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어머니의 손 맛 김치 맛                  

  
  식탁 앞에 앉으면 무언가 텅 빈 것 같다.
어머니가 계시지 않음을 느낀다. 아내가 만든 김치며 된장국 등에선 어머니의 음식맛을 느낄 수가 없다.
어머니가 담근 김치 하나만으로도 입맛이 당겨 단번에 밥그릇을 비우던 모습을 떠올린다.
멸치젓갈을 넣은 김장김치, 손으로 양념을 버무려 낸 생김치맛을 어디에서도 맛볼 수가 없다.
아내와 어머니의 김치맛이 왜 다른 것일까.

어머니의 김치맛은 어릴 적부터 길들여져 맛의 향수가 되어 녹아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내는 바쁜 생활 탓에 약식으로 김치를 담그기가 예사이며, 심지어는 시장에서 김치를 사와 식탁에 올려놓기도 한다.

김치맛을 내는 여러 조건 중에서 젓갈맛을 빼놓을 수 없다.
김치를 담그기 위해선 상품(上品)의 양념과 배추, 무를 준비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젓갈을 잘 담가두어야 한다.  

나는 어머니의 마음과 삶이 젓갈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멸치나 새우가 젓갈이 되기 위해선 뼈와 살이 푹 삭아서 흐물흐물해져야 한다.
자신의 육신과 마음을 다 내주어야 입안에 가득 고이는 젓갈맛이 될 수 있다.
소금에 저려서 뼈와 살이 녹고, 사라지지 않을 정도로 썩어 발효돼야 한다. 자신을 버려야 참맛을 내는 것이다.

어머니의 일생이 그러하지 않은가. 가족들을 먹이고 입히며 위하는 일이라면,
자신의 버리는 것을 오히려 행복으로 알아오지 않았는가.
간장·된장·고추장·젓갈은 발효식품이다. 잘 삭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오랜 세월과 정성이 필요하고, 여기에다 알맞은 기후가 보태져야 한다.
무엇보다 정성과 사랑이 깃들어야 발효가 잘 될 수가 있다.

어머니가 담근 김장김치엔 민족고유의 맛이 흥건히 고여 있다.
한국의 흙과 기후와 채소들이 만들어낸 맛과 어머니의 손맛이 보태진 진미다.
삼동(三冬)의 추위를 견디고, 새봄을 맞기까지 식욕을 돋구어주는 김장김치맛 속엔
한국가을의 풍요와 맑음이 깃들어있고, 겨울의 추위와 지혜가 담겨 있다.

김치를 먹을 때의 서걱서걱하는 소리 속에 젓갈맛이 우러나와 오묘한 맛을 낸다.
서양의 샐러드는 썬 야채 위에 소스나 마요네즈를 뿌려먹는 지극히 단순한 음식이지만,
우리 김장김치는 배추,무를 오랫동안 소금에 절여 두었다가
고추·생강, 파·깨 등을 섞은 양념에 청각, 굴과 젓갈을 넣어 맛을 낸 것이다.
채소의 절임과 발효로 빚어내는 맛의 오케스트라라고나 할까.
지휘자는 말할 것도 없이 손으로 양념을 슬슬 흩어가며 김장을 하는 어머니다.
김장김치는 맵싸하고 짭조롬한 가운데, 화끈한 맛이 있다.

우리 김치말고는 어느 음식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맛이다.
김치맛은 팔도(八道) 팔색(八色)이다. 지방마다 다르고 집집마다 다르다.
김치맛 속에는 기후와 지형과 사람들의 성격이 드러난다.
국에 넣으면 시원한 김칫국이 되고, 된장과 함께 넣어 끊이면 구수한 김치찌개가 된다.
한국의 어떤 음식과도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맛의 샘이라고나 할까.

우리 어머니가 자식을 키우시던 때는 궁핍한 시대였다.
마음껏 자식들을 배불리 먹일 수도 없었고, 변변한 반찬을 해줄 수도 없었다.
남새를 양념과 젓갈을 넣어 손으로 버무려서 손맛을 내놓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온 식구들이 식탁에 앉으면 웃음이 감돌고 먹음직스러웠다.
어느 음식이나 입에 맞지 않은 것이 없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고
금세 무치고 끓인 음식들에선 어머니의 사랑이 배어 있었다.
어머니는 가족들의 식사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흐뭇한 미소를 띠시고
자신은 누룽지나 식은밥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를 다시 뵐 수 없게 되자, 알싸하고 입안에 침이 가득 고이는 김치맛이 새삼 그리워진다.
자신을 소금에 저리고 뼈와 살을 녹여서 가족들을 위해 진국맛, 젓갈맛을 낸 분이 어머니셨다.
자신을 소리없이 발효시킨 삶으로 가정에 건강과 웃음을 피워내셨다.
아, 어떤 업적이나 남에게 내세울 일이 없더라도, 어머니의 일생은 거룩하고 훌륭했다.

나는 가끔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의 뼈와 살을 녹여 발효시켜서
기막힌 묘미를 내는 사람이 될 수 없을까 생각해본다.
그것은 아름다운 헌신이고, 깨달음의 경지이며, 사랑의 실천이 아닐 수 없다.
사랑은 입안에 녹아 사라지는 사탕맛이 아니고, 뼛속에 남아 있어서 입맛을 되살려주는 젓갈맛이 아닌가 한다.
식사 자리에 어머니가 계시지 않은 것처럼 김치맛도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어디 가서 입안에 짜릿하게 남아 있는 그 감칠맛을 느낄 수 있을까.

한국의 자연과 어머니의 사랑이 녹아 발효가 된 우리 고유의 참맛을 어떻게 되살려놓을 순 없을까.
아이들은 차츰 김치냄새를 싫어하고 서양음식에 길들여져 가고 있다.
어머니의 김치맛이 점점 사라져가는 것은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일이지만,
알게 모르게 민족고유의 문화가 자취를 감추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나라를 잃고 말, 글, 이름조차 빼앗겼던 때가 있었지만
간장·된장·고추장·김치 등 음식문화만은 뼛속에 녹아 있어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우리 문화와 기질을 지켜낸 게 음식문화였다.
가족들의 식사시간이 즐거워야 행복한 가정이라고 생각한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식탁이 텅 빈 것처럼 맛의 공백과 허전함을 느낀다.
어머니의 김치맛과 사랑의 손맛이 그립기만 하다.

                                                                                        글 : 정목일 (수필가)        발췌 : 느티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