무쟈게 넓은 이미 빛이 바랜 큰언니의 오바를 물려받게 되었어요.
그것이 고 1때였으니... 그당시의 유행인 작은언니의 오바를 온통 친구들이 따뜻하게 반짝거리며 입고 다니는데,
저는 그 큰 카라를 머리까지 올리고 얼굴을 가리고 숭의동에서 동인천까지 버스를 타고 다녔답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 카라를 세우니 안보이는 카라의 속부분이 자연스레 보였는데, 안감으로 덧댄 그 부분이
우찌 된 일인지 헤진거에요.
엄마한테 차라리 카라를 스텐 카라로 작게 잘라서 사이즈를 줄여달라니까
좀 있으면 다른 것 사준다고 하시는 그 한마디에 한해를 넘겼죠.
다시 돌아오는 2학년 겨울, 예의 그 오바는 다시 드라이가 되어서 새것처럼 또 제 앞에 나타났어요.
그리고, 또 3학년.
차라리 안입고 추운 것이 낫다 생각에 3학년 입시로 심신이 추웠던 그 겨울에 저는 졸업식날까지 맨 스웨터에 맨스커트로
불쌍하게 졸업사진을 찍었답니다. 흑흑...::´(
작은언니가 고3 졸업하며 남은 코트요?
그거 후배를 줬답니다. 내가 미쳐.
다른 애들은 촉감조차 포근포근 반짝반짝(정말 반짝거렸어요)했는데,
제 것은 무광택에, 만지면 포근은 카니와 빳빳한 느낌이 들어(아마 겉의 잔 물결이 다 빠져서) 입어도 추위를
막을 수도 없었으니 입으나 안입으나 별 차이는 없었을거에요.
그래도 졸업식 사진을 보니 얼굴이 부여니 넉넉해 보여서 쟤는 그런저런 걱정없는 유복한 집 자식으로
비춰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죠.
그래도 인일여고를 나온 언니를 둔 친구들이 대물림 받은 빛이 바래거나 혹은 붉은 빛이 돌거나, 혹은
잉크빛이 돌거나, 또는 털이 다 빠져서 반질거리느 스웨터를 안입은 것만 해도 천만, 만만 다행이라 사려되옵니다.
아침에 그넘의 오바를 안보이려고 일찍일찍 등교했더니, 공부 등수야 어찌 되었든
중3, 고3 한번도 지각이 없었으니 그 또한 저에게 공헌한 바가 크다 아니할 수 없지요?
그래도,... 그래도.... 다행히, 그 보상을 해주신게 있어요.
하복, 춘추복이 저희땐 있었는데, 각 계절마다 상의 두벌씩, 게다가 두꺼운 겨울 플레어 스커트는
데드론인가 뭔가 이름의 얇고 시원한 재질의 스커트로 맞춰 주셨답니다. 미광라사에서.... 끝.(x11)
이렇게 많은 선배님들께서도 앞다투어 그러한 기억에 대해 낱낱히 밝혀주시고,
특히 명옥언니도 사정은 다르지만(가해자) 씩씩하게 올려주셔서..... 저도 여러가지중 한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어요.
일명 <카라 넓은, 딱딱하고 보온성 없는 겨울오바>입니다.- 제목이 길지요?
저도 5년 위의 큰언니와 연년생인 작은 언니가 있는데, 당연히 저는 선도 안보고 그냥 데려간다는 셋째딸입니다.
세자매가 각각 다른 학교에 다니다 보니 웃옷은 다 다르지만 치마는 똑같았어요.
그렇지만 막내딸이 인천여중에 척 붙자 기분좋게 사시사철 교복은 제 것으로 맞춰 주시고(중앙시장의 미광라사),
응당 언니들의 치마는 제 스패어가 되어 제 것을 빨때는 언니 것을 입고 가는 여유도 있었죠.
문제는,
겨울이었어요.
제일 큰언니는 이미 여고를 졸업 했으니 작은 언니는 그 이전에 두어번 큰언니의 카라가
무쟈게 넓은(어깨를 다 덮음)오바를 입어냈고, 날씬하고 예쁜 작은 언니는 곧 그 당시 유행인 스탠카라로
예쁜 (등 뒤에는 허리부분에 양쪽으로 단추를 달고 그 사이를 벨트로 장식이 된) 오바를 사주셨지요.
우라까이?
그런거 없었어요.
자연스레 저는 그 카라가 무쟈게 넓은 이미 빛이 바랜 큰언니의 오바를 물려받게 되었어요.
그것이 고 1때였으니... 그당시의 유행인 작은언니의 오바를 온통 친구들이 따뜻하게 반짝거리며 입고 다니는데,
저는 그 큰 카라를 머리까지 올리고 얼굴을 가리고 숭의동에서 동인천까지 버스를 타고 다녔답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 카라를 세우니 안보이는 카라의 속부분이 자연스레 보였는데, 안감으로 덧댄 그 부분이
우찌 된 일인지 헤진거에요.
엄마한테 차라리 카라를 스텐 카라로 작게 잘라서 사이즈를 줄여달라니까
좀 있으면 다른 것 사준다고 하시는 그 한마디에 한해를 넘겼죠.
다시 돌아오는 2학년 겨울, 예의 그 오바는 다시 드라이가 되어서 새것처럼 또 제 앞에 나타났어요.
그리고, 또 3학년.
차라리 안입고 추운 것이 낫다 생각에 3학년 입시로 심신이 추웠던 그 겨울에 저는 졸업식날까지 맨 스웨터에 맨스커트로
불쌍하게 졸업사진을 찍었답니다. 흑흑...::´(
작은언니가 고3 졸업하며 남은 코트요?
그거 후배를 줬답니다. 내가 미쳐.
다른 애들은 촉감조차 포근포근 반짝반짝(정말 반짝거렸어요)했는데,
제 것은 무광택에, 만지면 포근은 카니와 빳빳한 느낌이 들어(아마 겉의 잔 물결이 다 빠져서) 입어도 추위를
막을 수도 없었으니 입으나 안입으나 별 차이는 없었을거에요.
그래도 졸업식 사진을 보니 얼굴이 부여니 넉넉해 보여서 쟤는 그런저런 걱정없는 유복한 집 자식으로
비춰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죠.
그래도 인일여고를 나온 언니를 둔 친구들이 대물림 받은 빛이 바래거나 혹은 붉은 빛이 돌거나, 혹은
잉크빛이 돌거나, 또는 털이 다 빠져서 반질거리느 스웨터를 안입은 것만 해도 천만, 만만 다행이라 사려되옵니다.
아침에 그넘의 오바를 안보이려고 일찍일찍 등교했더니, 공부 등수야 어찌 되었든
중3, 고3 한번도 지각이 없었으니 그 또한 저에게 공헌한 바가 크다 아니할 수 없지요?
그래도,... 그래도.... 다행히, 그 보상을 해주신게 있어요.
하복, 춘추복이 저희땐 있었는데, 각 계절마다 상의 두벌씩, 게다가 두꺼운 겨울 플레어 스커트는
데드론인가 뭔가 이름의 얇고 시원한 재질의 스커트로 맞춰 주셨답니다. 미광라사에서.... 끝.(x11)
2006.04.11 17:16:02 (*.16.184.62)
그 냥 지나 갈수가 없어서 ~~~ 광희후배 나도 세쩨딸~~~ 고등 학교 졸업 할때가지
새옷을 입는건 겨우 추석이나 명절때였고 언제던지 치마는 몇번 허리춤을 접어 입는것은
당연한것으로 알고 지냈으니깐 말이야 헌데 두 언니중 한 언니가 사범을 나오자
난 여중을 입학한거였지 그런데 그때 사범학교 교복은 여중 교복으로 우라까이
해서 입을수 있는형이였기에 나도 어쩔수 없이 ::´(::´(::´( 우라까이한 교복을 입었는데
우라까이는 오른쪽이 왼쪽으로 오기에 단추 구멍을 지그 제그로 밖은것이 살짝
보이기에 그것을 가리느라고 무척 애쓰며 입었기에 가슴을 못피고 다니고 ~~~
가끔은 나같이 단추구멍을 누벼 입고 다니는 아이들을 볼수가 있었거던 헌데
중3때 세탁소에서 분실을해서 그만 속이 후련함과 동시에 아 이젠 가슴을 펴고
딴 교복을 입을수 있구나 생각했지만 1년 입자고 새것을 마련할수는 없는 형편인데
우연히 우리집앞을 6년이나 지나다니던 1년 선배 마 영옥 선배한테 얻어 입었느데
그땐 정말 남은 1년을 가슴를 펴고 다녔거던 그것뿐인가 코트 역시 큰 언니가 3년
내가 6년 인일 11회 조카가 받아서 6년을 입었으니 합이 15년을 입었으니
그 코드 묻어 주어할것인데하고 우리 조카하고 ㄲㄲㄲ 배를 쥐었었지 ㅎㅎㅎ
그 코드도 사지인데 역시 우라까이 한번했지 그땐 큰 카라를 작게 줄이는
모양변경도 했고 말이야 그런데 아주 우연히 1989년도에 모국 방문후 이곳 미국
으로 오느라고 김포공항에서 어리벌벌[조영희 ]누구에게 뭘 묻게 되였는데 바로 그분이
마 영옥~~~
선배 아니겠어 ~~~ 허나 날 못알아 보는것 ㅉㅉㅉ 허나 인일임엔 틀림없으니깐
금방 휘리릭 [조 영희] 맘이 오고 갔으니 그 교복 빌려입은 야기 물론이지~~~
'
헌데 아이구 ~~~ 그 선배 그것도 잊으셨더라구 허나 그 선배가 [소녀에 기도에]
맟추어 하늘 하늘 무용을 하던 추억을 떠 올려 드리니 무척 좋아 하시더군
형옥아 ! 넌 울때 끄억 끄억 우니? 표현이 정말 불쌍해서 ㄲㄲㄲ 모두 안녕 (:l)
새옷을 입는건 겨우 추석이나 명절때였고 언제던지 치마는 몇번 허리춤을 접어 입는것은
당연한것으로 알고 지냈으니깐 말이야 헌데 두 언니중 한 언니가 사범을 나오자
난 여중을 입학한거였지 그런데 그때 사범학교 교복은 여중 교복으로 우라까이
해서 입을수 있는형이였기에 나도 어쩔수 없이 ::´(::´(::´( 우라까이한 교복을 입었는데
우라까이는 오른쪽이 왼쪽으로 오기에 단추 구멍을 지그 제그로 밖은것이 살짝
보이기에 그것을 가리느라고 무척 애쓰며 입었기에 가슴을 못피고 다니고 ~~~
가끔은 나같이 단추구멍을 누벼 입고 다니는 아이들을 볼수가 있었거던 헌데
중3때 세탁소에서 분실을해서 그만 속이 후련함과 동시에 아 이젠 가슴을 펴고
딴 교복을 입을수 있구나 생각했지만 1년 입자고 새것을 마련할수는 없는 형편인데
우연히 우리집앞을 6년이나 지나다니던 1년 선배 마 영옥 선배한테 얻어 입었느데
그땐 정말 남은 1년을 가슴를 펴고 다녔거던 그것뿐인가 코트 역시 큰 언니가 3년
내가 6년 인일 11회 조카가 받아서 6년을 입었으니 합이 15년을 입었으니
그 코드 묻어 주어할것인데하고 우리 조카하고 ㄲㄲㄲ 배를 쥐었었지 ㅎㅎㅎ
그 코드도 사지인데 역시 우라까이 한번했지 그땐 큰 카라를 작게 줄이는
모양변경도 했고 말이야 그런데 아주 우연히 1989년도에 모국 방문후 이곳 미국
으로 오느라고 김포공항에서 어리벌벌[조영희 ]누구에게 뭘 묻게 되였는데 바로 그분이
마 영옥~~~
선배 아니겠어 ~~~ 허나 날 못알아 보는것 ㅉㅉㅉ 허나 인일임엔 틀림없으니깐
금방 휘리릭 [조 영희] 맘이 오고 갔으니 그 교복 빌려입은 야기 물론이지~~~
'
헌데 아이구 ~~~ 그 선배 그것도 잊으셨더라구 허나 그 선배가 [소녀에 기도에]
맟추어 하늘 하늘 무용을 하던 추억을 떠 올려 드리니 무척 좋아 하시더군
형옥아 ! 넌 울때 끄억 끄억 우니? 표현이 정말 불쌍해서 ㄲㄲㄲ 모두 안녕 (:l)
2006.04.11 17:36:22 (*.79.2.217)
어머... 언니들~, 괜히 죄송하네요.
저는 딸이 하나여서 물려입는거 몰랐거든요.
그리고 어쩜 그 시절 양장점을 기억하시는지...
한참 저도 기억을 더듬어뵤니 현미양장점 이었어요.
그런데 철몰랐던 저는 언니꺼 물려받는걸 부러워했었어요.
그래서 고3때 꼬마 한경숙 언니 코트를 떼써서 얻어입었지요.
그때 경숙이 엄마께서 정말 입을거냐고 몇번씩 물어보신
기억이 납니다. 형옥언니 잘 읽었어요.
여러 사람이 공감하고 어릴적 기억이 나게 해주셔서
감사드려요. 놀러갈게요.(:f)(:f)(:f)
저는 딸이 하나여서 물려입는거 몰랐거든요.
그리고 어쩜 그 시절 양장점을 기억하시는지...
한참 저도 기억을 더듬어뵤니 현미양장점 이었어요.
그런데 철몰랐던 저는 언니꺼 물려받는걸 부러워했었어요.
그래서 고3때 꼬마 한경숙 언니 코트를 떼써서 얻어입었지요.
그때 경숙이 엄마께서 정말 입을거냐고 몇번씩 물어보신
기억이 납니다. 형옥언니 잘 읽었어요.
여러 사람이 공감하고 어릴적 기억이 나게 해주셔서
감사드려요. 놀러갈게요.(:f)(:f)(:f)
2006.04.11 19:16:05 (*.17.204.40)
제가 언니들 방에 들어와서 분탕질을 하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만. ㄲㄲㄲㄲㄲㄲㄲㄲㄲ
아니 웃을 수가 없어서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호문언니의 얘기를 반도 안 읽었는데 벌써부터 웃음이 나기 시작을 하더니..........
속으로는 "으이구... 호문언니 또한............... 으이구...ㅋㅋㅋㅋ 지겨...ㅋㅋㅋㅋㅋㅋㅋ"
우라까이 단추가 오른쪽 왼쪽이 바뀐 장면에서는 눈물이 나더니...ㅋㅋㅋ
세탁소에서 분실후의 1년의 마영옥 언니 교복 장면에서는 뒤집어지더니...ㅋㅋㅋㅋ
<형옥아 ! 넌 울때 끄억 끄억 우니? 표현이 정말 불쌍해서 ㄲㄲㄲ > --- 요 장면에서 저는 쓰러졌습니다... 미쳐미쳐.호문언니. (:u)
아니 웃을 수가 없어서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호문언니의 얘기를 반도 안 읽었는데 벌써부터 웃음이 나기 시작을 하더니..........
속으로는 "으이구... 호문언니 또한............... 으이구...ㅋㅋㅋㅋ 지겨...ㅋㅋㅋㅋㅋㅋㅋ"
우라까이 단추가 오른쪽 왼쪽이 바뀐 장면에서는 눈물이 나더니...ㅋㅋㅋ
세탁소에서 분실후의 1년의 마영옥 언니 교복 장면에서는 뒤집어지더니...ㅋㅋㅋㅋ
<형옥아 ! 넌 울때 끄억 끄억 우니? 표현이 정말 불쌍해서 ㄲㄲㄲ > --- 요 장면에서 저는 쓰러졌습니다... 미쳐미쳐.호문언니. (:u)
2006.04.11 20:44:11 (*.85.62.107)
광희후배 안녕
형옥인 어릴때부터 작가의 기질이 있엇다니까
여리고 예민하고
호문인 느긋하고 넉넉한느낌이고
그런데 오바를15년이나 입었다고?
그옷을 어찌 버렸을까잉
나는 광희가쓴 다른친구들이 물려받은 털쉐타색갈이 너무웃겨서..
우리학교는 털쉐타라서 물려주기가 어려웠겠네
교복은 무조건 크게 한번마추면 그것으로 끝 아니었나
형옥아
중학교때 동복에 바지가있었단다 몸빼모양바지라네
정영순도 기억하더군
글쓰는 애들이 무엇이든 자세히 기억을하더군
사물을 보는눈이 달라
형옥인 어릴때부터 작가의 기질이 있엇다니까
여리고 예민하고
호문인 느긋하고 넉넉한느낌이고
그런데 오바를15년이나 입었다고?
그옷을 어찌 버렸을까잉
나는 광희가쓴 다른친구들이 물려받은 털쉐타색갈이 너무웃겨서..
우리학교는 털쉐타라서 물려주기가 어려웠겠네
교복은 무조건 크게 한번마추면 그것으로 끝 아니었나
형옥아
중학교때 동복에 바지가있었단다 몸빼모양바지라네
정영순도 기억하더군
글쓰는 애들이 무엇이든 자세히 기억을하더군
사물을 보는눈이 달라
2006.04.12 01:04:19 (*.133.152.178)
아니아니... 댓글이 열여덟이나 !!!! (x3)
클나따.... 지금 졸려 주굴찌경인데 댓글 쓰다가 증말 주글찌도몰라몰라.
광태기님, 여리기님, 인수기님, 안광희님, 호문이님, 혜수기님,
저유,,,,,,, 숙제 안 하고 그냥 맞고 말래유. ㅋㅋㅋㅋㅋ (x7)
에쿠 도망가자. ==3 ==3 ==3
클나따.... 지금 졸려 주굴찌경인데 댓글 쓰다가 증말 주글찌도몰라몰라.
광태기님, 여리기님, 인수기님, 안광희님, 호문이님, 혜수기님,
저유,,,,,,, 숙제 안 하고 그냥 맞고 말래유. ㅋㅋㅋㅋㅋ (x7)
에쿠 도망가자. ==3 ==3 ==3
2006.04.12 09:12:10 (*.183.209.233)
에구~!
언니,동생들...
언니옷 뒤집어서 다시 맹글어 입는건 암것두 아니예요.
시상에~! 중핵교 들어가니까
그 공원 꼭대기가 을매나 춥던지
항상 어깨를 쭈구리구 다닌 생각만 납니다.
중2 되니깐 울엄니 큰 선심 쓰듯 당신이 여고시절에 입던(진명여고)
색이 뉘~~~렇게 바랜 코트를 우라까이 해주시는 거예요.
아니~! 고것은 6,25때 불에 타지두 않았는지....
당신은 그래도 고교시절에 코트도 입고 다니셨고만
오째 주서온 딸도 아닌데 기래도 10살까진 고명딸 이라구
울아부지 무릎에서 자랐는데...
그 먼지가 푸석푸석 나는 30년이나 된 옷을 뒤집어 입힐 생각을 하셨는지,::´(
난 지금도 의심스러워요.
진짜 울엄니가 낳은 딸인지....(x6)
그걸 입구 핵교를 가라는데 을매나 챙피한지
입으니 등은 따뜻하더만
따뜻이구 뭐구 벗어버리구 싶지만
엄니가 무셔서...
큰 눈을 확~! (x3) 뜨시믄 경끼나게 무셥거든요..::s
억지루 추울때만 입구댕겼어요.
우라까이를 했어두 뉘~~~렇게 바랜 퍼르죽죽한 색깔은
안변하드라구요...(잔등부분은 더~!!!)
따뜻하구 좋았던 기억은 쬐꼼도 읎고
기~~~냥 챙피해서 누가 등허리만 보는것 같아
허리를 좍~~ 못펴구 다녔어요.
(어마~!!! 그러구 보니 내가 그래서 등이 구부정 한가부다...ㅋㅋㅋ)
그후 고등핵교 올라가서 내가 애덜 갈쳐서 용돈 벌어
코트 해입었죠~ 딥다 좋은 걸루 해입은것 같은데
등허리는 엄니 헌옷만큼 따뜻하진 않더라구요...(x10)
참~
이 봄날 아침에 옛날야그 쓰자니 웃기기도하구 콧등이 시큰도 해지네요.
얼마니 힘들었으믄 그러셨을까~~~? 하면서.... (x23)
언니,동생들...
언니옷 뒤집어서 다시 맹글어 입는건 암것두 아니예요.
시상에~! 중핵교 들어가니까
그 공원 꼭대기가 을매나 춥던지
항상 어깨를 쭈구리구 다닌 생각만 납니다.
중2 되니깐 울엄니 큰 선심 쓰듯 당신이 여고시절에 입던(진명여고)
색이 뉘~~~렇게 바랜 코트를 우라까이 해주시는 거예요.
아니~! 고것은 6,25때 불에 타지두 않았는지....
당신은 그래도 고교시절에 코트도 입고 다니셨고만
오째 주서온 딸도 아닌데 기래도 10살까진 고명딸 이라구
울아부지 무릎에서 자랐는데...
그 먼지가 푸석푸석 나는 30년이나 된 옷을 뒤집어 입힐 생각을 하셨는지,::´(
난 지금도 의심스러워요.
진짜 울엄니가 낳은 딸인지....(x6)
그걸 입구 핵교를 가라는데 을매나 챙피한지
입으니 등은 따뜻하더만
따뜻이구 뭐구 벗어버리구 싶지만
엄니가 무셔서...
큰 눈을 확~! (x3) 뜨시믄 경끼나게 무셥거든요..::s
억지루 추울때만 입구댕겼어요.
우라까이를 했어두 뉘~~~렇게 바랜 퍼르죽죽한 색깔은
안변하드라구요...(잔등부분은 더~!!!)
따뜻하구 좋았던 기억은 쬐꼼도 읎고
기~~~냥 챙피해서 누가 등허리만 보는것 같아
허리를 좍~~ 못펴구 다녔어요.
(어마~!!! 그러구 보니 내가 그래서 등이 구부정 한가부다...ㅋㅋㅋ)
그후 고등핵교 올라가서 내가 애덜 갈쳐서 용돈 벌어
코트 해입었죠~ 딥다 좋은 걸루 해입은것 같은데
등허리는 엄니 헌옷만큼 따뜻하진 않더라구요...(x10)
참~
이 봄날 아침에 옛날야그 쓰자니 웃기기도하구 콧등이 시큰도 해지네요.
얼마니 힘들었으믄 그러셨을까~~~? 하면서.... (x23)
2006.04.12 20:16:46 (*.130.126.110)
오랜만에 들어오니 너무나 웃겨서 그냥 지나갈 수 가 없구나...
우라까이 정말로 친근한 소리네..
김혜숙이는 누구 약올리니??;:)
난 1회인 우리 언니가 중1, 중3, 고3에 오바를 맞춰 입으면서 계속 나한텐 헌 것만 주는거야...
주는건 좋은데 카라가 항상 스포츠 카라여서 목도리를 꼭 해야되는데...
그게 가만히 있질 않고 왔다 갔다해서 어찌나 속상했던지...::´(
언니가 고3이 되고 내가 고1때는 내가 새로 사려니까 언니는 대학가서 입을거라고 또 언니가 맞췄어...
빤짝빤짝하는 빠이로에, 카라는 동그란 카라로 내가 입고 싶어했던 걸로...
그 속상함이란 어찌 표현하리!! 지금도 열이 나네....
내가 고3되던 해... 우리 언니는 대학가서 학생 오바 못입는다고 서울서 멋있는걸로 해입고 빠이로 오바는 또 나에게 왔단다....
그때의 스포츠카라가 싫어서 그런지 우리 아이들에게도 스포츠카라는 안 사주게 되더라...
우리 언니가 이 글 보면 자기 얘기했다고 화내겠네... 할수없지 붜....::p
우라까이 정말로 친근한 소리네..
김혜숙이는 누구 약올리니??;:)
난 1회인 우리 언니가 중1, 중3, 고3에 오바를 맞춰 입으면서 계속 나한텐 헌 것만 주는거야...
주는건 좋은데 카라가 항상 스포츠 카라여서 목도리를 꼭 해야되는데...
그게 가만히 있질 않고 왔다 갔다해서 어찌나 속상했던지...::´(
언니가 고3이 되고 내가 고1때는 내가 새로 사려니까 언니는 대학가서 입을거라고 또 언니가 맞췄어...
빤짝빤짝하는 빠이로에, 카라는 동그란 카라로 내가 입고 싶어했던 걸로...
그 속상함이란 어찌 표현하리!! 지금도 열이 나네....
내가 고3되던 해... 우리 언니는 대학가서 학생 오바 못입는다고 서울서 멋있는걸로 해입고 빠이로 오바는 또 나에게 왔단다....
그때의 스포츠카라가 싫어서 그런지 우리 아이들에게도 스포츠카라는 안 사주게 되더라...
우리 언니가 이 글 보면 자기 얘기했다고 화내겠네... 할수없지 붜....::p
누빈털바지인줄알았더니
교복바지였구나
꼭 우리막내딸 생각이난다
유치원 에 오빠가 입던옷을 입혀보냈는데 엄마가 와야된다고해서 가봤더니
생일파티를 해주는거야 그달 애들에게
앞으로 나온 막내가 6살때 표정이 넘쑥스ㅡ럽고 난처해하고 부끄러워하던표정을 지으며
남자애와 케익자르던모습이생각난다
그막내애는 언니보다 5살이나 차이가나서 언니옷을 입히기도 뭣하고
가끔 오빠옷을 입히기도 했는데
난리난리쳐서 초등학교부터는 본인의옷을 사주기 시작했단다
중학교때에는 바지입은기억이 안나고 너무나큰 교복치마가 생각나는데..
중1때 너와 한반이었는데 그때표정이 생각난다 좀굳은표정...
나는 내가 못마땅해서 그런표정짓는줄알았지
아무도 그바지색갈은 알지도 못했단다
네짝은 알았을까..
여기서 우리의슬픔을 털어놓고 홈피에띠워 보내자 ........ 멀리멀리
성토대회를 하는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