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 똑,

주인장님들 계십니까?
마당쇠 친구되옵는 여리기 문안드립니다.
새해 가내에 건강과 행복과 사랑이 한 아름 하시길 기원합니다.

신년이 되었는데도 예전에 문전성시를 이루던 3동이
요사이는 조금 적적한 듯 하여 객이 들어 왔습니다.
잠시 쉬면서 이야기 좀 나누어도 되겠지요?
하긴 뻔뻔스러운 이 넘의 이야기가 이미 시작되었는데 마님들께서 어떻게들 하시겠습니까.

지금 무드 있는 음악을 들으면서 웬만해서는 가까이 하지 않는 커피를 마시면서,
가마솥 커피 맛을, 그 때 분위기를 떠 올리면서
그리고 알게된 분들의 얼굴을 그려보면서 이 글을 띄우고 있답니다.

오늘 아침은 춥다고 하기에 오랜만에 딸내미가 사서 보내준 털 자켓을 입고 나왔는데
그 옷을 걸치면서 갑자기 고등학교 시절이 떠오르는 군요.
겨울의 이야기를 풀어 놓겠으니 얼른들 따뜻한 아랫목으로 둘러앉으시죠.

그 때가 고1인지 고2인지 체육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운동을 몹시 좋아해서 체육시간에 땡땡이치는 일은
하루에 한 번 벤소에 가서 대,소일을 치루지 않을 때처럼
개운치  않은 일이다라고 여기는 인간입니다.
그 날도 신나서 급우들과 함께 교복 윗저고리를 아무 생각없이 벗다가 순간적으로 움칫 멈추었지요.

요기서 잠깐 카푸치노 커피 한 모금 마시고 쎈치멘탈한 노래도 계속 듣겠습니다.
카프치노니 모카니 헤즐넛이니 블루 마운틴이니 하는 커피는 그 넘이 그 넘 같아서 도대체가 구별을 못하겠더라고요.
맞습니다 호문님. 그저 6.25 커피, 다방 커피가 그래도 저한테는 제격입니다.
참 그 가마솥 커피도 아주 쓸 만 합디다.
아직도 남아 있는지 모르겠네?

그날 체육시간이 있는지 모르고 글쎄 털 세타를 입고오지 않았겠습니까?
왜 세타가 잘 못 되었는가요?  
뒤집어 입었나요?  
작은 것을 입고 왔나요?
여자 것을 입고 왔나요?  
빵구라도 낫나요?
그 정도라면 남들도 그리 눈치 채지를 못할 터이니 그냥 모른척하고 운동장에 나갔게요.

실은 그 때 제가 입은 털 세타는 누더기 세타, 좋은 말로 해서 짜깁기 세타였답니다.
그것도 털 색깔이 거의 비슷하였다면 남들이 짜깁기 한 것인지 모르고 넘어 갈 수 있었겠지만요
그렇다면 제가 이렇게 글로 옮길 필요가 있겠습니까?

바탕은 갈색이었고 왼쪽 가슴팍은 검은 색, 오른 쪽 간장이 있는 부근은 청색 털로, 각각 손바닥만하게 짜여 진
아주 보기 드문, 호화로운 디자인의 세타였답니다.
색깔도 산뜻한 새 것이 아닌, 때가 좀 낀 중년기의 털로 뜬, 현재 우리 나이쯤 된 그런 경륜이 있는 세타였죠.
그나마 한 가지 위안이 된 것은 다행히도 등짝은 원판이 온전하게 남아있었다는 점이었죠.

목이 타기 시작하네요.
아까보다 커피 맛이 더 쓴 것 같구요.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는데 제가 세타를 입어 본 시기가 언제인지는 잘 모르겠고
털로 짠 세타를 입어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인 것은 확실합니다.

중학교 때 친구 따라 공설운동장에 스케이트 타러 가보면 형형색색의  세타랑 목도리, 털장갑들을 착용하고
신나고, 멋지게 씽씽 달리는 또래들을 보면서 무척 부러워하곤 하였죠.
그 중에서도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은 스케이트보다도 털 세타였답니다.

제 인명클럽 멤버중에 오야붕이었던 박일복(아시는 분은 아시는 대로, 모르신 분들은 그냥 그런 녀석이 있었다고 여기십시오)
이라는 넘이 입은 털 세타는 정말 입고 싶었던 그야말로 명품이었습죠.
알록달록한 것이 왜 그리 색상도 밝고 예뻤던지 ........  무지 따뜻하기도 하였겠죠 아마?

큰형수님께서 남편이 입으시던 털 세타가 올이 빠지고 해서 버리시려는 것을 어쩜 제가 부탁해서
남아 있던 다른 색깔의 실과 연합하여 작품을 만드셨을 겁니다.

형수님께서는 새로 실을 사서 떠 주겠다고 하셨을 것이고
착한 여리기는 형수님 하실 일도 많으시고 어깨도 편치 않으신데 간단히 땜빵만 해 주시면 제가 감사히 입고 다니죠 했겠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잘 난 도련님의 그 얼굴을 위해서라도 제대로 된 옷을 입으셔야죠 라고 형수님이 안타까워 하시면,
아니예요. 교복 입으면 아무도 모를 것이고 학교에서 윗도리 벗을 일도 없으니 남들은 몰라요.
이런 따뜻한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의 포근하고 충만한 가족애를 느꼈겠죠.

저는요 저의 큰 형수님이 해 주신 것이면 밥이든, 반찬이든, 옷이든 뭐든지 좋았어요.
저의 집에는 친 누님이 안계십니다.
실은 두 분이나 계셨는데 제 귀가 빠지기 훨씬 전에 바삐 먼 길을 떠나셨다네요.
그래서 저는 누님이라는 단어에는 한없이 약해집니다.

잠깐 한 번 더 쉬었다 갈까요?

대학 통학을 할 때 저 얼마나 학교 가는 것이 즐거웠는지 아십니까?
물론 동기들 여학생들도 있고, 예쁜 후배 여학생들도 많이 있어 좋았지만
한 편으로는 멋 진, 어여쁘신 누님들도 계셔서 그 분들 볼 수 있는 통학이 얼마나 흐뭇했었다고요.

이름이나 전공과목은 모르고 얼굴이랑 학교 등만 알고 있던 분들이 더러 계셨는데
지금 자세하게 많은 분들 거론 할 시간도 없고 남의 눈도 있고 해서 대표적으로 1년 위, 2년 위 두 분만을 살짝 알려 드릴께요.
나머지 분들이 섭섭해 하셔도 할 수가 없답니다.
그러니까  여성분들은 여리기 눈에 띄는 정도는 되어야 한다니까요.

두 분 다 인일여고 출신이시네요.

한 분은 1년 위이신데 김 내과 원장님의 따님이셨어요(금방 누구라고 아시는 분도 계시겠죠?).
저의 집은 답동 성당과 애관극장 사이에 있었는데 집으로 가자면 동인천역에서 경동사거리로 해서 가는 길과  
싸리재 길로 올라가 기독병원 앞으로 해서 가는 길이 있지요.
저는 그저 싸리재 길이 편하고 좋아 그 길로 다니는데 ,
이 분 댁도 그 길에 있기에 같이, 그러나 멀찌감치 뒤에 떨어져서 간 적도 있었지요

조금 작으신(아주 작으신 분은 아닙니다) 몸매인데 얼굴이 하얗고 예쁘장하고 아주 마음이 착하신,
웃는 모습도 선하신 분이었지만 한 번도 말씀을 나누지는 못했죠.
여리기는 여자를 무서워해 그 당시 동년배 여학생들한테도 함부로 말도 건네지 못했는데 하물며....

또 한분은 2년 윗분으로 최고의 대학교 약학대학을 다니시던 분으로 제가 이제까지 보아온 분 중에서 가장 멋진 분이지요.
인일 나왔다는 황신혜가 그리 서구적이고 이목구비가 뚜렷하다고 하지만 어디에요 저에게는 택도 없는일,
그 분은 정말 그리스 미인이셨답니다.
내 여동생 졸업식에 가 보니 그 분도 여동생의 졸업 때문에 오셨던데
지금도 두고두고 후회되는 것이
같이 사진 한 장 찍자고 말씀드리지 못하고 가슴만 태우다 나중에 땅을 쳤다는 사실이지요.

이렇듯 누님에 대하여 선망의 마음을 가지고 있던 여리기에게
형수님이라는 존재는 얼마나 신나고 살 맛 나는 대상이었겠습니까?
(아주 예리한 분들은 뭐야~ 형수님 만난 시기와 인일 선배들 만난 시기는 틀리잖아 하시겠지만.
너무 따지지 마시고 그런 심정이었음만 이해해 주세요)

어렸을 때 크리스마스는 저에게는 서글픈, 생각하기도 싫은 시즌이었지요.
남들은 선물이다 케익이다 싼타글로스다 하면서 들 떠 있지만
다 큰 애들은 죄다 사내 녀석이고 막내만 어린 계집애인 우리 집에  
선물은 커녕 그 흔한 카드 한 장 올 기미가 없는 삭막한 분위기인데 뭔 즐거움이 있었겠습니까.

그저 방구석에 틀어박혀
바로 옆 답동성당에서 들려오는 성가대 찬송가나
길거리의 캐롤송(그때는 왜 그리 확성기를 크게 틀어서 방콕하는 어린양들의 속을 뒤집어 놓았는지)을 들으며
누군지를 원망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렇게 암울하던 시기에 천사와 같이 예쁜 처녀가 갑자기 나타나셔서
선물에다가 생전 처음 맛보는 케익까지 사들고 오시니 그때부터가 우리에겐 Oh happy christmas day.
눈 오는 길거리에 같이 나가 행복해하며 들뜬 마음을 숨기지 않던, 생각만 해도 행복하고 뿌듯하였던 그 날 밤.
우리에겐 형수님이 그야말로 천사님이셨답니다.

누님 같기도 하셨던 형수님이 떠 주신 털 세타인지라 짜깁기면 어떻고 낡은 것이면 상관있나요
그저 따뜻하게 잘 입고 다녔었는데 어이쿠 그 날은 산통이 깨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순간 웃 저고리릴 그냥 입고 나갈까 하다가 볼 녀석들은 다 보았을 것이고
뭐 남자들만의 학교인데 그걸 가지고 망설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뿐 아니라
사랑하는 우리 형수님이 몸소 짜 주신 것인데 그 분의 성의를 무시한데서야 어찌 도련님 자격이 있다고 하겠는가.

한편으로는 남들이 망설이고 께름칙하며 주저하는 행동을,
오히려 대담스럽고 당당하게 하면 나중에라도 넘들한테  남자답다는 칭찬이라도 들을 수 있겠다 싶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 옷차림으로 운동장에 나가 열심히 뛰었죠.

하긴 그 세타 벗고 나갈까 했지만 속내복 차림으로 운동을 할 수는 없지요.
뭐라 하는 넘들 없었고 체육선생님은 의미 있는 표정을 잠깐 띄우시기도 하셨구요.
그 옷요? 그 해 겨울 따스하니 잘 입다가 일 년 후에는 새로운 넘으로 바꾸었죠.



잘 읽었는데 자 그럼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요지가 뭐냐고 물으신다면
그냥 머리만 극적 극적 거리겠어요.

한 번 더 재촉하시면
뭐 자랑은 아니고요 그런 시절도 있었었구나 생각이 나더라는 이야기입죠.

그래도 다시 닦달을 하시면
여리기 제 잘 났다는 이야기와 우리 형수님 자랑하고픈 마음에다가
어떻게 하면 인일학생과 연관된 이야기를 만들어 내어 여러분들에게 멋잇게 보일 수가 있을까 ~하는
좀 보시기 민망한 저의 몸부림이라고 해 주세요.  


아 이제는 커피가 제법 맛이 나는 듯 하군요.

창피해 하거나 주빗 주빗 거리며 남의 눈치를 보거나 하지 않고
당당하게 임했던 대견한 여리기를 떠올리며 흐뭇해 합니다.

미군 파카 물들여 입고, 워카 신발 끌고 다니면서도
그런 것들을 멋으로들 알고
싸나이 의리를 중하게 여기던 그 풋풋한 10대의 남자들 냄새가 그리워지며
새삼스럽게 그 시절이 너무나도 아름답게 가슴에 그려져 옵니다.

충분하지 못했던 것들이 언제까지나 마음을 아프게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저의 마음을 가득하게 만들어주네요.

그 시절의 여리기는 나름대로 사내다운 데가 있었던 것 같은데
허나 지금은
나이를 먹으면서 허세만, 것 멋만 부리려고 하는,
남을 너무 의식하는 non ne가 되 가고 있음을 서글퍼 하기도 합니다.


이런,이런  커피 맛이 씁쓸해지는 듯 하군요.


주인장님

음악이 끝나가고 있네요.

장미 동산에 들어서면 서글퍼지는 마음을 달랠 수 있기에
제가 이 곳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르지죠?
여러분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아실레나?

<I love you for sentimental reasons> 곡을  좀 틀어주세요
꼭 Laura Fygi 가 부른 노래로요.



Sung Sings a(:f) Song to She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