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이 원인이었다.
      그냥 가볍게 고맙다는 인사나 할걸.

      * 인일 홈피를 위해서는 나에겐 오직 전진만이 있다는 전영희 박격포부대
      * 모든 홈피를 송두리채 섭력, 작살을 내는 송미선 따발총부대  -독일까지 원정도 가시고-
      * 멀리 브라질에서 모든 인일인들에게 사랑을 주기위하여 열정적으로 글을 올리며 자신은 조용히
        승화시키고 계신 조용희 브라보부대
      이런 분들의 댓글에 자기가 무척이나 인기있는 물건인줄 알고 어리석은  예비역 포병장교는 인일
      대선배님들에 대한 후속포격을, 그것도 거물급 목표물을 지정까지 하면서, 덜컥 약속하고 말았다.
      그래서 난 지금까지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오늘 말씀드리려는 이 분(거물급 목표물)을 인일인들은 하늘같은 왕선배로 뫼시고 있더구만.

      禹뭐시기라는 순진한 내 친구가 날 위한답시고 무심코 사용한 부적절한 낱말 하나때문에  이 분이
      진노하셔서 一喝하시니 온 인일동지가 들고일어나 즉시 긴급조치를  발동, 잘나가던 연구소장에서
      효자동 이발소장으로 변신시키고, 덤으로 씨앗도 모르는 식솔까지 선물주신 것은 주지의 사실.
      그래서 난 지금도 떨고있다.
      光자 가진사람들 대단하다는 것을 느끼면서

      오늘  비도 오고 심심한데 나도 이 분 흉좀 보고 천지 무너지는 멋진 날벼락 선물이나 받아 볼까.
      별 특별하지도 재미도 없는 이야기가 되겠지만 요사이 방문하는 손님도 없고 무료하실텐데 그냥
      어떤녀석이 풀어놓는 한 여학생에 대한 추억을 창밖의  빗소리 벗삼아  읽어 주세요.

      이 분은 내 어릴때 친구다. 국민학교 1-2학년때 친구다.
      인일에서는 神같은 존재이겠지만 미안하지만 나한테는  그냥 친구다.
      어느 누가 그 당시에 이 분이 지금처럼 커다란 인물이 될 줄 알았겠으며 이점에 대하여 후배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치 않으십니까?

      이 분이 여러분의 선배, 직전 총동창회장이셨던 바로 그 박광선님이십니다 (이하 "친구"로 약칭함)


      <국민학교 시절>

      이 친구와 1-2학년 같은 반이었는데 이 글을 쓰기위하여 그 당시의 학생들을 떠올려보니 정말 나도
      놀란것이 이름 알고 있는 여학생은 단 2명. 박광선과 김복실(강아지 이름같아서 아직도 기억함)뿐.
      그외 다른 여학생, 남학생 들의 이름은 물론  미안하게도 얼굴도 전혀 생각이 나지않는다.
      요약하자면 국민학교시절 나의 첫번째 기억하는 여학생은 박광선이었다는 사실.이것만 알면 된다.
      더 알고 싶다면 한가지만...  그후 내가 알았던 여학생은 모두 4명을 넘지 못했다.  못난몸같으니.

      어찌됐던 이 친구에 관한 국민학교때 생각나는 기사거리는 단 한가지.
      4학년인가 5학년때 행사때문에 전교생이 모두 강당에 모여 시끌버끌하고 있었다.
      난 여학생들이 주위에 있었기에 맘껏 얌전한 척  않아 있었는데 느닷없이 한 녀석이 뒷동수를 냅다
      갈기는 것이 아닌가?  돌아보니 힘깨나 쓰는 넘이었다. 달려들고 싶었지만 어캐노 힘이 딸리는데..
      맞아서 분해  그 넘을 죽이고 싶었고 여학생들 앞에서 창피스러워 죽고도 싶어서 씩씩거리고 있었
      는데,  아니 !!! 부근에 있던 한 여학생이 벌떡 일어나 그 녀석을 나무라는 것이 아닌가?
      무지 고마운 마음에 두손 모으고 우러러보니  바로  그 친구 박광선이었다.
      어찌나 고맙기도 하고 을메나 이쁘기도 했던지 그 장면이 아직도 선명히 남아 있다.

      인일 친구 여러분.  내 인생의 첫번째 여학생이면서,  어쩜 수치심과 홧병으로 폐인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인간을 구해준 이 친구를 어찌 잊을 수가 있단 말이요.
      그러니 나에게는  이 친구가  지금까지도 심상치 않은  존재로 남아있다.
      그후 국민학교 졸업때까지 학교에서 어쩌다 만나면 씩 웃고 지나는 정도가 고작이였다.


      <중학교 시절>

      4.19과 5.16 이라는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맞이한 중학교 시절, 이런 시대에 존재했다는 이유
      만으로,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이성에의  낭만에 젖어 있을 수가 없었기에 국가와 민족을 위한
      위대한 선택으로  젊은 학도 성열익은 오로지 새마을 운동에만 매진하였도다.  


      <고등학교 시절>

       2학년인가 3학년시절,  제고에서는 시험 끝나면  즉시 성적을 공개하였다.
       이 성적표가  인일여고에 까지 돌아다닌다는 소식에 난 몸서리를 쳤다.
       얼른 떠오르는 다는 것이  알고 있는 오직 한명의 학생인 박광선이가 알면 어쩌나 (혼자 착각 이었
       다는 생각이 지금 이 글을 쓰면서 퍼득 스쳐가네....)

       고교시절 기억으로는 딱 한번 이 친구를 만난 것같다.
       우리 그룹중에 박일복이란 녀석이 당시 인일- 제고 영어회화반 모임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는데
       이 녀석이 인일에서 잘 나가는 박광선 그룹과 만남을 이루기 위하여 전초전으로 박광선이랑 약속
       이 되어 우리측 수행원으로 내가 함께 가게 되었다.
       30분에서 한시간 정도 이야기 나눈것으로 기억되는데 난 부끄러워서 인사만 나누고 몇번 '응응"
       ""좋지" "글쎄"정도만 답변한 것같다.
       모임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 자리에 도대체 내가 왜 갔는지 아직도 납득이 되지않는다.
       아주 순진무구하고 정갈한 생도였다지만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내자신이 애처럽고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다.                이렇게 허무하게 고교시절이 흘러갔다.


       <대학교 시절>

       그 당시 인천에서 서울까지 통학 할때에는 서로 마주보는 좌석으로 한줄에 3명씩 모두 6명까지
       앉을수 있었다. 그래서 통학은 고교 동창끼리 자주 어울리는 모임이 되곤 했다.

       나랑  같은 학과에 인일출신이 2명 있었기에 덕분에 인일 친구분들 몇분을 알게되었지만 재미
       없는 녀석인 나는 인사나 하고 이야기 듣는 편이었다 (그때 알게 된 분이 김암이, 김경숙(희 ?),
       한영순님  등이었다)
       박광선님하고도 함께 몇번 같이 가곤 했는데 이 친구는 의대생인 관계로 얼마후 서울에서 학교 다닌
       것으로 기억된다.  짧은 기간이었지만